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감시와 처벌
<미래사상연구회> - 2003. 2. 25. 쌀쌀함.
김형효(1989),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레비스트로쓰, 라깡, 푸꼬, 알뛰세르에 관한 연구. 「1장 구조주의의 이념」
이관후
(필자에 따르면) 구조주의는 주체를 소멸시키고자 하는 반인간주의의 철학이다(45). 푸꼬에게 ‘인간’이란 18세기 후반부터 우연히 서양사에 등장된 거추장스런 개념이다. 그가 사랑한 고전시대에 인간은 ‘인간’이란 특별 개념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자연의 빈틈없는 연속 속에 스며들어 안정된 질서가 있는 세계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이성과 몰이성의 구분을 당연한 것으로 구분하고, 감시받는 환자와 감시하는 의사를 합법적으로 제도화하여 놓고, 주체와 객체를 실증주의라고 착각하여 대립시켜 놓고, 행복한 질서를 버리고 인과율과 시간의 흐름에 종속되어 역사를 우상시하는 그런 ‘인간’을 소멸시키고자 한다(52). 레비스트로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조주의는 인간을 자연 속으로 재통합한다. 만약에 주체를 제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철학의 장을 점령해왔었고 참을 수 없으리만큼 애지중지하게만 키운 아이와 같은 그 주체, 자기 자신에게만 독점적인 주의의 집중을 요구함으로써 진지한 모든 일을 방해해왔었던 그 주체를 제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38)
왜인가? 그런 인간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레비스트로쓰)의 사유 세계에서 물질/정신, 사회/상징, 객관/주관의 대립은 무의미하며, 실은 ‘무의식적 체계’만이 존재한다(34). 언제나 비어있는 무의식은 그 자체의 어떤 특정한 내용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이 정신의 무의식적 활동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정신에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면, 서로 다른 제도와 관습들에 대해 타당한 해석의 원리를 얻기 위해 그 밑바닥에 놓여있는 무의식적 구조에 도달해야한다(36). 레비스트로쓰는 무의식의 법칙이 시공을 초월하여 동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36).
무의식만이 존재하는 한, 주체의 확고한 의식 위에 진리를 찾아나서는 ‘나는 생각한다’의 철학은 사라진다. 라깡은 ‘나는 생각되어진다’라고 말할 뿐이다(39). 문학작품이나 사유의 세계를 대변하는 문헌들은 저자 자신의 주체적인 메시지가 담긴 것이 아니고, 언어가 말을 할 뿐이다. 그 책 속에서 말은 하는 것은 저자가 아니고, ‘나’라는 주체가 아니다(43).
라깡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한대로가 아니라 욕망한대로 움직인다. 욕망에 억압당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39). 개인의 운명은 무의식의 상징언어--유아기에 저장된 기억의 강도와 반작용에 의해 프로그램된--에 의해 지배된다(40). 어른이 되어 이성적 사고를 한다해도 이성적 생각은 유아기의 배후구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어른의 이성적 사고는 유아기의 고고학적 흔적을 외면한 순수한 사변일 수가 없다(40). 탄생하고 나서 유아에게 붙여지는 가계혈연상의 명명에 의하여, 그 아기는 이미 언어적 상징의 세계에 도입되고 죽음까지 그를 따라다니는 집단의 법칙에 종속된다(41). 이처럼 한 아기의 존재와 운명은 과거로부터, 밖으로부터 이미 규정된다(42). 모든 개인은 타인에 의한 타인일 뿐이다(40).
그리고 이 명제는 사르트르가 “흔히 사람들이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인즉 자신들 스스로가 만든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명쾌한 자유론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41). 푸꼬에 의하면 모든 분야에 공동적인 사고방식에 지배적일 때, 한 개인이 자신의 독창적인 목소리로 처음 어떤 것을 발굴이나 발견하였다고 주장함은, 망망대해에서 파도에 밀려가는 자기 소지품을 바라보고 안타깝게 자기 것이라고 소리지르는 것과 같다(43).
결국 구조주의는 서구적 이성, 그 이성의 보편성, 그로부터 쌓아올려진 형이상학과 이데올로기의 자아중심성--혹은 그러한 ‘인간’--에 정면 도전한 ‘과학적 탐구’라고 할 수 있겠다(25). 그들은 역사에서 절대정신, 인간의 집요한 의지를 제외시키고자 한다(31). 그들은 역사를 인간 의지의 인과성, 연속성에서 보지 않고 단절이고 비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한다(31).
따라서 구조주의는 인간과 사회생활을 수학적 작용과 기호와 자연적 물질, 그리고 제도와 체계로써 설명한다(18). 실존주의와 현상학과 해석학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체험과 정열, 시간성과 역사성, 의식과 사유, 정신적 의미들은 무의미한 허상으로 밀려난다. 그들은 인간을 연구하기 위하여 자기 시선을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린다(19). 자아의 명증적 확실성이란 없다(19). 나 안에 나는 없으며, 자기 말의 주인으로서의 독자적이고 자치적인 인격으로서의 주체는 부정된다(20). 인간의 사유세계는 밖으로 나타난 기호나 진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22). 즉 구조주의는 ‘바깥에서 보는 사유’이다(21). 또한 역사는 거대한 구조에 의해 작동되는, ‘저자 없는 연극’이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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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런 물음은 철학이 인류사에 등장한 이래 줄곧 반복되어 왔다(17. 김형효).
--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주의에 있어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런 물음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줄곧 반복되었다(발제자).
모든 고민을 일단 덮고, 구조주의에 대해 마음 속 깊이 이해해보자.
구조주의는 과학이다. 구조주의는 모든 선험적 주체를 부정한다. 주체라는 거물이 등장한 것은 아마도 르네상스 이후로 기원을 잡아야 하겠고, 데카르트에 의해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것은 신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신은 이성적이어서 위대한 존재인 인간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니체가 신을 죽였다면, 구조주의자들은 그의 현신인 인간을 죽이고자 한다. 구조주의자들이 보기에 어떤 식으로도 증명될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너무나 오만하고 제국주의적이며, (서구중심의) 진보를 신봉하는 인간. 그런 인간이란 없다. 구조주의는 인간을 제외하고 역사를 바라본다. 그러자 작디작은 인간, 신처럼 으시대지만 곧 사라지고 마는 인간, 역사의 연속성이나 인과성 같은 안개는 사라지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문법과도 같은 상징의 체계, 보편적으로 존재하지만 다양한 구조, 불연속적인 역사의 틀이 나타난다. 결국 자연계의 조직을 분석하는 것이 생물학이라면, 문화로 조직된 인간사회를 분석할 수 있는 것은 구조주의라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인간사회에 대한 최초의 진정한 과학적 관점인 셈이다.
1. 60쪽에서 저자가 유도한 문제제기는 매우 크고 원초적이다. 그 물음은 그의 첫 문장에서 예견되었다시피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이 과학이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는 불교를 지향한 레비스트로쓰나 희랍적 신화로 귀향한 푸코, 인간에 의한 모든 유토피아를 부정해버린 알뛰세르가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의 목소리를 빌린 그의 마지막 질문--“인간의 전체적인 목적과의 관계에서 그 과학이 생각되지 않는다면, 결국 그 과학은 무엇일 수 있겠는가?(60) --은 구조주의를 내내 설명한 저자치고는 너무 비약적이고 원초적이다. 인간이 부정되는데 무슨 전체적인 목적이 있단 말인가. 구조주의와 이 질문은 상호배타적일 뿐이지, 칸트가 구조주의를 ‘이해하려고 한’ 상태에서 제기될만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이것은 종교적(철학적)인 양심선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 사이에서 어떤 적절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2-1. ‘구조주의에 있어’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역사의 구조에서 발견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무엇인가가 ‘산다’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그것이 주체든 아니든 사유하든 사유하지 않든, 그것이 ‘살아있어야’ 그로부터 나오는 기호와 상징들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살아있지 않다면 그로부터 나오는 ‘입벌림’도 없다. 그의 존재와 운명이 밖으로부터 규정되어있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구조주의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존엄성’에 대해서도 ‘(오만하고 이성적인) 인간’과 동일하게 증명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는 의문이다. 또한 ‘역사’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에서 별안간 ‘인간의 존엄성’을 지적하는 것 역시 비약적인 질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라는 말이 주는 거부감 때문이랄까, 베버의 무미건조하고 필연적인 듯한 서술에서처럼 구조주의에서도 신성불가침의 필연적 구조는 ‘은유적으로’ ‘산다는 것’을 억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베버의 설명이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실은 무엇인가 암묵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음에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구조주의 역시 ‘과학’이라는 말로 다른 것들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구조주의가 대단히 ‘상징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2-2. (같은 맥락에서) 알뛰세르는 맑스의 자본론이 이데올로기가 제거된 가장 구조주의적인 저작으로 간주했지만, 발제자는 자본론의 모든 문장 앞에 ‘만약 계급투쟁이 없다면’이라는 구문이 생략되어 있다고 읽는다. 물론 이 생략된 구문은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해에서는 적어도 ‘산다는 것’이 억압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구조주의자들은 여전히 ‘주체’의 덫에 걸려 있다는 시선을 보낼까?
3. 구조주의가 서구의 이성, 서구의 주체를 쓰려뜨리려고 시도했고 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리라. 하지만 서구적이지 않은 인간--그것이 주체든 아니든, ‘차가운 사회’의 인간마저도 함께 쓰러진 것은 저자(김형효)가 느낀 것처럼 혼란을 야기시킨다. 마땅한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원초적 질문으로, 처음으로 되돌아 가 버리고 말았다. 마치 한참을 타고 간 미로에서 막다른 골목을 발견하고 다시 시작하듯이. 만약 이것이 구조주의의 필연적 귀결이라면, 구조주의는 (오만하지 않은) ‘인간’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어도 좋지 않을까? 구조주의를 만들어 내거나, 구조주의를 기억해 낸, 혹은 구조주의를 의식하는 것이 인간이듯이.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3부 규율, 제 1장 순종적인 신체
발제자 : 박지훈
규율에 관한 일반 이론
1. 푸코의 문제의식 : “17세기 초엽”“프랑스의 군대”까지 갈 것도 없다. 첫 휴가 시,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에서는 항상 왼쪽에서 서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무의식적으로 옆 사람의 발걸음에 나의 발을 맞추고,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깜짝 놀라 관등성명을 대고, 잠결에 받은 전화에다가는 “사고예방, 통신보안”이라고 말하였다. 푸코의 문제의식은 다분히 일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박 이병은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을까?
아마도 푸코는 이렇게 대답하였으리라 : 그는 “만들어지는 그 어떤 것”(204)이었다. 입대 전, 최소 수면을 동반한, 정신 나간 음주가무로 인한 그의 “틀이 덜 잡힌 체격, 부적격한 신체”(204)를 권력은 “필요한 기계로 만들면서 조금씩 자세를 교정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계획에 의거한 구속이 서서히 신체의 각 부분에 두루 퍼져나가 각 부분을 마음대로 지배하여, 신체 전체를 복종시켜, 신체를 언제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204).
2. 규율과 순종 : 푸코에 따르면, 나의 신체를 조작했던 것은 “‘규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206). 여기서 규율은 신체를 순종케 하여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강제적인 방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순종이란 “분석 가능한 신체”와 “조작 가능한 신체”가 “결부”된 개념이다. 즉, “복종시킬 수 있고, 쓰임새가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서는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체가 바로 순종하는 신체이다”(205).
3. 규율의 역사적 시기 : “순종에 관한 이러한 도식”은 “18세기에 대단히 지대한 관심을 모았던” 것이기는 하지만 신체에 대한 통제나 순종(분석+조작으로서의 순종)이 이 시기에 들어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205). 신체에 대한 통제는 “어떤 사회에서나” “매우 치밀한 권력의 그물 안에 포착되는 것”이고, 순종적인 신체는 “고전주의 시대”에 들어 “조작 가능한 신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204,205). 또한, 규율이 18세기에 들어서 처음으로 발생했다는 것도 아니다. 과거 수도원, 군대, 그리고 작업장에서 있었던 규율․훈련의 방식은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지배의 일반적인 양식이 되었”다(206). 17,18세기 이후, 규율이 “지배의 일반적인 양식”이 되어버린 시기(이를 “규율의 역사적 시기”라 표현함)는 “신체의 능력 확장이나 혹은 신체에 대한 구속의 강화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신체가 유용하면 유용할수록 더욱 신체를 복종적으로 만드는, 혹은 그 반대로 복종하면 복종할수록 더욱 유용하게 하는 그러한 관계의 성립을 지향하는, 신체에 관한 하나의 기준이 생겨나게 되는 시기이다”(206).
4. 과거의 순종, 규율과의 차이 : 그러나 ‘일반화된 규율’을 과거의 다른 무엇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체의 소유관계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노예제와 다르”며, “신체의 작업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과, 충성을 뜻하는 관례적 표현을 더 중시하는”“간접적인 복종관계”인 봉건제와도 다르고, “효용성의 증대보다는” 속세에 대한 포기를 확고하게 하는 역할이 중요한 수도원의 규율과도 다르다(206). 17, 18세기 이후, 중요한 것은 한 덩어리의 신체를 대량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운동, 동작, 자세, 속도”와 같은 “기계적인 수준”에까지 “미세한 강제력”을 행사하여, “그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며, “동작의 구조와 유효성, 그리고 그 내적 조직”이 “통제의 대상”이 되었고 신체가 활동한 “결과보다는 그 활동 과정에 주목하여, 지속적이고 확실한 강제력을 전제 삼아서 최대한으로 상세하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을 분할”하는 것이었다(205,206). 이제 “인간의 신체는 그 신체를 파헤치고 분해하며 재구성하는 권력장치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207). 이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해주기를 바라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 뿐 아니라, 기술적 방법으로 결정된 속도와 효용성에 의거하여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서, 어떻게 그들의 신체를 장악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들을 규정하고 있다”(207). 즉 이러한 규율을 통하여 우리의 신체적 능력은 증대되어 가지만, 동시에 그 발전된 신체에는 권력에 대한 증가된 복종이 내재하게된다.
5. 규율의 확산 : 이러한 규율에 대한 고안은 돌연한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이한 기원을 가지고 있고 지역적으로 산재해 있으며, 많은 경우 그다지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는 다양한 과정들로서 이해해야 한다”(207). 이러한 과정들은 학교와 군대, 구호기관, 그리고 대규모 공장을 통하여 퍼져나갔고, “어떤 경우에나, 거의 대부분”“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르는 식으로 확산되었다”(207). 그렇지만 그 과정들은 “결국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점이 앞으로 밝혀야 할 일이다”(208).
6. 세부적인 것에 대하여 : 푸코가 위에서 언급한 “근본적인 변화의 흐름”은 이후 ‘분할의 기술’, ‘활동의 통제’, ‘발생의 구조’, ‘힘의 조립’이라는 소단원을 통해서 밝혀진다. 푸코는 그 단원들을 “단계적으로 가장 쉽게 일반화한 일련의 근본적인 몇 가지 기술들의 예”, “대체로 상세하고 종종 미세한 그 나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기술들”이라고 하고 있다(208). “왜냐하면 그 기술들이야말로 신체에 대한 정치적이고 세부적인 공격양식, 권력의 새로운 ‘미시 물리학’을 규정하기 때문이고, 또한 17세기부터 사회 전역에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듯이 계속적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갔기 때문이다”(208).
근본적인 몇 가지 기술들 : 분할의 기술, 활동의 통제, 발생의 구조, 힘의 조립
1. 요약 : 규율과 훈련은 “네 가지 성격이 구비된 개체성”을 만들어냈다(250). 그것은 (공간배분의 작용에 의해서) 독방중심적이고, (활동의 규범화에 의해서) 유기적이며, (시간의 축적에 의해서는) 생성적이며, (여러 가지 힘을 조립하는 점으로는) 결합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250).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되었던 기술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그것은 (1) 일람표의 작성, (2) 작전, (3) 훈련, (4) 힘의 조립을 위한 전술이다.
