싱거운 소리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을 용서하라. 레비스트로스(C. Lévi-Strauss, 1908-2009)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에서 거대한 두 개의 세계를 양분한다. 청바지의 세계와 인류학(민족학, ethnologie)의 세계 말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미국 버클리에 초빙교수로 가 있을 때 이야기다. 아내와 함께 레스토랑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종업원이 대기자 명단을 작성하려고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듣자마자 종업원은 이렇게 되물었다. “The pants or the books?” 청바지 회사 설립자요, 아니면 인류학 저술가요? 이 재치 있는 이 유머엔 모종의 진실이 담겨 있다. 리바이스 청바지를 만드는 리바이스트라우스사(Levi-Strauss & Co)가 바지 업계에서 가지는 거대한 상징적 위상을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현대 인류학과 구조주의에서 차지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사실 레비스트로스를 <철학의 숲> 코너에서 다루는 것은 역설적인 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철학의 비판자이며, 철학에 대항하여 인간과학(Sciences de l'homme)을 내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철학의 본성과 한계, 나아가서는 인간이란 누구인지에 대해 더 잘 알게 해주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흔히 레비스트로스를 ‘구조주의자’라고 한다. 도대체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종종 미셀 푸코,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등을 구조주의자라 통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사상가들을 통칭하는 명칭이 흔히 그렇듯, 구조주의자로서 저들의 공통점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구조주의는 공허한 개념이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오로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만을 이야기하도록 하자.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여행기이자 자서전이기도 한 [슬픈 열대](1955)에서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을 자극한 학문으로 지질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를 들고 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뭘까? 의식할 수 있는 표면이 아닌,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는 심층에서 진실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가령 레비스트로스는 마르크스로부터 몇몇 교훈들을 간직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식은 자신을 속인다"라는 것이다. 이 짧은 문장만큼 구조주의의 핵심을 잘 이야기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2권(임봉길 옮김)에서 구조주의의 야심을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구조적 분석은 인간사회의 분명한 다양성 너머에 근본적이고 공통적인 특성에 도달하기를 주장한다. 또한 구조적 분석은 각 민족지적 사실들의 생성을 지배하고 있는 불변적 법칙들을 명시하려고 한다.” 구조주의는 의식되지는 않지만 여러 집합들에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를 발견하려는 학문인 것이다. 이 점은 체계와 구조를 구별하는 레비스트로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철학의 비판자이며 철학에 대항하여 인간과학을 내세운 레비스트로스
“구조(structure)는 체계(système)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체계는 요소들과 그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관계들로 구성된 총체를 말하지요. 구조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요소들과 여러 집합들의 관계들 사이에 불변하는 유사점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 집합이 변형을 통해 다른 집합으로 이행해 갈 수 있도록 말이에요.” 대담 형식으로 일생 동안의 학문 전개과정을 설명한 책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1988, 송태현 옮김)에 나오는 구절이다. 체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 전체인데, 이와 달리 구조는 여러 집합에 공통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집합에 공통적인 이 원리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를 예화할 수 있을까?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나는 태생적인 구조주의자입니다. 내 어머니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내가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 글을 읽기 한참 전인 시절, 하루는 내가 유모차에서 ‘부세(boucher, 정육점)’와 ‘블랑제(boulanger, 제빵점)’ 간판의 첫 세 알파벳이 ‘bou’인 것 같다고 소리쳤다는 거예요. 그 두 단어의 앞 철자들이 동일했으니까요. 그 나이에 이미 난 불변자(不變者)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불변자라고 불리는, 구조에 해당하는 것은 위의 두 단어 모두가 지니고 있는 ‘bou’라는 요소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우리 의식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고작 ‘부-’라는 무의미한 음절이며, b,o.u 세 철자의 무의미한 배열이다. 우리의 의식이 관여하는 것은 정육점이라는 의미와 제과점이라는 의미일 뿐이고, 양자에 공통적인 bou는 저 ‘두 의미를 구성하는 세부적인 의미’가 전혀 되지 못한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저 두 단어를 의미 있는 것으로 우리 의식이 고려할 때 bou는 의식에 포착되지 않는다. bou는 의식의 표면 위에서 의미(정육점, 제과점)가 구성되도록, 의식되지 않는 차원에서 기능하는 요소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의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세계의 비밀을 밝혀보려는 학문(현상학)에 대해 구조주의는 철학사적으로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레비스트로스가 ‘구조’라는 이름 아래 탐구하는 것은 바로, 여러 문화에 공통적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문화 안에서 의식되는 각종 의미들을 가능케 해주는 요소이다.