2. 규율의 공간적 적용(개인-독방) : 규율의 공간적 적용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폐쇄성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질적이면서, 자체적으로 닫혀 있는 장소의 특정화를 요구한다. 그것은 천편일률적인 규율에 의해서 보호되는 장소이다”(212). 개인을 “알고, 통제하고, 활용하기”위하여, 개인들을 분할하는 공간을 조직한 것이다(215). 이와 같은 개인에 대한 공간적 분할은 “도주 방지, 방랑의 금지, 집단적인 결합 방지를 노린 전술”이기도 하다(215). 이러한 공간의 배치를 통한 통제는 18세기 말기에 출현하는 공장에서 복잡성을 띄게 되었다. “이제는 개개인을 고립시키고,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동시에, 이러한 배치를 그 자체의 고유한 요구를 가진 생산기관과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 것이다(218). “왜냐하면, 생산력이 집중됨에 따라 최대의 이익을 이끌어내고, 그것의 장애가 되는 요소들(절도, 작업 중단, 소요, 책동)을 없애며, 원자재와 공구를 보전하고, 노동력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214). 한편, 이와 같은 공간적 통제는 “서열중심”적이다(219). 이 서열은 “여러 신체를 한 곳에 뿌리박게 하지 않고, 분배하여 하나의 관계망 속에서 순환하게 하는 위치 결정에 따라 신체를 개별화시키는 것이다”(219). 효율성, 폐쇄성, 서열이 결합하여, 복합적인 공간은 “건축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적이고 위계질서를 갖는 공간”으로 탄생한 것이다(223). 여기서 “규율의 중요한 첫 번째 조작은 혼란스럽고 무익하거나 위험한 집단을 질서가 잡힌 집단으로 바꾸는 ‘생생한 일람표’(tableaux vivants)를 만드는 일이다”(223).
3, 규율의 시간적 적용(개인-유기체) : 동작에 박지가 가미된 행동에 대한 규정들, 가령, 군대의 제식훈련의 박자를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한 규정들 “사이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새롭게 일련의 강제가 적용되었다는 점과, 몸짓과 동작을 분해하는 데의 정확도와 신체를 시간 단위의 명령 틀에 맞추는 또 다른 방법이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228). 이러한 것들은 “집단적이고 강제적인 리듬 이상의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계획서’이다. 그 계획서에 따라 행위의 조립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행위의 전개와 행위의 단계를 내부에서 통제하는 방법이다”(228). 그리하여 “시간이 신체를 관통하게 된 것이다”(228). “신체와 동작의 상관화”는 “단지 일련의 정해진 동작을 가르치거나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228). “그 통제는 하나의 동작과 신체의 전반적인 자세 사이에 최선의 관계를 강요하는데, 이러한 관계의 유지야말로 효율적이고 신속한 통제의 조건인 것이다”(228). 그런데 이러한 규율은 단지 신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은 신체와 그 신체에 의해 조정되는 객체가 유지해야 할 여러 관계를 개별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229). 가령, 총기와 함께 이루어지는 군인의 제식, 올바른 글쓰기 자세, 이러한 규정들은 “움직여야할 신체의 여러 요소(오른손, 왼손, 손의 여러 손가락, 무릎, 눈, 팔꿈치 등)의 계열과, 조작되는 객체의 여러 요소(총신, 가늠쇠 구멍, 공이치기, 나사못 등)의 계열”을 “몇 가지 단순한 동작(누른다, 굽힌다)”와 상호 관련시키는 것이다(229,230). 이 “명료하고 강제적인 규정”(18세기 이론가들은 교련이라 불렀다함)은 “신체와 그것에 의해서 조작되는 물체가 맞닿는 모든 면에 권력이 스며들”게 하여, “양자를 서로 묶어 놓는다. 권력은 신체-병기, 신체-도구, 신체-기계라는 복합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231). 이러한 “권력은 선취(先取)보다는 종합의 기능을, 생산물의 강탈보다는 생산기구와의 강제적인 연결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231). 규율의 시간적 통제를 위해 사용된 기술은 시간표이다. 17,18세기 이후의 시간표는 “나태를 불허하는 원칙이었다”(231). “시간으로부터 항상 보다 많은 이용 가능한 순간을, 그리고 매순간 항상 보다 많은 유효 노동력을 이끌어내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231). 이는 “마치 적어도 점점 더 세분화하는 내적인 정비에 의하여 최대한의 속도와 최대한의 효과가 결부되는 이상적인 목표점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사소한 순간의 활용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31). “다른 수단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학생 상호 교육기관도 시간의 활용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준비되었다.
4. 위에서 언급했던 “공간을 분석하고, 모든 활동을 분해하여 재편성하는 규율은 또한 시간을 가산하여 자본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해되어야 한다”(237). 이러한 자본화는 네 가지 절차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것은 군대의 조직이 명확히 보여준다. (1) 시간의 흐름이 연속적이든, 동시적이든 간에 그것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야 하고, 각 부분들은 특정한 경계로 연결되어야 한다(237,238). (2) 그 단계들은 하나의 분석적인 도식에 따라 편성되어야 한다. 그 도식은 복잡성(난이도를 의미하는 듯 : 발제자)의 정도에 따라 결합하며, 가능한 단순한 여러 기본요소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238). (3) 분할된 시간(단계)에는 목표를 부여하고, 각 부분은 시험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수험자가 규정한 수준에 도달했는지를 알려주고,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가능케 한다. 이를 통하여 개인의 능력을 세분화할 수 있다(238,239). (4) “연속적인 계열화를 확립하여 각자에게 적합한 훈련을 수준과 경력, 지위에 따라 규정한다”(239).
5. 발생의 구조(개인-생성) : 이와 같이 시간을 분할하고 통제하는 “규율의 방식은, 매순간 서로 통합되고, 최종적인 확고부동한 지점을 지향해 가는 직선적인 시간을 출현하게 한다. 요컨대, ‘진화’ 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같은 시기에 행정과 경제면의 통제 기술에 의해서 계열을 이루고, 그 방향이 정해졌으며, 또한 축적되는 특징을 갖는 사회적 시간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241). 이것은 “‘진보’라는 의미에서 진화의 발견이다. 한편, 규율의 기술은 개인적인 여러 계열을 출현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생성’이란 의미에서 진화의 발견이다”(241). “권력의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물리학이 역사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이미 오래 전부터 역사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통제의 시행과 지배의 실현을 통해서 시간적이고, 총체적이고, 연속적이고, 축적적인 차원의 통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형성되고 있던 ‘진화’의 역사성은 그곳이 심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지금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권력의 기능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241).
6. 힘의 조립 : 과거 부대에서 “병사들의 배분은 그들의 경력과 용감성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244). 소총의 발견이라는 기술적인 변화는 전술상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제 단위부대는 특정한 “지형에 이르러서 특정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상호적으로 그 위치를 변경할 수 있는 다양한 부품으로 된 기계와 같은 것이 되었다”(244). “어떤 생산력의 효과가 그 생산력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모든 힘의 총화를 능가해야 하는, 그러한 생산력을 조직하는 일이 중요하게 될 때 똑같은 문제가 생긴다”(245). 이에 “규율이 따라야 할 새로운 요구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개인은 “부품의 빈틈없는 유기적 배치에 의해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그러한 기계 장치”에 포섭되었다(246). 이러한 요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다. (1) “개별적인 신체는 배치하고 움직이고 다른 신체에 연결할 수 있는 한 요소가 된다”(24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체의 위치, 간격, 질서 등인데 “이야말로 신체의 기능적 환원이다”(246). (2) 이에 여러 가지 계열의 시간들 역시 부품으로 조직되었다. “개인에게서 최대의 힘을 이끌어내고, 결합하여 가자 바람직한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한 사람의 시간과 다른 사람의 시간이 맞게 조정되도록 해야 한다”(247). 또한 “인생의 매순간은, 우리가 그것을 분리시키고 다른 순간들과 결합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에서 항상 유용한 힘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되었다(247). 가령, 별다른 기술이 필요 없는 작업 과정에 어린이와 노인의 값싼 노동력이 투입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3) “사람의 능력을 이처럼 세심하게 계산하여 조합하는 일은, 정확한 명령 체계를 필요로” 하였다(248). “신체들은 이제 신호들로 구성된 작은 세계 속의 한 요소이며, 신호에 따라 강요된 획일적인 반응이 따를 뿐이다”(249).
7. 사회에 대한 군사적 통제의 꿈 : 정치는 전략으로서 전쟁과 연결될 수 있다. 이는 “국가간의 정치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모든 국가들은 이를 바탕으로 서로의 경제력이나 인구의 힘을 견주었다”(252). 동시에 정치는 전술로서 군대와 연결될 수도 있다. “군사적이고 정밀한 전술 역시 이 시대에 나타나게 되어 모든 국가 내부에서의 개별적인 신체와 힘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252).
질문과 문제의 제기
1. (p205) 푸코에 따르면, 고전주의 시대 이전의 통제와 이후의 통제는 몇 가지 측면에서 다르다. 그 중 하나는 통제의 대상인데, 그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그는 “그 대상은 행위의 의미 있는 구성요소나 혹은 신체의 표현양식이 아니라, 동작의 구조와 유효성, 그리고 그 내적 조직인 것이다”고 썼다. 여기서 “동작의 구조와 유효성” 등은 이후의 서술에서 충분히 설명되고 있으나 “행위의 의미 있는 구성요소나 혹은 신체의 표현양식”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2. (p241) 생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푸코는 18세기에는 시간에 대한 규율의 방식으로 인하여 두 가지 진화의 발견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진보’라는 의미”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생성’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여기서 ‘진보’는 “최종적인 확고부동한 지점을 지향해 가는 직선적인 시간”에 대한 관념과 그러한 관념의 현실화를 의미하는 듯하다. 또한 생성은 “개인의 단계적 형성”과 매칭되는 어휘인 듯한데, 능력에 따라, 과정에 따라 구분되어 조련되는 각각의 신체적 수준이 형성되는 것을 왜 생성이라고 했는지, gene'se라 표현한 다른 이유가 있는지.
3. 푸코의 진보관?
푸코가 사용한 ‘진보’는 “최종적인 확고부동한 지점을 지향해 가는 직선적인 시간”에 대한 관념과 그러한 관념의 현실화 정도를 의미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의 진보가 규율에 의한 것이라면, 푸코는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적 발전, 성장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4. “정신의 유물론적 환원” : 신체라는 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이유는?
신체가 더 중요하니까......? 몇 년 전 우리의 베트남 참전 단체의 회원들은 한국군의 월남전 학살을 기사화 한 한 신문사에 테러를 가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보여줬던 그들에 평가는 대체로 “정신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테러는 전쟁을 경험한 ‘베테랑’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비록 물리적인, 직접적인 형태는 아니었지만, 군 가산점 위헌 판결 이후, 신참 예비군들과 휴가 나온 현역 군인들이, 즐거워야 할 연말에 보여줬던 E 여대에 대한 사이버 테러와 “예비역”을 “도마 위”에 올렸다는 이유로 행한, 부산의 P 국립대학의 페미니즘 웹진(월장)에 대한 사이버 테러, 그리고 최근에 다시 E 여대의 부총학생 회장의 발언으로 인한 사이버 테러는 세대와 정치적 성향을 뛰어넘은 예비군들의 공동적 멘탈리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제기일지라도, 군대에 대한 모욕(?)만 나오면 돌아버리는 그 해괴한 멘탈리티는 정신에 대한 직접적인 조작에서 연유한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신체”에 가해진, 폭력을 수반한 노골적인 규율화에 대한 복잡한 감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정신”을 “유물론적”으로 “환원”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5. 푸코의 ‘권력’
(1) ‘규율을 강제하는 귄력’의 행사는 어떤 세력에 의한 것인지?
나는 ‘규율을 강제하는 권력’이 각각의 의도가 내재한 전략적 관계(권력관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에 의한 것(그들의 전략, 혹은 그 효과)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그러나 자신은 없다). 그렇기에 그 전략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각종 도구들을 소유한, 혹은 그 도구들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국가’가 대개의 거시적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푸코는 이 장에서, 규율을 강제하는 권력이 있다는 것까지만 설명할 뿐, 그 권력은 어떤 세력에 의하여 행사되는 것인지를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공간을 분석하고, 모든 활동을 분해하여 재편성하는 규율은 또한 시간을 가산하여 자본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해되어야 한다”(237).
“사상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완전한 사회의 꿈을 18세기의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의 것으로 돌리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군사적 통제의 꿈도 있었다. 그것의 기본적인 준거는 자연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장치의 주도면밀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있었으며, 원시적인 계약이 아니라 끝없는 강제권에, 기본적 인권에서가 아니라 끝없이 발전되는 훈련방법에, 그리고 일반적인 의지가 아니라 자동적인 순종에 있었다”(252).
다만 나는 위의 두 문장에서 막연한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사회의 자본화를 위한 연대 세력이 ‘규율을 강제하는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발생하는 의문은, ‘그렇다면 오늘날 나의 몸에까지 거대한 규율을 행사하는 세력은 누구냐’는 것이다. 지배연합?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는 단순히 지배/피지배라는 박제된 이분법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다층적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더욱이 푸코 자신이 서술한 것처럼 “통제의 시행”과 “지배의 실현”으로 형성된 오늘날까지의 “진화”는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로 되어 있”는 상황, 달리 말하면 규율을 “명백한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民)이 주인(主)인 사회․국가에서 그것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241). 그래도 숨어 있는 지배연합? 아니면,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실현하여, 결국에는 시민들의 자발적 길들이기까지 완성하는 대업을 이룩한 죽은 자들의 망령?
(2) 푸코는 규율을 “오히려 상이한 기원을 가지고 있고 지역적으로 산재해 있으며, 많은 경우 그다지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는 다양한 과정들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207). 여기서 지역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역사회’ 정도의 어법에서 뜻하는 좁은 의미일까, 아니면 ‘미주지역’, ‘아시아지역’ 등과 같은 경우의 넓은 의미의 지역일까? 전자의 경우라면, 프랑스 내에서 지역적으로 산재해 있다는 의미거나, 아니면 프랑스가 속한 대륙내의 지역을 지칭하는 것인 듯하다. 그렇다면, ‘근대적 규율’을 기획한 서구의 세력만이 ‘규율을 강제한 권력’에 해당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게되면, 거시적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한 모든 지역의 세력은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역사관에 대한 서술.
동서양정치사상세미나 발제문(03/02/18)
미셸 푸코. 2000. 「효과적인 훈육방법」.「일망 감시방법」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3부 2장~3장, pp. 255~329.
발 제 자 : 김 혜 영
3부 제 2장 - 효과적인 훈육방법(The means of correct training)
규율․훈련을 바탕으로 하는 권력은 사취나 강제징수 대신 ‘훈육’을 주기능으로 삼는다. 권력은 사람들의 힘을 감소시키기위해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증가시키고 활용할 수 있도록 묶어두는 것이다. 권력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것을 굴복하게 만드는 대신 필요하고 충분할 정도의 개체성에 이를 때까지 계속 분리․분해한다(255).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즉 그것은 개인을 권력행사의 객체와 도구로 간주하는 권력의 특정한 기술이다. 그것은 과거처럼 초월적인 위력을 과시하는 권력이 아니라 계획적인 그러면서도 영구적인 관리방식에 의거하여 기능하는 조심성있고 의심많은 권력인 것이다. 규율을 근간으로 하는 권력은 위계질서적인 감시, 규범화된 상벌제도, 그리고 시험이라는 수단을 동원한다(256).
위계적인 감시(Hierarchical observation)
규율의 행사는 시선의 작용에 의한 강제성의 구조를 전제로 삼고 있다(256). 고전주의시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감시시설’인 군대의 야영지란 총괄적인 가시성의 효과로 작용하는 권력의 도해이다(257). 앞으로 도시계획, 그리고 건설 계획(노동자 공동주택지, 병원, 보호시설, 감옥, 학교 등)안에서 이러한 야영지의 모델이나 혹은 그것의 기초가 되는 원리, 즉 위계질서화한 감시의 공간적인 중첩이 계속 발견될 것이다(257-8).
이에 관하여 우선 개개인을 탈바꿈시키기 위한 조작의 구실을 할 건축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한 건축방식은 수용되는 사람들에 대해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행위를 지배한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권력의 효과를 행사하여, 그들을 인식의 대상으로 만들어, 결국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258). 이리하여 병원-건물이 의료행위의 공간으로, 학교-건물이 훈육의 담당기관이 되는 것이다(259).
규율의 제도는 인간행위를 관찰하는 통제장치를 확산시켰고 그 제도로 실현된 미세한 분석에 의해 사람들 주위에는 관찰, 기록, 그리고 훈육의 기구가 형성되었다(260).