이런 구조를 탐구하는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구체적으로 어떤 인류학적 성과를 낳았을까? 그의 수많은 연구 주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친족 관계 연구와 신화 연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자는 학위 논문 [친족의 기본구조(1949)]의 연구 대상이었고 후자는 4부작으로 이루어진 후기의 대작 [신화학](1964~1971)의 연구 대상인데, ‘여러 집합에 공통적인 심층적 구조’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우리는 부분적이고 각 경우마다 상이한 설명을 계속 추구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표면상의 다양함을 설명해줄 수 있는, 한 마디로 말해 비일관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숨은 질서, 심층적인 구조를 발견해내려 애써야 할 것인가? 친족의 기본구조와 신화론은 정확하게 동일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또한 그 접근 방식들도 동일합니다.”
[친족의 기본구조]는 자연과 문화를 경계 짓는 가장 기본적인 초석을 근친상간 금지라고 이해하고서(이런 점에선 [토템과 타부]에서의 프로이트와 같다), 이 근친상간 금지를 피하면서 이루어지는, 친족 형성을 가능케 하는 결혼 협약의 기본 구조를 밝히는 연구이다. [신화론]은 813개의 신화와 이에 대한 천여 개의 변형본들을 관통하는 기본 구조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상대적으로 친족 연구보다 덜 난해하고 보다 흥미를 끄는 신화론에서 구조주의적 탐구의 예를 찾아보자.
[신화론]1권에 24번째 신화로 나오는, 담배의 기원에 관한 남아메리카 테레노족의 신화는 이렇다. 마녀를 아내로 둔 남자가 있었다. 이 남자는 꿀을 찾으러 숲으로 갔는데, ‘더 쉽게 꿀을 찾기 위해’ 신발 바닥을 서로 탁탁 쳤다. 그 후 나무 밑동이의 벌집과 함께 그는 뱀을 발견했다. 그는 뱀을 죽인 후 뱃속에서 꺼낸 뱀 새끼의 살과 꿀을 섞어서 아내에게 먹였다. 그 혼합 꿀을 먹고 몸이 가렵기 시작한 아내가 남편을 잡아먹겠다고 소리치며 따라왔는데, 우여곡절 끝에 남편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아내를 빠뜨려 죽였다. 남편은 그 구덩이를 메우고 감시했는데, 그 구덩이에서 돋아난 식물이 담배이다.
담배의 탄생에 관한 신화에서 탁탁 소리에 의한 뱀의 출현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출처: NGD>
이 담배의 탄생에 대한 신화에서 아주 주변적인 이야기며 무의미하게 보이는 요소가 ‘탁탁 발을 부딪친 후 벌집뿐 아니라 뱀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 신화 속에서 탁탁 소리에 대해 뱀이 나타난 사실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무의미한 사건인 것 같다. [신화론] 2권에 와서 레비스트로스는 이 신화를 다시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꿀에게 ‘두드리는 부름(호출)’을 보내는데, 그 결과 그는 꿀뿐 아니라 뱀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관행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관찰한 내용이 이러한 관습을 직접적으로 확증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관습은 다른 신화에 반사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 신화 안에서 무의미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요소는 ‘다른 신화에 반사되어 있고’, 아마도 그 다른 신화 속에서 처음 요소의 기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타카나 신화 안에서 ‘두드림과 뱀의 등장’은 ‘두드려서 뱀을 호출하는 일과 휘파람 소리 같은 뱀의 대답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보다 폭넓게 남아메리카의 신화들을 조사해보면, 두드림의 호출과 뱀의 응답이란 궁극적으로 여성의 자궁과 남성 성기의 대립 관계임이 드러난다. 내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하고 말하면, 소란스런 호출과 성기의 응답이라는 이런 대립은 우리의 [구지가] 역시 ‘공유하는’ 구조이기도 하다.(이런 점에서 “양쪽 반구가 서로 만나듯이 신화들이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오게 된다”는 레비스트로스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신화들의 줄거리(의미)는 서로 제각기 다르지만, 그 배후에는 바로 하나의 대립 관계가 불변하는 동일한 구조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층적 구조, 그 자체는 어떤 의미도 이야기도 아닌 이 구조는, 한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의 논리적 연쇄 과정을 추적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신화는 사라져 버린 관습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거나 다른 지역 부족들의 관습 가운데 일부를 활용할 수도 있다.” 한 이야기 안에 남아 있는 사라진 관습의 흔적, 다른 부족의 관습의 흔적은 줄거리의 내적 구조만을 바라볼 때는 그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로 남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 의식이 파악하는 줄거리와 의미 바깥에서, 무의식적인 심층에서 작동하니 말이다.
이러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서구 문화가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맹신했던, 스스로 발전하는 이성의 형태(그 대표적 예가 ‘변증법적 이성’)가 어쩌면 하나의 몽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서구 문화를 반성적으로 음미하며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과 전 세계를 열광시켰으며, 한 세기 이상 동안 프랑스에 아주 특별한 위신과 명성을 제공했던 이념과 가치를 유통시켰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서구에 몰아 닥친 대재앙들이 바로 거기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대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사회가 추상적인 사상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사실은 습관과 관습에 의해 형성되는 것인데도 말이죠.”
여기서 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것으로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추상적 사상이란 바로 합리주의라는 보편적 이름 아래 행해진 이성에 대한 낙관론을 뜻한다. 실제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말했다. “무력이 아닌 이성의 힘이 우리들의 찬란한 혁명의 원리를 전파시킬 것이다.” 19세기에 헤겔은 이 이성이 스스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입증했다. 이성에 대한 이런 낙관론은 전적으로 좋은 것이었을까? 이 낙관론은 동시에 서구적 이성을 지니지 않은 사회를 배타적으로 평가절하하는 시선을 길러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에서 레비스트로스가 ‘대재앙’이라 일컬은 식민주의, 인종주의 등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자서전인 [슬픈 열대]에는 서구의 이성이 불러온 이런 대재앙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인도의 한 지역을 목격하고 그는 이렇게 쓴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 문화를 반성적으로 음미하며 프랑스대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사회가 추상적인 사상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출처: wikipedia>
“이곳 주민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봐야만 한다. 겨우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이들의 시체가 온통 들판을 뒤덮었다. 대부분이 베틀로 베를 짜면서 살아오던 그들은, 식민지 지배자들이 맨체스터에 면직물 시장을 개설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전래의 가업을 행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굶주림과 죽음으로 몰렸다.” (박옥줄 옮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서구의 이성이 철학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빠져 있던 나르시시즘을 파괴한다. 이성이 역사를 통해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법칙(이것을 설명하는 학문이 ‘역사철학’이다)은 허구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그 법칙을 발견하고 따르는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 우월한 것이 아니다(우리는 종종 ‘이성’을 ‘사유 일반’과 혼동하는데, 구조주의가 비판하는 이성은 좁게 정의된 것으로서 바로 이런 역사 철학적 이성, 변증법적 이성을 가리킨다). 오히려 모든 사회는 나름의 긍정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학자 폴 벤느(P. Veyne)가 미셀 푸코에게 내렸던 평가를 레비스트로스에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야심찬 ‘이성(reason)’에 대립하는 ‘지성(오성, understanding)’의 사상가였다’라고. 역사를 통해 최종목적을 향해 이절적인 사회를 전체화하며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이성은 한낱 특정한 사회(서구)의 독특한 사고방식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란 레비스트로스에겐 규칙적 발전이 아니라 한낱 우연이다. “역사는 당연히 되돌릴 수 없는 우연에 속한다.” 수많은 우연 때문에 여러 문화들은 ‘우열 없이’ 서로 쪼개져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무질서한 인간 삶의 파편들 속에서 ‘최소한의’ 동질적 구조를 계산해내는 ‘겸손한 지성’이 레비스트로스가 이성 대신 집어 든, 학문의 도구이자 대상이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구조분석이 모든 사회 활동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나로서는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생활과 그것을 둘러싼 경험적 현실은 인간 세계에서 무작위로 펼쳐지는 영역인 것으로 내게는 생각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역사에 복종합니다. 나는 그저, 무질서가 지배하는 이 거대한 경험의 수프(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합니다만) 속에는 여기저기에 구성(organisation)의 섬들이 형성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변증법적 이성이 ‘전체’라는 이념을 현실화하는 데 몰두한다면, 레비스트로스의 인간과학은 무질서와 우연 속에 흩어진 채 가느다란 끈처럼 이어지다 또 끊어지고 마는 구조를 사유한다.