원형 건축물은 관리(행정적 기능), 감시(치안유지 기능), 단속과 검사(경제적인 기능), 복종과 노동의 장려(종교적 기능)등을 갖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중앙 건물에서 모든 명령이 지시되고, 모든 활동이 기록되며, 모든 과오가 포착되고 평가된다. 모든 일은 정확한 기하학적 배치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이런 새로운 감시형태는 작업장이나 공장, 초등 교육의 재편성 과정에서 잘 관찰된다(261-266).
위계질서화된 감시는 감시의 확장과 더불어 생겨난 권력의 새로운 구조에 기인하는 것으로 규율중심적 권력은 장치의 경제성과 목적이 결합되어 통합된 조직이 된다. 또한 그 권력은 다양하고 자동적이며, 익명인 권력으로 조직된다. 왜냐하면 감시가 개개인을 대상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감시의 운용은 상부에서 하부로, 또한 하부에서 상부로, 또한 측면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망으로 된 운용이기 때문이다(266).
위계질서화된 감시에 의한 권력은, 하나의 물건으로서 소유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소유물로서 양도되는 것도 아니다. 그 결과, 규율중심적 권력은 도처에서 항상 경계하면서 통제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까지 통제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공개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규율이 계산된 시각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고유한 메커니즘에 영향을 받으므로 은밀한 것일 수도 있다(267).
규범화된 제재(Normalizing judgement)
(1) 규율중심적인 모든 조직의 중심에서는 법률이 지나쳐버린 공간을 분할하여 모든 행위들을 평가하고 처벌하기 위한 소규모의 형벌 구조가 이루어진다(268).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사소한 일을 처벌하는 데에 모든 것이 이용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처벌되고 처벌하는 보편적 구조 속에 포획되어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269). (2) 규율중심적 형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규칙 위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일체의 사항, 모든 일탈행위이다. 기준미달이라는 막연한 내용도 처벌할 수 있는 사항이 된다(269). 또한 규율중심적 체제의 처벌은 법적이고 또한 자연적인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269-70). (3) 규율중심적 처벌은 일탈행위를 없애도록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 벌은 본질적으로 교정하는 역할이 되어야 한다. 규율중심적 체계가 특히 중시하는 것은 훈련-강화되고 다양화되고 여러 차례 되풀이되는 습득-의 차원에 속하는 처벌이다(270). (4) 규율에서의 처벌은 보상-제재라는 이중적 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다(270).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서 규율 담당기구는 성적의 우열을 비교하면서 위계질서화하고 행위에 정확하게 제재를 가함으로써 행위 그 자체보다는 개인자신, 그 특성, 그들의 잠재능력, 수준과 가치까지 평가한다(271-2). (5) 서열이나 등급에 의한 배분은 이중적 역할을 한다. 즉 차이를 명시하고, 자질과 능력과 적성을 등급화하는 것이 하나이고, 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272).
요컨대, 규율중심적인 제도의 모든 단계를 포괄하며 그것의 매순간을 통제하는 상설적인 형벌 제도는 비교하고, 구분하고, 서열화하고, 동질화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요컨대 규격화하는 것이다(274). 어떤 의미에서 규격화를 추진하는 권력은 동질성을 강제한다. 그러나 그 권력은 편차를 측정하고 수준을 정하며, 특성을 규정하고, 상이점을 서로 조정하여 유익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결국 개별화를 지향한다(275).
시험 (The examination)
시험은 감시하는 위계질서의 기술과 규격화를 만드는 상벌 제도의 기술을 결합시킨 것이다. 시험은 규격화하는 시선이고,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시이다. 그것은 개개인을 분류하여,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가시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규율의 모든 장치 안에서 시험은 고도로 관례화되어 있다(276). 18세기 말 의학의 인식론적 해방을 이룬 근본적인 조건 중의 하나는 병원과 학교가 일종의 시험기관이 되었다는데 있다(277-8).
시험은 권력 행사의 일정한 형태와 지식 형성의 일정한 형식을 연결짓는 구조를 갖는다(279). (1) 시험은 권력 행사에 있어 가시성의 경제를 역전시켜 놓는다(279). (2) 시험은 또한 개인을 자료의 영역 속으로 집어넣는다(282). (3) 시험은 기록에 관련된 모든 기술을 통하여 각 개인을 하나의 ‘사례’로 만든다(284).
우리는 흔히, 개개인을 구성요소로 갖는 사회의 모델이 법률 형식에 의거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개인을 권력과 지식의 상관적 구성요소로서 만들기 위한 기술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마도 개인이라는 것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의 허구적 원자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또한 ‘규율․훈련’이라고 명명되는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의해서 제조되는 현실의 모습인 것이다(288).
사실상 권력은 생산한다.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객체의 영역과 진실에 관한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지식은 이러한 생산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규율의 종종 미세해보이는 책략이 그와 같은 위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은 그 효과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그 책략은 어디서 그렇게 광범위한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일까?(288)
3부 제 3장 - 일망 감시방법 (Panopticism)
17세기 말 한 법규에는 도시에 페스트가 발생하면, 엄격한 공간적 분할(289-290)과 기록장치에 의한 감시(290-1)가 이루어질 것을 명시하고 있다. 폐쇄, 세분되어 모든 면에서 감시받는 이 공간에서 개인들은 고정된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가장 사소한 움직임도 통제되며, 모든 사건들이 기록되고, 끊임없는 기록 작업이 중심부와 주변부를 연결시키고, 권력은 끊임없는 위계질서의 형상으로 완벽하게 행사되고, 개인은 줄곧 기록되고 검사되며, 생존자, 병자, 사망자로 구별된다(291-2). 이러한 모든 것이 규율중심적 장치의 충실한 모형을 만든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대응하는 방법이 질서이고, 질서는 모든 혼란을 정리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 즉 혼란의 상태인 페스트에 대항하여, 규율은 분석적인 권력을 행사한다(292). 나병이 추방의 의식을 만들어낸 것이 사실이라면, 페스트는 규율의 도식을 탄생시켰다. 나병이 낙인 찍히는 것이라면 페스트는 분석되고 배치되는 것이다(293).
나환자가 일종의 상징적 주민이었던 그러한 추방 공간의 자리에 규율중심적인 분할 방식의 독특한 권력기술이 적용된 것이 바로 19세기의 특징이다. ‘나환자’를 ‘페스트 환자’처럼 다루는 것, 권력의 분석적 배분방법으로 그 공간을 조직하는 것, 추방된 자들을 개인화하는 것, 다만 그 추방을 명시하기 위하여 개인화의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러한 점이야말로 19세기 초부터 규율중심적인 권력에 의해서 꾸준히 이루어진 것들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낙인찍기 위해서건 아니면 교정하기 위해서건, 비정상인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권력의 모든 메커니즘은 그러한 기술과 제도의 근원이 되는 두 가지 형태를 조합하고 있다(294).
벤담의 ‘일망 감시시설’은 이러한 조합의 건축적 형태이다. 이 것은 지하감옥의 원리 중 빛의 차단과, 숨겨두는 기능을 없애버리고 감금만을 남겨두었다는 점에서 지하감옥의 원리가 전도되어있다. 충분한 빛과 감시자의 시선이, 결국 보호의 구실을 하던 어둠의 상태보다 훨씬 수월하게 상대를 포착할 수 있다. 가시성의 상태가 바로 함정인 것이다. 즉 보여지긴 해도 볼 수는 없으며 정보의 대상이 되긴 해도, 정보 소통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295).
‘일망 감시장치’는 ‘봄-보임’의 결합을 분리시키는 장치이다(297). 이것은 권력을 자동적인 것이며, 또한 비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중요한 장치이다. 그 권력의 근원은 어떤 인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표면, 빛, 시선 등의 신중한 구분 속에, 그리고 내적인 메커니즘이 만들어내는 관계 속에, 개개인들이 포착되는 그러한 장치 속에 존재한다(298).
권력의 효과와 강제력은 권력의 적용면, 즉 가시성의 영역에 예속되어 있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스스로 권력의 강제력을 떠맡아서 자발적으로 내면화한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외부의 권력은 물리적인 무게를 경감할 수 있게 되고 점차 무형적인 것으로 된다. 권력이 한계지점에 가까워질수록 그 효과는 더 지속적이고 심원해지며, 단 한번에 획득되고, 끊임없이 갱신될 수 있다(299).
일망 감시시설은 일종의 몽상적인 건물이 아니라 모든 특별한 용도로부터 분리시켜 가동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하는 정치 기술의 형태인 것이다. 또한 공간 속의 신체배치, 개개인 상호간의 비교분배, 위계 질서적인 조직구성, 권력의 중심부와 전달부분의 배열, 그리고 권력의 도구와 관여 방식의 규정 등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이러한 형태들은 병원(병자, 광인)이나 작업장(노동자, 걸인, 태만한 자), 학교(학생), 그리고 감옥(죄수)에서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임무나 행위를 부과해야 할 많은 개인들을 상대하게 될 때, 이러한 일망 감시의 도식이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물론 필요에 따라 변형될 수 있긴 하겠지만-“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공간의 한계 안에서 일정한 수의 인간을 감시해야하는 모든 시설에”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303). 이러한 도식을 통하여 권력의 행사는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도식은 권력 행사대상의 수를 증가시킬 수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측의 수는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303-4).
요컨대 그 도식은, 권력에 의해서 가동되는 여러 기능에 대해서 엄격한 구속이나 부담되는 짐처럼 외부로부터 추가된 것으로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게 하지 않고, 권력이 그러한 기능들 속에 극히 교묘하게 스며들면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그 기능의 효과를 증대시키도록 한다. 일망 감시의 장치는 단순히 권력 메커니즘과 기능 사이의 접합점이나 교차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304). 그것은 어떤 기능 속에서 권력의 여러 관계를 적용시키고, 또한 그들 권력의 관계에 의해서 어떤 기능을 작용시키는 방법이다(304-5)
더욱이 이 기계 장치의 설비는 그 자체로 폐쇄되어 있더라도 외부의 요소가 항상 개입할 수 있도록 조립되기 때문에 일망 감시장치에 의한 권력의 강화는, 폭정의 상태로 변질 될 위험이 없다(305).
일망 감시는 사회 전체로 확대되는 역할을 수행하며(306), 일망감시방식의 영역은 사회의 하층지대, 신체의 세부나 그 다양한 움직임, 이질적인 힘과 신체의 공간적 관련을 포함한 ‘규율 없는 신체’이다(306-7). 즉,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권력의 물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권력은 자신의 최대한의 강력한 힘을 왕 자신으로부터 얻는 것이 전혀 아니라 이러한 여러 관계에 의해 개인화되는 신체 속에서 얻는 것이다(307).
벤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규율을 사회 저변으로 확산시키는 것에 있다. 벤담은 이러한 규율을, 결함이나 중단 없이 사회를 관통하면서 도처에서 항상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여러 장치의 그물망으로 만들기를 꿈꾼 것이다(307). 그러므로 규율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는데, 1)부정적인 기능으로 치우친 폐쇄적 기구로서의 봉쇄적 규율과 2) 권력행사를 보다 신속, 경쾌, 효율적으로 만들어 미래 사회를 위한 교묘한 강제권의 구상인 일망 감시방식을 포함한 메커니즘으로서의 규율이 그것이다(308).
이러한 움직임은 17-8세기 걸친 규율 장치의 점진적인 확장과, 사회 전체를 통한 그 장치의 다양화, 그리고 개괄적으로 규율중심적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형성 등 역사적 변화에 근거한 것이다(308).
(1) 규율의 기능적인 전환(The functional inversion of the disciplines)
규율의 기능은 처음엔 사회위험요소의 제거, 불편함의 방지를 위한 것이었는데(308-9) 개개인의 효용가능성을 증가시키는 적극적인 역할로 변모하였다(309).
(2) 규율중심적 구조의 확산(The swarming of disciplinary mechanisms)
결국 18세기를 통하여, 규율 기관의 수효가 증가하고 다양해지는 반면, 그 구조는 ‘비제도화하여’ 그간의 폐쇄적 규율은 해체되고 유연한 통제방식으로 전환되어 확산되었다(310). 게다가 규율의 방법들은 폐쇄적인 기관에서가 아니라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여러 통제시설들을 근거로 삼아 확산되었다(311).
(3) 규율의 메커니즘에 대한 국가관리(The state-control of the mechanisms of discipline)
18세기의 경찰기구 조직은 국가 규모에 달하는 규율의 일반화를 뒷받침하였다. 이는 그 조직이 사법제도보다 규모와 메커니즘에서 규율형태의 사회와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규율의 기능이 국가기구에 귀속되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은데 규율은 어떤 제도나 기구와 동일시 될 수 없기 때문이다(315).
규율중심적 사회의 형성은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광범위한 몇 가지 역사과정, 즉 경제적이고, 법률-정치적이며 과학적인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318).
(1) 엄청난 인구증가와 생산기구증대의 필요성(319),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력의 비경제성은 규율 중심적 사회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320). (2) 원칙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권리체계를 보증했던 일반적인 법률 형태는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물리적인 메커니즘에 의해서, 그리고 규율로 형성된 본질적으로 불평등주의적이고 불균형적인 권력의 모든 체계에 의해서, 그 바탕이 만들어졌다(323). (3) 일망감시 방식들이 일반화되면서 지식의 형성과 권력의 증대가 강화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여 규율은 ‘기술적인’ 단계를 넘어선다. 이제 병원, 학교, 공장이 단순히 규율에 의해 ‘질서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권력의 모든 확대가 가능한 모든 지식을 만들어내는 기구가 되었다(325).
권력이 다르면 지식도 달라진다(327-8). 결국 규율의 기술은 그 원칙상 아직도 종교재판의 방식을 따르는 형사재판을 교묘하게, 그리고 아래쪽으로부터 침범해 들어갔다(328). 이제부터 형사재판에, 그 적용점이나 ‘유용한’ 대상으로서 부과되는 것은, 더 이상 국왕의 신체에 반항한 죄인의 신체도 아니고 이상적인 계약서의 법적 주체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규율 중심적 개인일 것이다(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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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감시와 처벌] 3부 2-3장에서 위계질서적인 감시, 규범화된 상벌제도, 그리고 시험이라는 교정 수단과 규율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일망 감시방법에 관한 논의를 통하여 사회전반에 규율 메커니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논의의 창조성은 ‘근대적 개인’이란 “규율․훈련이라고 명명되는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의해서 제조(p.288)”된다고 규정한 대목에서 잘 관찰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권력을 법적/제도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발휘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권력을 외재하는 그 무엇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객체의 영역과 진실에 관한 의식을 생산하는 생산적 권력(p.288)”으로 바라봄으로써 권력개념에 관한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해주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생산적 권력의 정점인 육체에 관한 푸코의 논의는 훈련, 감시, 관찰, 기록, 평가에 의한 육체에의 각인이 어떻게 일 개인을 근대 자본주의에 순종적인 ‘자동적인 복종기계’로 제조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p.55, pp.261-265).
이러한 푸코의 논의에 대하여 특히 권력개념을 중심으로 많은 비판이 전개되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그가 근대의 틈새를 보려고 한 노력이 사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Ⅰ. 간단한 혹은 번역/글의 이해에 관한 질문1)
1) "correct" 번역의 문제 (p.255)
2장의 제목은 “the means of correct training2)”이다. 오생근은 이를 “효과적인 훈육방법”으로, 박홍규는 “교정 훈련의 수단”으로 번역했다. 또 2장의 첫 번째 문장은 “At the beginning of the seventeenth century, Walhausen spoke of 'strict disciplinary' as an art of correct training"이다. 오생근은 ”17세기 초엽에 발 하우젠(Walhausen)은 ‘올바른 훈육’의 기술로서 “엄격한 규율․훈련”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라고 박홍규는 ”17세기 초엽 바르하우젠 Walhausen은 <엄격한 감시>란 <교정 훈련>이라고 서술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correct라는 단어가 ‘효과적인’, ‘교정’, 그리고 ‘올바른’의 순으로 번역되고 있는 것인데(물론 특정단어가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구사되어야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며, 위의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효과적인’이라는 표현은 의미의 과잉을(물론 규율을 체화한 개인의 탄생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해 효과적일 수 있다), ‘올바른’이라는 표현은 당위의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교정(矯正)’이라고 표현한 박홍규의 번역이 어감상 조금 더 정확할 것 같다.
2) "relay" / 원형, 피라미드형의 비교 (p.261)
2-1) 원문의 "But, the disciplinary gaze did, in fact, need relays."를 오생근은 “그러나 규율중심적 시선은 사실상 매개항이 필요했다.”로, 박홍규는 “그러나 실제로 감시적인 시선은 몇 가지의 중계를 필요로 했다”로 번역하고 있다. ‘매개항’이든 ‘중계’든 단어의 의미가 잘 와 닿지 않으며 또한 다음 문장과의 어떤 관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2-2) 그 다음 문장의 영문은 다음과 같다.
But, the disciplinary gaze did, in fact, need relays. The pyramid was able to fulfil, more efficiently than the circle, two requirements: to be complete enough to form an uninterrupted network- consequently the possibility of multiplying its levels, and of distributing them over the entire surface to be supervised; and yet to be discreet enough not to weigh down with an inert mass on the activity to be disciplined, and not to act as a brake or an obstacle to it; to be integrated into the disciplinary mechanism as a function that increases its possible effects. It had to be broken down into smaller elements, but in order to increase its productive function: specify the surveillance and make it functional.
오생근 : 그러나 규율중심적 시선은 사실상 매개항이 필요했다. 원형보다는 피라미드형이 다음의 두 가지 요청에 더 잘 부합할 수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빈틈없는 조직망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해야 한다. 따라서, 그 단계를 다양화하여 통제해야 할 모든 영역에 그것을 배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규율의 행위에 대해 타성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또한 그 행위에 대해 구속이나 장애가 되지 않도록 신중히 하고 가능한 한 최선의 효과를 증대시키는 기능이 되기 위해 규율의 장치와 빈틈없이 일치되도록 한다. 피라미드형은 생산적 기능을 높이기 위해 여러 단계적 절차를 나누어야 한다. 즉, 감시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것을 기능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박홍규 : 그러나 실제로 감시적인 시선은 몇 가지의 중계를 필요로 했다. 원형보다도 피라밑 형태의 쪽이 두 가지의 요청에 응할 수 있었다. 곧 피라밑 형태는 일면에서는 충분히 완성되었으므로 연속적인 네트웍을 형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몇 가지 단계를 다양하게 형성했고 규제해야 할 모든 표면에 그것을 배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그리고 한편으로 충분히 비밀이 지켜지므로 감시를 해야 할 활동을 타성적인 무게로 압박하는 경우는 없고, 또 그 활동에 대하여 구속이나 장해가되는 경우도 없이, 생겨나는 효과를 증대시키는 하나의 기능으로서 감시의 기구에 통합되었다. 피라밑 형태는 그 여러 가지의 요소로 그러한 스스로의 생산적 기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분해하여야 한다. 곧 감시를 종별화하고 기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원형과 피라미드형을 비교하기 위하여 피라미드형이 가지고 있던, 그러니까 과거상황에서는 적합했었을 장점 내지는 특징을 설명하는 듯 한데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3) 르두(Ledoux)의 아르케 스낭(Arc-et-Senans) (p.260-1)
르두의 아르케 스낭이라는 건축물을 묘사한 부분은 오생근 번역에 따르자면 “ 즉, 모두 안쪽을 향한 채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건물들 중심을 향한 채 있는 높은 건물은...”라고 되어 있는데 영역본에는 “all the building were to be arranged in a circle, opening on the inside, at the centre of which a high construction..."되어있다.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것 같다.
4) 정치적인 유토피아? (p.261) / 허구적인 문학 (p.292)
18세기 후반에 이러한 건축물이 위세를 떨쳤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어떤 정치적인 유토피아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261).
과거에 페스트를 둘러싼 축제의 내용을 다룬 허구적인 문학이 있었다(p.292).
4-1) 첫째 인용문은 무엇을 겨냥한 기술인 것인가?
4-2) 둘째 인용문은 어떤 특정한 사실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문장이후에 묘사된 페스트를 둘러싼 축제에 대한 단지 비유적인 표현인 것인지? 만약 전자라면 질문이 쉽게 해소되겠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왜 “허구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는지?
5) 막(莫), 다발, 비율? (p.267)
감시의 여러 기술에 의해서 권력의 ‘물리학’, 그리고 신체에 대한 지배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과격한 행위, 힘이나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광학과 역학의 모든 법칙, 그리고 공간, 선, 막(莫), 다발, 비율 등의 모든 작용에 의거하여 이루어진다(p.267).
5-1) 막(莫)의 한자가 幕으로 바뀌어야하는 것은 아닌지?(영역본에는 screens이다.)
5-2) “다발”과 “비율”은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데 영역본에 의하면 beams와 degrees로 되어 있다.
6) “in truth"의 번역 (p.272)
규율은 정확하게 행위에 제재를 가함으로써 개개인을 ‘사실 그대로’ 평가하며, 그것으로 실행되는 형벌 제도는 개개인에 관한 인식의 틀 속에 통합된다(p.272).
이 기술에 의한다면 규율은 행위에 제재를 가함으로써 개개인을 ‘있는 그대로’ 평가한다는 의미인데, 영역본에 의하면 "By assessing acts with precision, discipline judges individuals 'in truth' "이다. 그렇다면 문맥상의 이유와 더불어 'in truth'의 사전적 의미가 “정말로, 실제로, 사실은”이므로 “규율은 정확하게 행위에 제재를 가함으로써 ‘실제로는’ 개인을 평가한다”로 번역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참고로 박홍규는 ‘실제로는’으로 번역하고 있다.)
7) 번역 문제? (p.278)
시험이란 것은 어떤 지식 습득을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평가의 기본적인 요소 일뿐이며, 암암리에 그 과정에 따르는 권력분 의식에 의존하여 평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p.278).
The examination did not simply mark the end of an apprenticeship; it was one of its permanent factors; it was woven into it through a constantly repeated ritual of power.
강조한 부분의 독해가 잘 되지 않는데 “시험(역시)은 변함없이 반복되는 권력 의식(형식?)에 의해 의도된 것이다.”라는 의미인가?
8) 일망감시의 전체화 기능? (p.306-307)
일망 감시의 도식은 지워지거나 혹은 그 특징 중 어느 것도 잃지 않은 채, 사회 전체로 확산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것의 임무는 바로 전체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일이다(p.306).
The panoptic schema, without disappearing as such or losing any of its properties, was destined to spread through the social body; its vocation was to become a generalized function.
전체화보다는 일반화라는 번역이 좋지 않을까 싶다. 또한 일망 감시가 사회저변으로 확대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논하는 이번 단락의 말미에 가서 “일망 감시의 구성은 이러한 일반화의 형식을 부여한다.(The panoptic arrangement provides the formula for this generalization)"고 번역하고 있으므로 1) 어감상 그리고 2) 일관성 유지를 위하여 ‘전체화’ 보다는 ‘일반화’가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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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더 생각해 볼 문제
1) 감옥은 왜 실패했는가?
푸코의 일망감시에 대한 일련의 논의는 현상분석의 탁월함과 동시에 일종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권력의 효과와 강제력은 말하자면 다른 쪽으로-권력의 적용면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즉 가시성의 영역에 예속되어 있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스스로 권력의 강제력을 떠맡아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작용시키도록 한다. 그는 권력관계를 내면화하여 일인이역을 하는 셈이다. 그는 스스로 예속화의 원칙이 된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외부의 권력은 물리적인 무게를 경감할 수 있게 되고 점차 무형적인 것으로 된다. 권력이 한계지점에 가까워질수록 그 효과는 더 지속적이고 심원해지며, 단 한번에 획득되고, 끊임없이 갱신될 수 있다. 즉 모든 물리적인 충돌을 피하고, 늘 앞에서 결정되는 영원한 승리인 것이다(p.299).
즉 이와 같이 전일적이고, 전면적이고, 중층 혹은 다층으로 일 개인을 섭렵해오는 권력의 촘촘한 그물망이 과연 푸코가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기술한 "과거에 과도한 행사를 통하여 스스로의 초월적인 위력을 뽐내는 의기양양한 권력(p.256)"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이는 기술상의 과도 표현일 뿐인가? 물론 이 질문은 푸코의 작업, 그러니까 근대에 와서 세련화되고 전문화되어, 그래서 은밀해진 권력분석을 전무로 돌리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과연 이와 같은, 결국 숨쉴 수조차 없는 진공의 공간을 어떻게 환기시킬 것이냐를 묻는 것이다. 분석의 날카로움이 역진할 때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것인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질문하고 싶다. 아직 진행되지 않은 4부 「감옥」의 내용은 결국 감옥의 실패로 귀결되고 있다. 즉 “범죄 환경-범죄의 온존, 재범 유발, 일시적 위반자의 상습적 범죄자로의 변모, 폐쇄된 범죄 사회의 조직화 등”이 조성되어(p.394) 결국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생기는(p.398)” 궁극적으로 감옥이 실패하였다는 내용이다. 도대체 그렇게 적용면에서는 유연하고, 해소면에서는 강고한 그런 절대절명의 규율권력은 어떻게 감옥의 실패를 목도했던 것일까?
2) 푸코에 대한 지배적인 비판 - 규범적 권력관의 부재
푸코의 권력관에 대한 지배적인 비판은 푸코의 권력관에는 규범적 권력관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곧, 푸코에게 있어서 권력은 힘이나 세력이 아니라 힘의 관계, 세력의 관계로 이해되기 때문에 두 사람 이상의 합의와 동의, 의사소통을 통해 만들어진 연대성에 기초하여 발생하는 규범적 권력관이 설 자리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사실 규범적 권력관에 대한 정확한 숙지가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한계를 가진 질문이겠지만 푸코는 그와 같은 비판에 대하여 1) “그것은 ‘권력은 힘이나 세력이다’라고 전제할 때 가능한 질문이다”라거나 2) “근대의 틈새를 보고자하는 자신의 작업과 그와 같은 규범성 논의는 다소 무관하다”라고 답변할 것 같은데 이에 관한 논의를 해봤으면 한다.
동서양정치사상세미나발제문(2003/02/25) 발제자: 황윤정
제4부 제1장: 완전하고 준엄한 제도 (pp333~371)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
(미셸 푸코 저. 오생근 역. 2000. 나남출판)
Ⅰ내용 정리
* 감옥의 역사
감옥은 나폴레옹 법전 이전 시기에 생겨났다. 감옥 형태는 형법에서 체계적으로 활용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개인들의 신체에 대한 어김없는 작업을 통해, 그들을 순종하는 유용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일반적 형태가 감옥 제도의 윤곽을 드러냈는데, 이것은 법이 감옥 제도를 전형적인 형벌로 규정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감금 중심의 형법제도로의 이행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새로운 사태이기는 했으나, 이는 출발점이 아니라, 전환이 최초로 뚜렷해진 시점이 되는 것이다. 일련의 처벌 장치에서 본질적인 구성요소인 감옥은 분명히 형사 사법의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하나의 계기, 곧 ‘인류’에의 접근을 확실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계급 권력이 발전시키고 있던 그 규율 기제들의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 이를테면 그것들이 사법제도를 식민지처럼 지배하게 된 계기를 나타낸다. 감금을 전형적인 형벌로 만듦으로써, 그 새로운 법제는 권력의 특징적인 지배방식을 끌어들인다. 자칭 ‘평등한’ 재판, 스스로 ‘자율적’이기를 바라지만 규율에 따른 여러 가지 예속 양태들의 불균형에 의해 둘러싸이는 사법 장치- 이러한 것이 ‘문명화한 사회의 형벌’인 감옥의 탄생과 겹치는 접점이다.
* 감옥-형벌의 ‘명백한 논리성’
감옥-형벌이 매우 일찍부터 지녀온 명백한 논리(l'evidence)의 성격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18세기의 개혁자들이 상정한 다른 모든 처벌을 망각 속에 내던졌을 정도로 사회의 기능 자체와 밀접하게, 그리고 깊이 결부되어 나타났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고 역사의 흐름 자체에 의해 초래된 것처럼 보였다. 감옥은 고약한 해결책이어서,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감옥의 ‘명백한 논리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유의 박탈’이라는 단순한 형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유의 상실은 모든 이에게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벌금보다 더 나은 ‘평등주의적’ 징벌이다. 이를테면 법률적 명확성이다. 시간의 변수에 따라 형벌을 정확하게 수량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범죄-형기 사이의 수량적 등가관계를 확립하는 형벌제도의 경제적․도덕적 논리성이라 할 만하다.
감옥의 명백한 논리성은 개인들을 변모시키는 도구로서의 역할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술적-규율적인 이러한 이중의 토대에 힘입어, 감옥은 모든 형태들 가운데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문명화한 형태로서 나타났다. 감옥이 먼저 교정이라는 기술적 기능이 나중에 추가된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정이라는 보조적인 역할을 떠맡는 ‘법률상의 구금’ 또는 자유의 박탈로 인하여 법률 체계 안에서 기능할 수 있는 개인들의 변화를 위한 기획이었다.
* 감옥의 개혁
감옥을 개혁하여 그 기능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은 뒤늦게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는 것도 돌이켜보아야 한다. 감옥의 ‘개혁’은 감옥 자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된다.
감옥의 기능을 통제하고 감옥의 개선책을 제안하기 위한 단체들이 있었다. 그러나, 감옥을 개혁 운동에 의해 때때로 흔들렸을 무력한 제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감옥 이론’은 감옥에 대한 우발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단한 감옥 사용법-감옥의 기능 조건들 가운데 하나-이었다. 법률상의 처벌이 됨으로써, 감옥은 개인의 교정 기술체계를 둘러싼 모든 문제와 온갖 소란으로 처벌권이라는 오래된 법적-정치적 쟁점을 가득 채워왔다.
*감옥-‘완전하고 준엄한 제도’
발따르는 감옥은 ‘완전하고 준엄한 제도’라고 말했다. 감옥은 철저한 규율과 징계의 도구여야 한다. 감옥은 어느 정도의 전문화를 예외 없이 함축하는 학교, 공장, 또는 군대보다 훨씬 더 ‘범규율적’ (omni-disciplinaire)이다. 또한 감옥은 끊임없는 규율이다. 마지막으로 감옥은 수감자에 대해 거의 전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억압과 형벌의 내적 구조를 갖는다. 감옥은 다른 규율의 장치들에서 발견되는 모든 절차를 매우 강도가 높은 단계로 올려놓은 것이다. 완전한 ‘교정시설’은 자유의 순수한 법률적 박탈과 아주 다르고, 관념학의 시대에 개혁자들이 생각한 표상의 단순한 역학과도 전혀 다른 존재의 재기호 체계화를 규정한다.
1) 첫 번째 원칙은 격리이다. 외부의 세계, 범죄의 원인이 된 모든 것, 범죄를 용이하게 만든 공모관계로부터 수형자를 떼어놓는 격리, 수감자들 상호간의 격리이다. 형벌은 개별적이어야 할뿐만 아니라 개별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감옥은 그곳에 모여 있는 범죄자들로부터 연대성이 강한 동질적 집단이 형성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로 고립은 적극적인 교정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고립은 전적인 복종의 첫 번째 조건이다.
- 오번 (미국 뉴욕시의 중부에 있는 도시)의 모형은 야간의 개인별 독방, 공동으로 그러나 절대적 침묵의 규칙 아래 이루어지는 작업과 식사를 규정하며, 이에 따라 수감자들은 간수의 허락을 받아 낮은 목소리로 간수에게만 이야기할 수 있다. 오번식 제도의 옹호자들에 의하면 그것의 장점은 사회 자체의 복제라는 데 있다. 격리, 의사소통이 허용되지 않는 모임, 끊임없는 통제에 의해 보장되는 법의 이러한 작용은 범죄자에게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자격을 다시 부여하게 되어 있다.
- 필라델피아의 경우처럼 절대적인 격리상태에서, 범죄자에 대한 재결정은 공통적인 법의 행사를 통해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과 내면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조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인의 관계를 통해 요구된다. 양심의 작용자체가 수감자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피상적인 훈련보다는 오히려 마음속에서의 복종이고, 태도가 아니라 ‘도덕성’의 변화인 것이다. 노동은 의무라기 보다는 위안이고, 감시자들은 사물의 물질성에 의해 보장되는 속박을 행사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그들의 권위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 생겨난다. 오번 감옥은 본질적인 활력을 되찾은 사회 자체였고, 체리 힐 감옥은 소멸되었다가 다시 시작되는 삶이었다.
감금 활동의 그 일차적 목적은 권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았거나 위계질서에 따라 조정될 수 없는 모든 관계의 단절을 통한 강제적인 개인화였다.