글 서동욱 / 서강대 철학과 교수
벨기에 루뱅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익명의 밤], [일상의 모험―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 [차이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등의 저작이 있다.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현대 프랑스의 문화인류학(민족학)자, 사회학자, 브라질의 상파울로 대학 교수.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내어나 생후 2개월 때 파리로 갔다. 파리 대학 법학부와 문학부에 입학하여 1930년 법학사와 철학사에서 학위를 받았다. 1933년에 우연히 로버트 로위의 『미개사유』를 읽게 되어 강한 감명을 받고 인류학·민족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을 떠나 1년 간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히브족 등의 원주민 사회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941년에는 미국으로 가 뉴욕의 신사회조사연구원에서 문화인류학을 연구하였고, 미국으로 망명해온 러시아 태생의 언어학자 야콥슨과 알게 되어 언어학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 야콥슨과 공동으로 『언어학과 인류학에서의 구조적 분석』을 발표하였다. 1959년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의 교수가 되어 1982년 퇴임할 때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프랑스 지성사에서 루소 이후 가장 박식한 인물로 꼽히며, 2008년에는 생존 인물로는 이례적으로 갈리마르출판사에서 펴내는 '플레야드 총서'에 이름을 올렸다. 2009년 10월 30일 101세로 타계하였다. 주요 저서로 『슬픈열대 Tristes tropiques』(1955) 『구조인류학 Anthropolo...
슬픈 열대
타 문화에 대한 서구의 오만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는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내륙 지방의 네 원주민 부족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에 대한 조사 연구를 행했다. 그 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1955년에 저술한 책이 바로 『슬픈 열대』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인류학 관찰 보고서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사상적 편력과 청년기의 체험 등이 일종의 자서전 형태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는 서구 문명의 침략성에 대해 분노를 나타 내고 있으며, 자신이 이제는 사실상 사라져버린 것을 탐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통해한다. 서양 문명이 황폐화시켜버린 열대를 조사하는 인류학자의 비애가 '슬픈 열대'라는 제목을 낳은 셈이다. 그가 비애감을 느낀 것은, 서양의 선교사, 농장주, 식민주의자, 정부관리들이 나름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고 있던 열대 원주민 사회에 침투해 들어와 그들의 정신세계를 상업주의로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서양인들이 문명인임을 자처하며 자신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지녀온 이들을 멋대로 야만이라거나 비합리적이라고 낙인찍는 오만에 대해서도 비애감을 느낀다.
오히려 그가 보기에 이른바 미개 사회는 '인간성에 관한 전체적 체험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사회는 우리들의 사회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일 뿐'이다. 세계의 다른 문화, 다른 지역에 대해 자신들의 가치 기준을 부여하려는 서구 사회의 오만함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물론 현재의 서구 사회가 기술적으로는 원주민 미개사회보다 우월할지 모른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그것이 정신적인 면에서도 우열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나무뿌리나 거미 또는 유충들을 먹기도 하고, 벌거벗은 채로 생활하는 부족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현대 서구 사회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그리고 만족스럽게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협성, 서구인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려는 사회를 야만적이라고 경멸하는 태도, 이런 것은 모두 서구 사회 자체가 부족적인 편견 또는 민족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원시인의 잔인함, 미개성의 징표처럼 간주되어 온 식인풍습도 레비-스트로스는 '조상의 몸의 일부나 적의 주검의 살점을 먹음으로써 죽은 자의 덕을 얻으려 하거나 그 힘들을 중화시키고자 하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변호한다. 그리고 '식인풍습이 죽음의 신성함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해부학 실습을 허용하는 일도 같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두 가지 유형으로 사회를 나누어 설명한다.
즉 식인풍습을 행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중화시키거나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변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자기네 육체 속으로 빨아들이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현대 서구 사회의 경우에는 같은 문제에 직면하여 그들은 정반대의 해결책을 택한다. 무섭고 끔찍한 존재들을 일정 기간 또는 영원히 고립시킴으로써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고안된 감옥, 병원 등의 시설 가운데에서 인간성과의 모든 접촉을 거부당한다. 우리가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러한 우리의 관습은 극심한 공포를 일으킬 것이다. 결국 우리와는 상반되는 관습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간주하듯이, 우리들 자신도 그들에게는 야만적으로 보여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