2) 격리와 더불어, 노동은 감옥의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으로 규정된다. 노동은 구금체제의 부가물도 완화제도 아니다. 강제 노동, 징역, 금고 가운데 어느 것에 관련되든, 입법자 자신에 의해 노동은 필연적으로 구금체제에 수반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형벌상의 노동이 본질적으로 유용한 것은 생산활동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육체적․정신적 구조에 대해 발휘하는 효과에 의해서이다. 그것은 난폭하고 사납고 지각없는 수감자를 완벽하게 규칙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수감자를 완벽하게 규칙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변모시키는 기계장치 자체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 감옥은 형벌의 경중에 대한 조정의 수단, 다시 말해서 그것이 떠맡는 판결의 시행을 통해 적어도 부분적으로 판결의 원칙을 수정할 권리를 지닐 수 있을 만큼 도구화하는 경향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권리가 매우 일찍부터 형벌 행정의 책임자들에 의해 올바른 감옥 운용의 조건, 그리고 재판 자제가 감옥에 위임하게 하는 그 개심의 책무에 대해 감옥이 갖는 유효성의 조건 자체로서 요구되어 왔다는 점이다.
형기는 범죄의 ‘교환가치’를 측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역중인 수감자의 ‘유익한’ 변모에 적합해야 한다. 척도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목표가 정해진 시간이다. 대가의 형식이라기보다는 운용의 형식이다.
구속의 질과 내용도 범행의 성질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형벌의 관리․질․엄격성은 처벌의 효과를 낳는 도구 자체의 내부에서 그 효과를 통제하는 자율적 기제에 속해야 한다. 그리고 형벌이 전개됨에 따라 그것을 수정하는 그 모든 절차들로 말하자면, 사법상의 심급이 그것들에 대해 직접적인 권한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법률적 구속에 비추어서 감금의 즉 ‘사법적인 것’에 비하여 ‘감금적인 것’의 과잉 또는 일련의 과잉에 관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잉은 현실적인 실천의 형태로건 기획의 형태로건 매우 일찍이 감옥의 탄생때부터 확인된다.
* 감옥- 관찰의 장소, ‘일망감시 시설’
형벌 시행의 장소인 감옥은 동시에 처벌받은 개인들에 대한 관찰의 장소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말할 것도 없이 우선 감시이다. 감옥은 수형자들에 관한 임상적 지식이 형성되는 장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죄수들이 끊임없는 주시아래 놓일 수 있어야 하고, 그들에 관해 행할 수 있는 모든 평가 결과들이 기록되고 계수화되어야 한다. 일망감시 시설의 주제-감시와 동시에 관찰, 안정성과 동시에 지식, 개별화와 동시에 전체화, 고립화와 동시에 투명성-가 감옥에서 실현될 수 있는 특권적 장소를 찾은 것이다. 벤담의 공상이 단번에 구체적인 형태를 띨 수 있었던 것은 행형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이다. 행형상의 일망감시 장치는 개인별로 계속될 수 있는 기록작성의 체계이다.
* 감옥-지식의 형성 장소
감옥을 행형상의 실무에 대한 조정 원리로서 기능해야 하는 지식의 형성 장소로 만드는 것이 문제된다. 감옥은 재판관의 결정을 정확하게 알고 기존의 규칙에 따라 그것을 적용해야 할뿐만 아니라, 형법상의 조치를 행형상의 조작으로 변화시킨 지식, 그리고 범죄로 인하여 당연히 부과된 형벌은 사회에 유익한 수감자의 변화로 이끄는 지식을 수감자로부터 영속적으로 추출해야 한다. 감금체제의 자율성과 그것으로 가능해지는 지식은 법전에 의해 처벌 중심의 철학에서 원리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형벌의 효용을 증가시키게 해준다. 행형상의 실천, 교묘한 기술체계는 형벌체계와 많은 비용이 드는 감옥의 건설에 투자된 자본의 수익성을 높인다. 그것과 관련하여 범죄자는 앎의 대상인 개인이 된다. 범법자가 가능한 앎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수형자로서, 그리고 처벌의 메커니즘에 따른 적용점으로서이다.
* 범죄자
행형 장치는 기묘한 대체를 실행한다. 선고받은 법률 위반자를 대신하여 행형 장치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란 바로 ‘범죄자’이다. 범죄자는 그를 특징짓는 올바른 판단근거가 그의 행위라기보다는 그의 생활태도라는 사실에 의해 범법자와 구별된다. 법률상의 징벌이 행위를 대상으로 하는 반면에, 처벌의 기술은 생활태도를 대상으로 하며, 그러한 기술은 결국 지식의 틀 안에서 최하의 것과 최악의 것을 재구성해야 하고, 구속력이 따르는 행위를 통해 효과를 바꾸어보거나 결함을 보충해야 한다.
형법 제도의 역사에서 ‘전기적인 요소’의 도입은 중요하다. 그것으로 인하여 범죄 이전에,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 범죄와는 별도로 ‘범죄인’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벌의 실무에서 범죄자의 전기가 정상 분석에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됨에 따라, 범죄의 경중을 평가하는 것이 문제일 때, 보다시피 형법상의 담론과 정신의학적 담론 사이의 경계가 뒤섞인다. 또한 양자의 접합점이 되는 그 지점에서 완전히 전기의 차원을 바탕으로 인과관계의 연결성을 확립하고 처벌-교정의 평결을 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위험인물’이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범죄자는 또한 그가 범행의 당사자일 뿐만 아니라 복잡한 맥락들에서 단순한 범법자와 구별된다. 행형 기술의 대상은 당사자의 주변관계가 아니라 범죄자와 그의 범죄 사이의 관련성이다.
* 수형자의 분류
페뤼스에 힘입어, 역사상 최초로 범죄에 관한 오래된 ‘민족지’가 범죄자들의 체계적 유형학으로 전환된다. 예컨대 세 가지 유형의 수형자가 있는데, 첫 번째는 중간 정도의 지능보다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선천적으로든 사고방식 등에 의해서든 악질적인 수형자들이다. 그들에게는 계속되는 격리가 요구된다. 두 번째 범주는 불명예나 선행에 대한 무관심이나, 악한 행동에 대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이들인데, 그들에게는 상호 교육적인 방법이 적합하다. 마지막으로, ‘바보스럽거나 무능력한’ 수형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결국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악에 이끌리게 된다. 그들의 경우, 공동으로 그러나 소집단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생활해야 하고, 언제나 집단적 활동에 의해 자극받아야 하며, 엄격한 감시 아래 놓여야 한다. 페뤼스는 범죄자들이 광인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새로운 지식에서는 범죄로서의 행위와 특히 비행자로서의 개인을 ‘학문적으로’ 규정짓는 것이 문제된다. 범죄학의 존립 가능성이 주어진 것이다.
형사 사법의 상관적 존재는 법률 위반자이겠지만, 징계기관의 상관적 존재는 다른 인물, 즉 전기적인 서술의 단위이고 ‘위험성’을 지닌 핵심 분자이며 어떤 비정상의 유형을 대표하는 범죄자이다. 감옥이 범죄자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감옥이 법과 위반, 재판관과 범법자, 수형자와 형벌 집행자 사이의 상호작용 안에서 그것들을 서로 결부시키고, 150년 전부터 그것들을 다같이 동일한 올가미로 붙잡아두는 범죄성이라는 비신체적 내용을 이끌어들였다는 점에서이다.
* 사법 당국과 감옥의 관계
행형 기술과 범죄자는 이를테면 쌍둥이 형제이다. 형집행 방법의 내적 제안과 그 객관적 실재는 다같이, 한쪽이 다른 한쪽의 연장인 관계를 맺는 상태에서 스스로 자체의 수단을 대상에 적용시키고, 동시에 그러한 대상을 형성하고 뚜렷하게 드러내는 기술체계의 총체로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제 평온한 법원과 법의 위엄에 붙어 다니게 되는 것은 사법 장치의 하층토양에서, 다시 말해서 사직당국으로부터 유죄선고를 받는 이들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낀 사직당국이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 그 ‘비천한 일’의 수준에서 형성되는 범죄, 바로 그것이다. 범죄는 재판에 대한 감옥의 복수이다.
* 감옥의 유효성
범죄자라는 개념을 이용하면, 18세기에 개혁자들이 확정한 형사 사법이 범죄자의 가능한 두 가지 객체화의 방향-하나는 사회계약 밖으로 벗어나는 도덕적 또는 정치적 ‘괴물들’의 계열이었고 다른 하나는 처벌에 의해 다시 자격을 부여받는 법적 주체의 계열-을 적절하게 일치될 수 있다. 감옥은 범죄라는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여러 과학들’에 의해 정당성이 입증된 통일적인 대상 영역을 형법에 마련했으며, 감옥으로 인하여 형법은 ‘진실’의 일반적 지평 위에서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감옥, 사법 기구 안에서 가장 어두운 그 세계는 더 이상 감히 드러내놓고 행사될 수 없는 처벌의 권력이 객관성의 영역을 은밀하게 조직하는 장소이다. 사법은 감옥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Ⅱ. 문제제기
1. 해석이 매끄럽지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 or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 감금을 전형적인 형벌로 만듦으로써, 그 새로운 법제는 권력의 특징적인 지배방식을 끌어들인다. 자칭 ‘평등한’ 재판, 스스로 ‘자율적’이기를 바라지만 규율에 따른 여러 가지 예속 양태들의 불균형에 의해 둘러싸이는 사법 장치-이러한 것이 ‘문명화한 사회의 형벌’인 감옥의 탄생과 겹치는 접점이다. (p334)
- 애초부터 감옥은 표면적으로는 감옥을 개조하게 되어 있으나 감옥 기능 자체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 같은 일련의 부속적인 메커니즘 안으로 끼워 넣어졌는데, 그런 만큼 그러한 메커니즘은 감옥의 모든 역사에서 감옥의 존재와 결부되었다.(pp337~338)
- 형벌이 전개됨에 따라 그것을 수정하는 그 모든 절차들로 말하자면, 사법상의 심급이 그것들에 대해 직접적인 권한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p354)
2. 토론해 볼 문제
1) "투옥을 현재의 형법구조의 기반과 그것의 거의 전적인 체계로 만든 것은 우연도, 입법자의 변덕도 아니다. 그렇게 한 것은 사물에 대한 관념의 진보이며 풍속의 개선이다.“ (p334) 감옥의 발전이 사물에 대한 관념의 진보인가? (푸코는 이에 대해 특별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2) 저자는 본 장을 통해서 감옥이 사법 기구가 담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맡고 있으며, 이 때문에 사법은 감옥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p371)고 말하고 있다. 이 주장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전제는 바로 사법 기구와 감옥이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사법 기구와 감옥이 독립적인 존재라면 각기 맡은 역할-사법 기구: 판결, 감옥: 처벌-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은혜를 베풀고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가?
3) (2번 문제와 연결하여) 감옥이 사법 기구가 하려고 하지 않았던 역할까지 떠맡음으로써 감옥이 사법에 혜택을 베풀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18세기 전후, 사법 기구와 형법의 마련은 감옥에게 정당성을 부여한 셈이 되지 않는가?
미셸 푸코. 오생근 역. 1996. 「제4부 감옥」. 감시와 처벌: 감옥의 역사. 나남.
제2장 위법행위와 범죄 ~ 제3장 감옥 체계
발제자: 정호영
제2장 위법행위와 범죄
1. 공개적인 체형으로부터 금고형으로의 이행의 징후: 죄수 호송차
법에 비추어 볼 때 감금은 그저 자유의 박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확실하게 만드는 투옥은 언제나 기술적인 계획을 내포해 왔다. 공개적인 체형으로부터 금고형으로의 이행은 하나의 처벌 기술에서 이에 못지 않게 교묘한 다른 기술로의 이행이다. 이를테면 기술상의 변동이다. 이 이행의 한 가지 징후이자 축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1837년에 도형수들의 쇠사슬을 대신하여 등장한 죄수 호송차이다(373).
19세기 초에 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행렬이 지녔던 것으로 생각되는 구경거리로서의 중요성은 아마 그것이 두 가지 징벌 양식을 결합시켜 하나로 나타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373-4). 말하자면 구금에 이르는 도정이 체형의 의례처럼 전개되었다(374). 수형자들의 야단법석은 호사스런 광경을 동반하는 사법적 의식과 상응했다(379). 그러한 난장판은 법정의 찬란함, 권력의 질서와 그것의 징표, 즐거움의 형식을 역전시킨 모양이었다. 어쨌든 정치적 소동의 어떤 요소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380).
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행렬이라는 거창한 광경은 공개 체형이라는 옛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으며, 그 당시 신문, 저급한 인쇄물, 엉터리 약장수, 거리의 극단들이 퍼뜨린 그 다양한 범죄 묘사와 상통했을 뿐만 아니라, 분노의 함성이 터져나왔다는 점에서 대결과 투쟁에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 광경은 대결과 투쟁에 일종의 상징적인 출구를 마련해 준다.
그런데 1837년 6월 쇠사슬 행렬 대신에 채택된 것은 한때 거론된 덮개 달린 단순한 수레가 아니라, 매우 면밀하게 고안된 기계장치(죄수호송차)였다. 굴러가는 감옥으로 구상된 수레, 일망 감시 장치의 동적인 등가물(382). 이 기계장치에서는 편리함과 속도만이 고려되었을 것이지만, 그것의 장점은 사실 진정한 행형 본위의 호송차라는 점에 있다. 구경꾼들의 정신에 더 유익하고 더 영속적인 인상을 남기는 외적인 인상을 통해 그것은 매우 벤담적인 어떤 완벽성을 내보인다. 그것은 또한 내적인 효과도 발휘하는데, 며칠동안의 호송기간에 벌써(그동안 수감자들은 한순간도 자유롭게 되지 않는다) 교정 장치로서 기능한다(383).
내부가 한눈에 다 보이는 호송차의 이야기는 사소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행렬이 호송차로 대체된 방식과 그러한 대체의 이유들에는, 형법상의 구금이 체형의 뒤를 이어 개인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심사숙고 끝에 고안된 기술로 자리잡은, 80년에 걸친 모든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 독방들로 나뉘어진 호송차는 하나의 교정 장치이다. 신체형을 대신한 것은 집단적인 감금이 아니라, 면밀하게 조합된 규율의 장치이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2. 감옥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처방
왜냐하면 감옥의 현실과 명백한 결과들 탓으로 감옥이 지체없이 형사법의 대실패작으로 비난되었기 때문이다(384). 교정 기술에 관한 기획이 감금은 곧 형벌이라는 원칙을 따랐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감옥과 그것의 체계에 대한 비판이 매우 일찍, 다시 말해서 1820년부터 1845년에 걸쳐서 나타난 것이다.
감옥 덕분으로 범죄 발생률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감옥을 확장하고 늘리고 변화시킬 수 있다 해도, 범죄와 범죄자의 수는 일정하거나 더욱 나쁘게 증가한다(384). ① 감금은 재범을 유발한다(385). ② 감옥은 어김없이 비행자들을 만들어낸다(386). ③ 감옥은 비행자들이 서로 연대하여 계층질서를 이루고 미래의 모든 공모관계를 예비하는 비행자 사회의 조직을 가능하게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조장한다(387). ④ 석방된 수감자들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조건들로 인하여 그들은 운명적으로 재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주거제한의 위반, 일거리 찾기의 불가능성, 주거불명이 재범의 가장 흔한 요인들이다(388). ⑤ 끝으로 감옥은 수감자의 가족을 빈곤상태에 떨어뜨림으로써 간접적으로 비행자를 만들어낸다(389).
이처럼 한결같은 감옥 비판은 시종일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서 감옥이 교정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으며, 그곳에서의 행형 기술이 초보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정에 역점을 두면 감옥에서 징벌의 효력이 상실되고 진정한 행형 기술은 가혹한 행위이며 감옥은 이중의 경제적 오류-직접적으로는 그 기구의 내적인 경비 때문에, 간접적으로는 감옥에 의해서도 억제되지 않는 비행성에 기인하는 손실 비용 때문에-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이 여러 가지 비판에 대한 처방은 언제나 똑같았다. 말하자면 행형 기술의 변함없는 원칙들을 되풀이하는 데 그쳤다. 150년 전부터, 감옥은 언제나 감옥 자체의 구제책으로 제시되어 왔으며, 행형 기술들의 재활성화는 그것들의 빈번한 실패를 보상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교정 계획의 실현은 그 계획을 현실화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되어 왔다.
감옥의 기본 원칙, 곧 지난 150년 전부터 구성되어 온 훌륭한 ‘행형 조건’의 일곱 가지 보편적 준칙은 다음과 같다. (1) ‘교정의 원칙’ : 형벌로서의 감금은 개인의 행동 변화를 본질적인 기능으로 삼아야 한다. 자유를 박탈하는 형벌의 근본적인 목적은 수형자의 갱생과 사회복귀이다(390-1). (2) ‘분류의 원칙’ : 수감자들은 그들의 행위에 합당한 형벌의 경중에 따라, 또한 특히 그들의 나이, 기질, 그들에게 사용될 교정 기술, 그들의 변모 단계에 따라 격리되거나 적어도 분류되어야 한다. (3) ‘형벌 조절의 원칙’ : 구삼자들의 개성, 개선의 방향이든 재타락의 방향이든 얻어지는 결과에 따라 형벌의 형기가 조절될 수 있어야 한다. (4) ‘의무 겸 권리로서의 노동의 원칙’ : 노동은 수감자들의 변화와 점진적 사회화를 낳는 근본적인 부분들 가운데 하나여야 한다. (5) ‘행형상의 교육의 원칙’ : 공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수감자 교육은 사회의 이익에 꼭 필요한 예방조치임과 동시에 수감자에 대한 의무이다(391-2). (6) ‘구금에 대한 기술적 통제의 원칙’ : 감옥 관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개인들이 훌륭한 형성에 유의하는 정신적․기술적 역량을 지닌 전문요원에 의해 통제되고 또한 그런 사람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7) ‘부수적인 제도의 원칙’ : 과거의 수감자가 결정적으로 사회에 재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감금은 통제와 구제의 방책으로 이용되어야 한다(392).
3. 감옥의 실패와 성공
감옥, 그것의 ‘진퇴양난’, 그것의 다소간 올바르게 시행된 개혁을 시간상 연속적인 현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자유의 법적 박탈과 중복되어 이루어진 동시적 체계, 다시 말해서 감옥의 규율화된 ‘보충요소’, 곧 초권력적 요소-객관성․기술- 그리고 행성상의 ‘합리성’의 산출, 곧 부수적 지식의 요소-감옥에 의해 타파되어야 할 범죄성의 두드러짐은 아니더라도 그것의 실제적 갱신, 곧 전도된 효과의 요소-마지막으로 자체의 ‘이상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감옥의 규율적 기능과 동형인 ‘개혁’의 되풀이, 곧 공상적인 이중성의 요소를 포함하는 네 가지 항목의 체계를 생각해야 한다. ‘감금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담벼락, 근부자, 규칙, 폭력을 나름대로 갖춘 감옥 제도뿐만 아니라 그 복잡한 전체이다. 이른바 감옥의 ‘실패’는 따라서 감옥 운용의 일부분이지 않는가.
제도로서의 감옥이 그토록 오랫동안 거의 불변의 상태에서 존속하여 왔다면, 형벌적 감금의 원칙이 결코 진지하게 문제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감옥체계가 깊이 뿌리를 내렸고 분명한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법은 범법행위를 규정짓도록 되어 있는 것이고, 형벌 장치의 기능은 범법행위를 줄여나가는 데 있으며, 감옥은 그러한 제압장치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실패의 확실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393-4). 그러나 아마도 이 문제를 뒤집어 볼 때, 감옥의 실패는 무엇에 도움이 되는가, 감옥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고발하는 그 갖가지 현상들-범죄의 온존, 재범 유발, 일시적 위반자의 상습적 범죄자로의 변모, 폐쇄된 범죄 사회의 조직화-은 무엇에 유익한가를 자문해야 할 것이다. 수형자들에게 형을 치르게 한 뒤에도 일련의 모든 활동감시를 통해 계속해서 그들을 추적하며, 그럼으로써 위반자로서 복역을 끝마친 자를 ‘범죄자’로 간주하여 추적하는 형벌 제도의 명백한 파렴치한 모양 속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가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모순보다는 차라리 결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감옥과 틀림없이 일반적으로 징벌은 범법행위들을 억제하도록 예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구분짓고 배열하여 활용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법률을 위반할 염려가 있는 자들을 순종하게 만드는 것을 그다지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 그대신 일반적 예속화 전술에 맞게 범법행위를 정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형벌 제도는 단순히 여러 위법행위들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차별화하고’ 그것들의 일반적 ‘경제책’을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394-5). 그리고 계급의 사법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법 자체 또는 그것을 적용하는 방식이 어떤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형벌 제도를 매개로 한 차별적 위법행위 관리 전체가 그 지배 기제들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기도 하다. 법적 징벌은 위법 행위에 관한 전반적인 전략 안에 다시 위치시켜야 한다. 감옥의 ‘실패’는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이 점에 입각하여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형법 개혁의 일반적 도식은 18세기 말 위법행위에 대한 투쟁을 통해 윤곽이 정해졌다. 왜냐하면 구체제 아래에서 상이한 사회 계층들의 위법행위를 병렬적으로 유지시켰던 관용과 지원, 상호적 이해관계의 균형이 모조리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나 공적으로 징벌 위주의 사회라는 유토피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새로운 법전(19세기 초의 나폴레옹 법전)을 거슬러, 민중적인 새로운 위법행위의 위험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틀림없이 민중의 위법 행위들이 그 당시에 새로운 규모로, 이를테면 1780년대에서 1848년의 혁명까지 사회적 갈등, 정치 체제에 대한 항쟁, 산업화 동향에 대한 저항, 경제 위기의 영향을 교차시킨 모든 움직임에 함축된 규모로 전개되었다.
도식적으로 세 가지 특징적인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민중의 위법행위들이 정치적 차원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인데,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였다. 그때까지는 국지적이었고 말하자면 자체에 한정되었던 행위들이 대혁명 기간 동안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투쟁에 이를 수 있었으며, 그러한 투쟁의 목적은 단순히 권력을 양보하게 하거나 견딜 수 없는 조치를 철회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 자체와 정부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반면에 몇몇 정치 운동들은 명백히 위법행위의 기존 형태들에 근거를 두었다. 그리하여 위법행위의 이러한 정치적 차원은 19세기의 노동운동과 공화주의적 여러 당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정치적 혁명으로의 이행에 결부되면서 한층 더 복잡하고 동시에 더 뚜렷하게 될 것이다.
한편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서 법과 규칙을 제정하는 이들에 대한 거부의 투쟁이 쉽게 확인된다. 다시 말해서 법 자체와 법을 적용할 임무가 있는 사법에 대항하여, 새로운 권리를 행사하는 바로 곁의 지주에 대항하여, 자기들끼리는 서로 단결하면서도 노동자들의 연대는 금지시키는 사용자에 대항하여, 그리고 기계를 늘리고 임금을 낮추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고 공장의 규칙을 점점 더 엄격하게 만드는 기업가에 대항하여 투쟁을 벌인다(396). 일련의 모든 위법행위들은 법과 동시에 법을 강요하는 계급에 맞서 싸운다는 것으로 알려진 온갖 투쟁에 포함되는 것이다.
결국 18세기에는 범죄행위가 특정화된 형태들을 지향하고 교묘한 절도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지며 부분적으로는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주민 한가운데에서 고립된 주변부 사람들의 행위가 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18세기의 마지막 몇 년에 이르면 몇몇 유대관계의 재편성 또는 여러 가지 새로운 관계의 확립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법의 새로운 형태들, 규제의 엄격함, 국가․지주․사용자들의 요구, 그리고 더욱 치밀한 감시 기술들로 인하여 위법 사례가 급격히 늘어났고 다른 상황 아래에서라면 특수화된 범죄행위로 옮겨가지 않았을 많은 개인들이 법의 반대편에서 동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18세기에는 서로 분리되고 정리되는 경향을 띠었던 일련의 모든 위법적 관행들이 이제는 서로 재결합되어 새로운 위협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2세기에 걸친 기간에 민중의 위법행위들은 삼중으로 확산되는데, 그 세 가지는 일반적인 정치 지평 안으로의 편입, 사회적 투쟁으로의 명백한 연결, 여러 가지 형태와 수준의 법률위반들 사이의 연계문제와 관련된다(397).
상황이 이렇다면, 감옥은 분명히 ‘실패하고’ 있으면서도 자체의 목표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커녕 반대로 특별한 형태의 위법행위를 다른 것들 사이에 야기시켜 그것을 별도로 취급하고 뚜렷하게 드러내며, 비교적 폐쇄적이나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사회처럼 조직하는 데 따라 목표에 도달한다. 감옥은 두드러져서, 눈에 띄고, 일정한 수준으로 줄일 수 없으며, 슬그머니 유용성을 취하는 하나의 위법행위를 정립하는 데 이바지하며, 다른 모든 형태의 위법행위를 상징적으로 요약하면서도 사람들이 묵인하고 싶어하거나 묵인해야 하는 것들을 어둠 속에 내버려 두도록 해주는 어떤 형태의 위법행위를 뚜렷이 그려내서 별도로 취급하고 강조한다(399-400). 그러한 형태, 그것이 바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범죄이다. 범죄를 위법행위의 가장 격심하고 가장 해로운 형태, 다시 말해서 그것이 나타내는 위험 때문에 형벌 기구가 감옥을 통해 그야말로 줄이려고 애써야 하는 형태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위법행위들을 구별하고 정돈하며 통제할 수 있게 하는 형법체계(그리고 구금 중심의 형벌제도)의 결과이다. 확실히 범죄는 위법행위의 여러 형태들 가운데 하나이며 아무튼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것은 온통 가지를 친 ‘감금체계’가 둘러싸고 부각시키고 고립시키고 침투하고 조직하고 일정한 환경 안에 폐쇄시킨, 그리고 감금체계에 의해 다른 위법행위들에 대한 도구의 역할을 부여받은 위법행위이다. 요컨대, 적법성과 위법적 실행 사이에 법률적인 대립이 있다면, 위법행위와 범죄 사이에는 전략적인 대립이 있다.
4. 감옥과 범죄행위, 감시(경찰-감옥-범죄)
감옥은 범죄를 줄이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확인 대신에 다음의 가설을 내세워야 할지 모른다. 즉, 감옥은 위법행위가 명확히 한정된 유형이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덜 위험한-극단적인 경우에는 이용이 가능한-형태인 범죄를 낳는데, 표면적으로는 사회의 주변부에 놓여 있지만 통제의 중심적인 대상으로 취급되는 비행자들의 사회를 생기게 하며, 범죄자를 병리학에서의 피실험자로 만들어내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가설이다. 감옥의 성공, 이것은 법과 위법행위들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에서 ‘범죄’에 특수성을 부여한 점에 있다. 어떻게 감금체계가 법률 위반자를 범죄자로 대체했으며, 또한 모든 범위의 가능한 인식을 사법의 실제에 일일이 고정시켰는가 하는 문제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대상으로서의 범죄를 설정하는 그 과정은 위법행위들을 분리하고, 그것들로부터 비행을 떼어놓는 정치적 조각과 일체를 이룬다. 감옥은 이 두 가지 기제의 접합점으로서, 그것들로 하여금 서로를 보강하고, 범법 뒤에 놓여 있는 비행을 객관화하며, 위법행위의 움직임 안에 범죄를 고정시킬 수 있게 해준다. 감옥의 성공은 그토록 대단한 것이어서, 한 세기 반에 걸친 ‘실패’ 후에도 감옥은 언제나 존재하면서 동일한 효과를 낳고 있으며, 감옥의 폐지에 대해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걱정을 하는 실정이다(400).
감금 중심의 형벌 제도는 하나의 폐쇄이고, 분리된 유용한 위법행위를 만들어내는 것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형벌제도 자체의 영속성을 확고히 하려는 것일 수 있다. 범죄의 악순환은 결국 처벌은 가능하나 교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감옥의 부산물이라기보다, 위법행위들을 관리하기 위해, 감금이 주요한 부품들 가운데 하나를 형성했을 ‘처벌-재생산’의 메커니즘 안에서 몇 가지 위법행위들을 자본처럼 집어넣은 그러한 형벌 제도의 직접적인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감옥은 스스로 싸워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범죄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을까?
폐쇄적인 불법행위와 같은 범죄를 정리해 두는 일은 실제로 몇 가지 이점을 지니고 있다. ① 우선 그것을 단속하는 일이 가능하다. ② 둘째로, 자폐적인 성향의 범죄를 가장 덜 위험한 형태의 위법행위들 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③ 집중되고 통제받으며 무장해제된 위법행위는 직접적으로 유용하다. 다른 위법행위들에 비해서 그것은 고립되어 있고, 자체의 내적인 조직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흔히 가난한 계층들이 일차적인 희생물인 폭력 범죄행위에 빠지기 마련이고, 어디에서건 경찰의 포위망에 둘러싸이고, 오랜 감옥형과 그후의 결정적으로 ‘특정화된’ 생활, 즉 범죄에 노출되기 쉽다(401-2). ④ 위법 행위들이 폭넓고 명백한 형태들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를테면 대중이 다른 위법행위들과 구별됨으로써, 범죄는 그것들을 억누른다. ⑤ 그러나 범죄는 다른 영역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402-3). 말하자면 19세기에는 범죄의 체계화와 그러한 체계화가 함축하는 모든 감시활동을 통해 순종이 보장되는 일종의 종속된 위법행위는 그렇게 하여 정리된 것이다. 통제받는 위법행위, 곧 범죄는 지배 집단들의 위법행위를 위한 일종의 대행인자(代行因子)이다(403). 범죄는 여러 위법행위들을 관리하고 이용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⑥ 그것은 또한 권력의 행사 자체에 의해 권력 주변에서 초래되는 위법행위를 위한 도구이다. 이는 범죄자들의 정치적 활용(정보원, 밀고자, 선동자의 형태로)을 통해 이루어진다.
경찰력에 의한 통제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고립되고 폐쇄된 위법행위를 범죄의 이름으로 조직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찰에 의한 감시의 여러 대상들 가운데 하나인 범죄는 바로 그러한 감시의 특권적인 도구인 셈이다. 범죄는 비밀경찰을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경찰력 배치를 위한 지역분할을 정당화함으로써 주민에 대한 영속적인 감시의 수단, 다시 말해서 다름아닌 범죄자들을 통해 사회의 전영역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장치를 구성한다(405-6). 범죄는 정치적 관측소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시는 감옥과 짝을 이루어서만 기능할 수 있었다. 석방된 개인들에 대한 통제를 수월히 해주고, 밀고자들의 모집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리고 상호적인 밀고를 증가시키고 범법자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기 때문에, 감옥은 자폐적이나 통제하기는 쉬운 범죄자 사회의 조직화를 재촉한다. 그리고 감옥이 초래하는 모든 사회적 부적응의 효과(실업, 거주금지, 강제된 거주, 집행유예)로 인하여, 본래의 수감자들에게 임무를 할당하고 강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활짝 열린다. 감옥과 경찰은 쌍생아적인 장치를 형성하며, 위법행위의 모든 영역에서 범죄의 구별․고립․활용을 확고히 한다. 세 가지 항목(경찰-감옥-범죄)이 상호보완적이며 결코 중단되지 않는 회로를 형성하는 전체적 양상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경찰의 감시는 감옥에 법률 위반자들을 공급하고, 감옥은 그들을 범죄자, 다시 말해서 그들 가운데 일부를 정기적으로 다시 감옥에 집어넣는 경찰 단속의 대상이자 보조자로 변모시킨다.
경찰력에 의한 사법의 과잉, 사법에 대한 감금 제도의 타성적 태도-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권력의 경직화나 점차적인 이동이 초래하는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근대 사회에서 처벌의 메커니즘을 나타내는 구조적 특색이다. 형사 사법은 경찰과 비행을 서로 맞물리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어둠 속에 반쯤 잠겨 있는 통제 장치의 일상적 요청에 응하도록 되어 있다. 재판관들은 그 장치에 고용된 그다지 고집스럽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힘이 닿는 한도내에서 범죄의 형성을 도와주고, 말하자면, 위법행위들을 차별화하고, 지배 계급의 위법행위에 의해 상당수의 불법행위들을 식민지화하고 활용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러한 범죄의 창출과 형벌 기구에 의한 범죄의 투자는 결정적으로 획득된 구체적인 성과가 아니라 전혀 목적에 이르지 못하면서 이동하는 전술로 파악되어야 한다. 범죄와 다른 위법행위들 사이의 단절, 후자에 대한 전자의 반전, 지배적인 위법행위들에 대한 범죄의 식민지화- 이와 같은 현상은 경찰-감옥 체계가 기능하는 방식을 통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렇지만 이 결과들은 끊임없는 저항에 부딪혔으며, 투쟁을 야기했고, 반작용을 일으켰다. 이를 막기 위해 영속적인 갈등 상태를 목표로 한 온갖 교란전술들이 동원된 것이다(412). 이러한 일과 더불어 범죄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인식에 완전히 결정적인 틀을 부과하기 위한, 다시 말해서 범죄자를 대단히 가까운 곳에 있고 도처에 현존하며 도처에서 무서워해야 할 존재로 제시하기 위한 장기간의 기도가 이루어졌다. 그 일은 바로 언론의 일부분을 잠식하고 자체의 특유한 뉴스를 갖기 시작한 사회면 기사의 기능이다. 그것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범죄자가 나날의 친숙한 생활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완전한 별개의 세계에 속해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질성. 이것은 첫째, 최하층 사회에 해당되는 것이었고, 둘째, 광기의 그것이었으며, 셋째, 요란한 범죄, 즉 스케일이 큰 범죄의 이질성이었다(412-3).
5. 권력의 전술에 대한 반전술-‘반사회면 기사’
이 다양한 전술들은 여전히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 전술이 승리를 거두었거나 아무튼 범죄자들과 민중 사이의 전적인 단절을 확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1830-50년의 노동운동에서 범죄와 탄압이 중요한 쟁점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형사 사법을 문제시하고 그것이 범죄의 주위에 조심스럽게 그리는 경계를 다시 문제삼는 경우, ‘반(反)사회면 기사’라 부를 수 있는 것의 전술이 특유한 보기이다. 반 사회면 기사는 부르주아지 안에서의 범죄사살들을 조직적으로 부각시키고, 그 계급이야말로 ‘육체적 타락’과 ‘정신의 부패’에 빠진 계급이라는 것을 드러내며, 하층민이 저지른 범죄들에 관한 이야기 대신, 그들을 착취하며 엄밀한 의미로 그들을 굶주리게 하고 살해하는 자들이 그들을 내던지는 빈곤상태에 대한 서술을 내세울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에 대한 형사소송에서 얼마만큼의 책임이 사용자와 사회 전체에 돌아가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밝힌다(415-6). 요컨대 범죄를 해괴한 짓으로 간주하여 별도로 취급하고 그것의 파편이 가장 가난한 계급 위에 다시 떨어지게 하려고 애쓰는, 범죄에 관한 그 단조로운 언술을 뒤집어엎기 위한 모든 노력이 펼쳐진다.
그래서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적대자 쪽으로 돌리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의 역학관계를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 신문 사회면 사건들이 활용되기에 이른다(417).
19세기 후반기에 무정부주의자들이 형벌 기구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범죄에 고나한 정치적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들이 범죄에서 법률 거부의 가장 투쟁적인 형태를 인정하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이 범죄자들의 반항을 영웅적인 행위로 찬양하기보다는 범죄를 식민지처럼 지배한 부르주아지의 합법성과 위법행위로부터 범죄를 분리시키려고 애썼을 때, 그들이 민중의 위법행위들을 대상으로 그것들의 정치적 통일성을 회복하거나 성립시키고 싶어 했을 때, 그들의 노력에 부응한 것은 바로 대단히 풍부한 메아리로 소생하게 되었다는 그 교훈이다(421).
제3장 감옥 체계
1. 감옥제도의 형성이 완료되는 시기
감옥제도의 형성이 완료되는 시기는 메트래(Mettray) 소년수용시설이 공식적으로 문을 연 날인 1840년 1월 22일이다(423-4). 왜 메트래인가?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충실한 상태의 규율 형태이고, 행동에 대한 모든 강제적 기술체계가 집중되어 있는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수도원, 감옥, 학교, 군대의 성격’이 섞여 있다. 수감자들은 위계질서가 뚜렷한 다섯 가지 모형(가족모형, 군대모형, 작업장모형, 학교모형, 사법기관의 모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서로 다른 모형들의 겹쳐놓기에 힘입어, ‘훈육’ 기능의 구체적인 특징들이 확정될 수 있다. 메트래에서 대장과 부대장은 재판관, 교사, 직공장, 하사관, ‘부모’의 속성 전부를 조금씩 지니고 있어야 하고, 그것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개입시켜야 한다(424-5). 그들은 이를테면 행동을 다루는 기술자, 다시 말해서 품행을 다루는 기술자이자, 개개인을 뜯어고치려는 정형외과 의사이다. 그들은 순종적이고 동시에 유능한 신체를 만들어내야 한다. 계속적인 관찰이 수반되는 훈육인 바, 수용자들의 일상적인 행실에서 끊임없이 지식이 채택되어 영속적인 평가의 도구로 체계화된다(425).
신체의 조립방법은 개인에 대한 구체적 지식, 행동 양식에서 귀납된 기술 지도를 낳고, 적성의 획득은 권력관계의 고정과 뒤얽히며, 그리하여 건장하고 숙련된 양호한 농부들이 양성되고, 그 작업 자체가 기술적으로 조정되기만 한다면 그것을 통해 순응적 주체가 만들어지며, 그들에 관한 믿을 수 있는 지식이 쌓인다. 신체에 행해지는 이 규율 기술에 의해 두 가지 결과, 곧 인식되는 ‘정신’과 유지되는 예속상태가 생기는 셈이다.
메트래가 특히 모범적인 것은 그 훈육 활동에서 확인되는 특수성 때문이다. 그러한 활동은 그것이 의거하는 다른 통제 형식들, 이를테면 의학․일반 교육․신앙 지도와 가깝다. 간부들은 실제로 수용자들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그들을 감시함으로써 그들 사이에서 영속적인 감시망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러한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해, 전문 학교가 감화원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본질적인 요소는 수감자들 자신의 경우와 견습과 똑같은 강제력을 간부들에게 강제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권력관계에 관한 기술도 가르쳐졌다. 순수한 규율을 가르치는 최초의 사범학교라 할 만했다(426-7). 그도 그럴 것이 거기에서 ‘행형적인 것’은 ‘인간성’에서 보증을 구하고 ‘학문’에서 기반을 찾는 하나의 기획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습득되고 전달되며 일반적인 규준을 따르는 한가지 기술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규율을 어기는 자나 위험한 자들의 행실을 강제로 규격화하는 실무가 마치 제 차례나 된 듯이 기술의 안출과 합리적인 심사숙고를 통해 ‘규격화된다’. 규율의 기술이 하나의 ‘학문분야’가 되고 자체의 학교를 갖추는 셈이다.
메트래에서 일어난 것은 규율을 근간으로 한 규범화와 저항하는 개인들에 대한 새로운 유형의 통제-인식 겸 권력-의 등장,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의 제도적 특정화와 말하자면 명명식이다. 정상상태를 위한 통제책들은 의학이나 정신의학의 틀에 둘러싸여 ‘과학성’의 형식을 갖추었으며, 사법 기구에 기댐으로써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법적 보증을 얻었다. 이처럼 규준들의 감독을 위해 면밀하게 안출된 기술이 이 두 중요한 버팀목의 보호를 받고 나아가 그것들에 대해 연결고리 또는 교환 장소의 역할을 하면서,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다. 그 방법들의 제도적이고 특수한 받침대가 메트래 소년수용시설의 작은 학교를 출발점으로 해서 급속히 늘어났고, 그것들에 입각한 기구의 수와 규모가 증가했으며, 병원․학교․관공서․사기업과 더불어 그것들의 보조 업무가 다양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집행자들이 수, 권력, 기술적 자격의 면에서 증폭되었고, 그리하여 무규율을 다루는 기술자들이 계보를 이루기 시작했다(427-8). 규범화 권력의 규격화에서, 개인들에 대한 권력-지식의 정비에서, 메트래 소년수용시설과 그곳의 학교는 새로운 시대를 특징짓는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 시기를 여전히 거의 우리 시대의 것인 특정한 처벌기술의 형성에서의 도달점으로 선택했는가. 왜냐하면 그 선택은 다소 근거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트래가 감옥이긴 하지만 불완전한 감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법원에 의해 형을 선고받은 젊은 비행자들이 감금되었다는 점에서 감옥이지만, 혐의를 받아 기소된 뒤 무죄를 선고받은 미성년자들이 형법 제66조에 의해 거기에 수용되고, 18세기의 경우처럼 아버지의 징계에 의하여 귀가가 허용되지 않은 기숙학생들 또한 거기에 억류되었다는 점에서는 다소간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처벌의 모형인 메트래는 엄밀한 형벌제도의 한계선상에 자리한다. 그곳은 형법의 경계를 크게 뛰어넘어 이른바 수용소 군도를 구성하는 일련의 모든 기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법률에 의하지 않은’ 투옥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형법에 의하지 않은 감금의 원리가 현실적으로 결코 폐지된 적이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전주의 시대의 거대한 감호 기구가 감옥의 중개에 의해 한편으로는 법률상의 형벌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규율 기제들과 동질화되었다는 점이다(428-9). 고전주의 시대에 이미 흐릿하게 된 감금․사법적 징벌․규율제도 사이의 경계는, 가장 악의 없는 학문분야에까지 행형 기술을 보급하는 거대한 감금 연속체의 구성을 위해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으며, 형벌 체계의 심장부까지 규율훈련의 규준을 전파시키고, 아무리 사소한 위법 행위라도, 아무리 하찮은 부정(不正), 탈선, 또는 비정상이라도 범죄의 위협이 부과되도록 만든 것이다. 정밀하지만, 애매하게 만들어진 감옥의 그물은 밀집한 기관들뿐만 아니라 세분되고 확산된 방법들과 더불어 고전주의 시대의 불충분하게 통합된 자의적이고 집단적인 감금의 역할을 대신 떠맡게된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형사 사법에서 감옥은 처벌 절차를 행형 기술로 변모시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용소군도가 그 기술을 형벌기관으로부터 사회 전체로 이전시킨다. 그것에 따르는 몇 가지 중요한 결과를 언급해 보자.
(1) 이 광대한 장치는 무질서에서 법률 위반으로, 그리고 거꾸로 법률에 대한 위반에서 규칙․평균적인 것․요구사항․규준 등에 비추어 일탈적인 행위로 자연스럽게 옮겨갈 수 있게 하는 느리고 연속적이며 지각할 수 없는 단계적 변화를 확립한다.
(2) 감옥체계는 자체의 여러 절차를 통해 중대한 ‘범죄자들’의 징집을 가능하게 한다.
(3) 그러나 감옥의 제도와 합법적 투옥을 훨씬 넘어서는 그것의 확장이 초래하는 틀림없이 가장 중요한 결과는 그 제도가 처벌권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불법부정에 대한 관용에서 형벌행위의 수준으로 떨어뜨렸다는 점이다. 그것은 징벌의 실행에 있을 수 있는 무법성을 없애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감옥의 체계가 전개되는 두 영역, 다시 말해서 법적인 사법의 그것과 법률 외적인 규율의 그것을 상호적으로 작용케 함으로써 말이다.
(4) 권력의 기본적인 도구인 감옥 제도는 권력의 새로운 경제책에 힘입어 새로운 형태의 ‘법’, 다시 말해서 합법성과 당연한 이치, 규칙과 구조의 절충인 규범을 개발했다(436).
(5) 사회의 감옥 조직은 신체에 대한 현실적인 지배와 동시에 신체에 대한 영속적인 관찰을 확고히 한다.
(6)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탄생시부터 비난의 대상이어 온 사소한 발명품인 감옥의 극단적인 견고성을 설명해주는 요인일 것이다. 권력 장치와 전략들 한가운데에 깊숙이 박혀 있는 관계로, 감옥은 감옥을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관성의 힘으로 버틸 수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이 특징적이다. 즉, 투옥 제도를 변화시키는 일이 문제일 때, 그 시도에 대한 거부가 사법기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형법상의 제재인 감옥이 아니라, 사법 외적인 속박과 효력으로서 온갖 결정사항들이 갖추어져 있는 감옥, 규율과 감시의 일반적인 조직망에서의 중계점인 감옥, 일망 감시 체제에서 기능하는 것과 같은 감옥이다(438-9).
감옥을 둘러싸고 전반적인 정치적 목표가 있다(439). 오늘날 그 문제는 오히려 그 규범화 장치들의 대대적인 증강과 그것들이 새로운 객관화의 정착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반적인 권력 효과에 놓여 있다. 상상의 ‘지정학’으로 이루어진 감옥체계의 도시는 전혀 다른 원칙들에 예속되어 있다. 그 원칙은 이를테면 그 도시의 중심부에는 도시를 오랫동안 유지시키기 위해서인 듯, ‘권력의 중추’나 세력의 핵심체가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벽, 공간, 제도, 규칙, 담론-의 복잡한 조직망이 있다는 원칙이며, 감옥체계로 된 도시의 모형은 다양한 성격과 수준의 요소들을 대상으로 한 전략적인 배치라는 원칙이다. 또한 감옥은 법률이나 법전 또는 사법기구의 산물이 아니라는 원칙이고, 감옥은 법원이 내리는 판결과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순종적이고 서투른 도구로서 법원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원칙이며, 감옥에 대해 외면적이고 종속적인 것이 다름아닌 법원이라는 원칙이다.
스스로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인 위치에서 감옥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덜어주고 치료하고 구제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들이므로 겉보기와는 아주 다른 장치들 - 모두가 감옥처럼 규범화 권력을 행사하는 경향을 띠는 일련의 다른 ‘감옥’ 장치들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장치들이 적용되는 대상은 ‘중심적인’ 법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생산 기구-‘상업’과 ‘공업’- 주변의 각종 위법행위들 전체로서, 성격과 기원이 다양하고 이윤의 측면에서 특수한 역할을 떠맡으며 처벌 기제들에 의해 취급되는 방식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기제들을 주관하는 것은 한 가지 기구나 한 가지 제도의 단일한 운용이 아니라, 전투의 필연성과 전략의 규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억압․거부․배제․소외화 등과 같은 제도의 개념은, 감옥 도시의 중심부에 살고 있는 처지에서 교활한 완화책이나 공공연한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악의, 사소한 술책, 타산적인 방법, 기술, 결국 규율적 개인의 제조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의 형성을 묘사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복잡한 권력 관계의 결과와 도구, 다양한 ‘감옥’ 장치들에 의해 예속화된 신체와 힘, 그러한 전략의 구성요소인 담론의 대상들 사이에서, 곧 중심적이고 중앙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 틈에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441).
1. 감옥 - 실패인가, 성공인가: 궁극적인 감옥의 실패와 저항의 가능성
푸코는 감시와 처벌을 통해 처벌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러한 세 가지 유형이 ‘감옥체계의 도시’로 귀결되는 상황과 원인을 추적한다. 그렇다면 처벌의 세 가지 유형이란 무엇인가. (1) 구체제의 공개 처형이다(신체형을 당하는 육체). 루이 15세의 암살 시도로 인해 사형에 처하게 된 다미앵의 공개 고문 및 사형장면은 고전주의 시대가 ‘체형의 나라’임을 확실히 부각시켜 준다. 이러한 공개 처형을 통해 왕은 수형자의 명예 훼손, 민중들의 간접적인 고통 체험, 사법당국의 승리를 희망한다(66-7). 권력이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기 위한 의식행사로서 공개적인 신체형을 선택했던 것이다(84).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반대의 결과”, 즉 민중들에 의한 처벌 권력의 거부와 반항이 일어나면서 처벌 방식의 변화가 시도된다(100). ‘형벌의 완화’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2) 18세기 개혁가들에 의해 시도된, ‘인간성’을 ‘척도’로 한 징벌의 기본 법칙의 변화를 꾀한 이러한 변화는 ‘처벌의 도시’를 꿈꾼다(122). 개인을 법주체로 하여 처벌을 재규정하고자 한 것이다(자신에 관한 표상이 조작되는 영혼).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진정한 목적은 구체제의 과도한 신체형에 대한 인간적인 의미에서라기보다는 처벌권에 따르는 경제적인 비용과 정치적인 경비를 줄이고 처벌권의 모든 성과를 증대시키는 것이었다(130). “요컨대 형벌의 개혁은 군주의 초권력의 대항하는 싸움과, 실행되고 묵인된 위법 행위를 일삼는 하층 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의 접합점에서 태어난 것”이며(139), 그 궁극적 목표는 “처벌하는 권력의 새로운 관리방식과 새로운 기술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141). (3) 그러나 결과는 ‘훈육을 받는 신체’를 구성 요소로 하는 ‘감옥체계의 도시’로의 이행이다(198).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세 번째 것이 결국 주도적인 것으로 부각되었는가.”(199) 감옥의 실패와 성공에 대한 푸코의 논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먼저 푸코는 감옥의 실패를 이야기한다. 감옥이 범죄를 줄이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400).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감옥의 등장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보면서 푸코는 결코 감옥이 실패하고 있지 않다고 논한다. “감옥의 성공, 이것은 법과 위법행위들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에서 ‘범죄’에 특수성을 부여한 점에 있다”(400)는 것이다. 감옥제도의 형성이 완료되는 시기로서 메트레의 등장은 이러한 감옥의 성공을 잘 말해준다(423). 결국 감옥의 목적은 범죄의 감소와 범죄자의 교화가 아닌 “규율을 근간으로 한 규범화와 저항하는 개인들에 대한 새로운 유형의 통제-인식 겸 권력-의 등장,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의 제도적 특정화와 말하자면 명명식”이었던 것이다(427). 이러한 감옥과 감옥체계의 전사회적 확장(수용소군도의 등장)을 통해 근대적 규율 권력이 완성되었으며, “규율․훈련이라고 명명되는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의해서 제조”된 ‘근대적 개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288). 따라서 감옥은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푸코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감옥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150년 전부터, 감옥은 언제나 감옥 자체의 구제책으로 제시되어 왔으며, 행형 기술들의 재활성화는 그것들의 빈번한 실패를 보상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교정 계획의 실현은 그 계획을 현실화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되어 왔다.
이 점에 대해 확신을 갖는 데에는 한 가지 사실을 살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최근 몇 주 동안에 일어난 수감자들의 폭동은 1945년에 확정된 개혁안이 현실적으로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따라서 감옥의 기본 원칙들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390).
어떻게 근대적 규율 권력에 의해 주조된 복종적․순종적인 ‘근대적 개인’들이 규율 권력의 핵심부인 감옥에서 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러한 언급은 제1부 제1장 “수형자의 신체” 말미에서도 발견된다.
일반적인 처벌 및 감옥이 신체의 정치적 기술론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내게 교시해 준 것은 아마도 역사라기보다 오늘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에 거의 전세계에서 감옥 폭동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한 사건의 목적, 구호와 전개에는 분명히 역설적인 점이 있었다. 그것은 1세기 이상이나 오래 전부터 계속된 신체상의 모든 비참한 상태, 즉 추위, 숨막히는 실내 공기, 건물 내부의 노후화, 배고픔 구타 등에 항거하는 폭동이었다. 그런데 또한 그것은 모범적인 감옥, 신경 안정제, 고립, 의료적 혹은 교육적인 배려에 항거하는 폭동이기도 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만 목표를 둔 그러한 폭동인가? 인권 유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안락한 생활 조건에 대한, 또 간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정신과 의사에 대한 상호모순되는 폭동인가? 실제로 이러한 사건의 어떤 경우에나 문제가 된 것은, 19세기 초부터 감옥이 바탕이 되어 만들어진 무수한 담론 속에서 문제가 된 것처럼, 바로 신체와 물질적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담론과 폭동을 혹은 추억과 욕설의 내용을 초래한 그것은 그 하잘 것 없는 미세한 물질성들이다. … 문제는 그것이 감옥의 체질 그 자체에 대한 신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폭동이었다는 점이다(60-1).
푸코는 이러한 폭동의 발생에서 감옥의 궁극적인 실패이자 저항의 가능성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물질적인 것, 즉 수감 조건의 개선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감옥의 체질 그 자체에 대한 신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폭동”이라는 점에서. 여기에서 ‘감옥의 체질’은 감옥이 행사하고 있는 근대적 규율 권력, 즉 육체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정신적으로 복종과 순종을 체득하게 만드는 ‘생산적 권력’(288)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폭동’이라는 것은 생산적 권력이 주요 목표로 삼고 있는 두 가지, 곧 정신과 신체 중 신체를 통해서, 즉 신체가 규율 권력이 행사되는 목표물이었다는 점을 자각한 이후에 자신의 신체화 과정을 통해 재창조된 ‘신체’를 말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감옥은 개인에 의해 자각된 자신의 신체를 통한 폭동으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실패했으며, 저항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푸코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으르렁거리면서 싸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마지막의 충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복잡한 권력 관계의 결과와 도구, 다양한 ‘감옥’ 장치들에 의해 예속화된 신체와 힘, 그러한 전략의 구성요소인 담론의 대상들 사이에서, 곧 중심적이고 중앙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 틈에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441).
그러나 근대적 규율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근대적 개인’이 어떠한 계기를 통해 자신의 신체임을 자각하고 폭동이라는 저항을 선택하게 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2. 타자의 시선 - 의식 가능성 유무에 따른 변화
타인의 눈초리는 타자가 나의 제 가능성을 응고(凝固)시킴으로써 불가능을 나에게 현시하거니와, 그것은 내가 다른 한 사람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면 대상일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있는 바의(…인 바의)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눈초리에 있어서, 나의 여러 가능성의 죽음은 나에게 타자의 자유를 체험케 한다. 나의 여러 가능성의 죽음은 이 자유의 품안에서밖에는 실현되지 않는다. 나는 접근할 수 없는 나 자신으로서, 게다가 타자의 자유의 품안에 던져지고 초출(超出)되어 있는 나 자신으로서 ‘나’이다.1)
도처에 눈이 있다.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타자’의 시선들. 거리를 지나면서 부딪히는 낯선 ‘타자’들의 시선 속에서, 여러 경로의 육체적 접촉을 통해 ‘나’를 익히 알고 있는 익숙한 ‘타자’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표현한다. 문득 혼자이고 싶다는 생각이 ‘나’의 의식을 지배할 때 난 그 ‘타자’들의 시선에 버거워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현실 공간을 향해 “그러니 나를 그냥 제발 좀 놔두시오”라 외치는 좀머 씨의 심정2)에 순식간에 동화된다. ‘타자’의 시선이 ‘나’를 대상으로 만들고 ‘나’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나’에게는 시련으로 작용한다는 사르트르의 고백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3)
푸코가 논하는 ‘감옥체계의 도시’ 역시 이처럼 자신에게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분석이 아닐까. 먼저 푸코는 근대적 권력 생산 메커니즘으로 벤담이 말한 ‘팬옵티콘’(Panopticon)을 들고 있다. 중앙탑 쪽으로 문이 나있는 방들로 이루어진 원형 건물로서 빛이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반사를 하는 원형감시탑. 빛의 반사로 인해 방 안에서는 바깥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오직 감시탑에서만 방 안을 볼 수 있는 원형감시탑(295). 현실 공간에서 방 안에 존재하는 것은 ‘나’이다. 감시탑에 존재하는 것은 ‘타자’의 시선, 그리고 ‘권력’의 시선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바라보는 ‘타자’와 ‘권력’의 시선을 모른다. 의식하지 못한다.
주민에 대한 전반적인 감시, “눈치 채이지 않고 비밀스럽고 말없는…” 경계, “이것은 모든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열려 있고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감시하는, 그렇다고 그들을 어떠한 강제 조치에 얽매이게 하지는 않는 정부의 눈이다. … 이것은 법률 안에 명시해 둘 필요가 없다.” 석방된 죄인들, 그리고 심각한 범행으로 인하여 이미 사법적으로 처리되었으나 사회의 안정을 또다시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법률상 추정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1810년의 법전에 규정된 특별한 감시. 더 나아가 거의 모두가 전과자인 밀정이거나 밀고자들에 의해 위험시되는 각종의 사회와 집단들에 대한 감시. 다시 말해서 경찰에 의한 감시의 여러 대상들 가운데 하나인 범죄는 바로 그러한 감시의 특권적인 도구인 셈이다. 이러한 모든 감시활동들은 부분적으로 공인되고, 부분적으로 비밀스런 위계질서의 조직화를 전제로 한다. 그것들은 중죄인의 소재확인과 식별을 중심으로 한 기록체계의 정비를 또한 전제로 한다. 범죄는 비밀경찰을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경찰력 배치를 위한 지역분할을 정당화함으로써 주민에 대한 영속적인 감시의 수단, 다시 말해서 다름아닌 범죄자들을 통해 사회의 전영역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장치를 구성한다(405-6).
따라서 ‘나’는 방 안이라는 공간에서만큼은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타자와 권력의 시선에 대한 의식 불가능성으로 인해 현실 공간이 ‘매트릭스’4), 곧 감옥일 수 있다는 점을 전혀 모르고 살아간다. 요컨대 보여짐에 대한 의식 불가능으로 인해 바라봄과 보여짐의 관계가 성립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넌 노예야, 네오(Neo).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너도 그 속에 묶여 있고, 자넨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감옥 안에 갇힌 상태로 태어났지. 바로 자네 마음을 통제하는 감옥이지.5)
그러나 2003년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적 배경 속에 존재하는 원형감시탑은 벤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빛의 반사가 없다. 따라서 방 안에 존재하는 ‘나’는 감시탑에서 ‘나’에게 스산한 눈초리를 보내는 ‘타자’와 ‘권력’의 시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 가능함, 시선의 의식 가능함은 ‘나’에게 더욱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타자’가 생각하는, ‘권력’이 원하는 ‘정상’인으로 존재하기. 그것에 대한 무언의 압력. 곧 ‘정상’에로의 틀지우기로 인해 ‘나’는 ‘타자’와 ‘권력’의 희망대로 주조되어 ‘정상’인으로 길들여진다. ‘이중 감시’라는 경험을 하면서. 법과 경찰이라는 강제력의 동원에 의해 근대의 개인들은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일차적 감시라는 그물망에 갇힌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사상의 범위를 설정, 제한을 가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차적 감시, 즉 ‘자기검열’의 틀에 얽매인다. 이러한 이중 감시의 위력 앞에 근대의 개인은 어느덧 권력에서 설정한 ‘정상’인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권력의 감시와 통제, 그것은 바로 권력이 주조한 ‘정상’에로의 틀지우기이며, 그로 인해 구성원들은 ‘정상’으로 길들여진다. 즉 바라봄과 보여짐의 관계가 대립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짐에 바라봄이 포섭되어 ‘나’를 바라보는 주체가 ‘타자’와 ‘권력’ 뿐만 아니라 ‘타자’와 ‘권력’의 시선을 내재화하여 ‘정상’으로 동화된 ‘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푸코가 ‘감옥체계의 도시’에서 우려했던 부분은 이 점이 아닐까 싶다.
3. 피동적 인간인가, 인간의 의식 속에 감옥을 열망하는 본능적 의식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감옥의 성공, 이것은 법과 위법행위들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에서 ‘범죄’에 특수성을 부여한 점에 있다. 어떻게 감금체계가 법률 위반자를 범죄자로 대체했으며, 또한 모든 범위의 가능한 인식을 사법의 실제에 일일이 고정시켰는가 하는 문제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대상으로서의 범죄를 설정하는 그 과정은 위법행위들을 분리하고, 그것들로부터 비행을 떼어놓는 정치적 조각과 일체를 이룬다. 감옥은 이 두 가지 기제의 접합점으로서, 그것들로 하여금 서로를 보강하고, 범법 뒤에 놓여 있는 비행을 객관화하며, 위법행위의 움직임 안에 범죄를 고정시킬 수 있게 해준다. 감옥의 성공은 그토록 대단한 것이어서, 한 세기 반에 걸친 ‘실패’ 후에도 감옥은 언제나 존재하면서 동일한 효과를 낳고 있으며, 감옥의 폐지에 대해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걱정을 하는 실정이다(400).
푸코에게 있어 근대적 개인은 “규율․훈련이라고 명명되는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의해서 제조”된 존재이다(288). 위계질서적인 감시, 규범화된 상벌제도, 그리고 시험이라는 교정 수단과 규율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일망 감시방법에 의해 개인은 권력이 원하는 방향대로 주조된 피동적인 존재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감옥의 폐지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걱정을 하는’ 개인 역시 푸코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권력의 제조 차원에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근대적 개인’이 권력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감옥의 폐지를 걱정하는 것일까. 인간 본성 속에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분류를 통해 비정상인에 의한 항상적인 위협을 감소시키는 기제로서 감옥의 존재를 원하는 측면은 없는 것일까. 조금 다른 차원의 논의이지만, 사형 제도의 지속적인 존재를 인간 본성의 측면으로 접근하여 인간 본성 속에 사형을 원하는 심리적 기제가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형 폐지가 완전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분석한 레더(Karl Bruno Leder)의 논의는 푸코의 전적으로 만들어지는 ‘근대적 개인’ 인식과 관련하여 일정부분 반론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보여진다.
레더는 사형 제도가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존치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으로 “사형을 요구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사형을 요구하는 사회 심리적 욕구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첫째, ‘복수의 본능’이다. “어떤 범죄의 피해자든 피해자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같은 수준의 고통을 범죄인 역시 당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정의 이전의 복수의 본능이다. 인간이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복수의 본능을 국가의 형벌권을 통하여 극단적인 형태로 실현하는 것이 사형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해보복(同害報復)의 관념을 근간으로 하는 탈리오(Talio)의 사상, 살인․강간․강도 등의 범죄에서 노예은닉, 위증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사형을 인정하고 있는 함무라비 법전 등은 복수의 본능에 입각한 응보의 사회적 심리가 사형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레더 1991, 28-30). 둘째, ‘집단규범에의 동조 및 복종의 심리’이다. 인간은 그 본질적 속성에 의하여 집단을 통해서만 개인의 자기완성을 달성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집단을 이루려는 심리적 욕구를 지니게 된다. 여러 사람이 집단을 이루게 되면 구성원들 사이에는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 합의가 생기는데, 이 합의된 일치점이 바로 집단규범이다. 그리고 이 집단규범은 여러 사람이 동일하게 행동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여러 사람에 따르는 행동을 집단 성원에게 요구하는데 동조(同調)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집단을 이루게 된 집단 성원들은 자신들이 합의한 집단규범에의 복종을 동조와 함께 그 성원에게 강요한다. 집단의 존속을 위해 만들어진 합의를 어기는 것이 용인될 시 집단이 깨지게 되기 때문이다(이수원 외 1994, 368-71). 범죄는 어떤 형태로든 응징되어야 이 규범체계가 유지된다는 사회적 심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집단의 유지를 위한 질서 회복 차원의 사회 심리적 요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유사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형을 용인하게 된다(레더 1991, 31). 셋째, ‘모방의 유혹’과 ‘질투의 심리’이다. 인간은 누구나 금지된 것을 오히려 하고 싶어하는 심리적 욕구를 가진다. 다른 사람이 이미 그 금지를 깼다고 하면 더더욱 하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러한 나쁜 선례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흉내내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회 질서는 문란해진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집단규범에 관한 모든 권위가 흔들려 사회는 무정부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사회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법도를 위반한 자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법도를 위반한 자가 다른 사람까지 감염시키는 ‘악례(惡例)’를 두려워하는 것은 잠재 의식 속에 간신히 제어해 놓은 충동이 그 악례에 의해서 또다시 분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규범을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적의를 품지만 사실 그것은 질투심이다. 왜냐하면 규범을 위반한 자는 다른 사람도 하고 싶었던 것-적어도 잠재 의식 속에서는 그것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있는 것-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범을 위반한 자에게는 자기의 행위에 대한 응보가 있어야 한다. 요컨대 벌을 받지 않고 끝나는 규범 위반자를 모방하려는 유혹에 대한 두려움과 그자가 올린 ‘성과’에 대한 질투라는 사회 심리적 욕구는 규범 위반에 대한 대가를 강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사형이다(레더 1991, 31-2).
물론 사형 존치의 요구에 대한 레더의 분석은 본능이라는 심리적 기제를 전제함으로써 논리적 인과관계에 따른 분석이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권력에 의해 주조된 개인만을 상정하는 푸코의 인간 의식, 따라서 감옥의 폐지에 두려움을 나타내는 개인들의 심리도 권력의 개입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푸코에게 레더의 논의는 푸코의 논의를 보충하는 차원에서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즉 감옥의 존재를 원하는 인간들의 심리적 차원이 토대가 된 상태에서 감옥의 존재를 감시체제의 확대가 아닌 사회질서의 안정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변화시킨 권력의 개입이 더해져 감옥의 온존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 참고문헌 ***
레더, 칼 브루노(Karl Bruno Leder). 이상혁 옮김. 1991. 세계 사형 백과: 사형의 기원과 역사, 그 희생자들. 하서.
이수원 외. 1994. 심리학: 집단에서의 행동. 정민사.
출처: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비교사상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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