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시선집『공포와 전율의 나날』의 새판을 시인동네에서 냈다. 1993년에 낸『폭력과 광기의 나날』이라는 제목의 시집의 시편이 대부분 그대로 실려 있다.
나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줄기차게 괴롭히는 두 악마, 바로 ‘폭력’과 ‘광기’다. 나는 폭력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광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알 수 없었다. 중세시대에는 미친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했던 것일까. 그때도 정신병원이 있었던가.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정신병원 풍경은 과장인가 실재인가.
소르본느 대학에서 943쪽에 달하는 논문「이성과 비이성―고전주의 시대에 있어서 광기의 역사」로 박사논문 심사에 통과된 다음해인 1961년, 푸코는 청중과 교수들이 가득 자리를 메운 강의실에 공개심사를 받기 위해 선다. 그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광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광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시인의 재능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미친 사람의 외침은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의 귀에는 뜻이 전달되지만 보통 사람의 귀에는 단지 외침일 뿐이다.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유사 이래 광인은 얼마나 처절하게 외쳐왔던 것일까. 멀쩡한 우리는 그 외침을 얼마나 무시해왔던 것일까.
그는 중세나 르네상스 시기까지만 해도 유럽 사회가 광기에 대해 관용을 보였지만 절대왕권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비이성'의 침묵화로 인해 광기가 ‘정신의학’이라는 이성의 검열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또한 르네상스 시기만 해도 용인되던 광기 표현의 자유가 17세기 고전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대감금(大監禁)’이 이루어져 이성이 광기를 배제하는 무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마을에 한두 명씩은 있는 유쾌한 미치광이, 팔푼이며 우울증 환자들이 이 시기부터 격리 수용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욱이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광기가 비이성의 다른 형태, 혹은 범죄와 구별되면서 순수한 정신병으로 제도화되어 결국 광인은 자신의 광기로부터도 차단되고 말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인간의 이성은 조금이라도 미친 것 같으면 죄인 취급을 해 감금을 하는 슬픈 광기의 역사를 전개하게 된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부터 광기는 사탄이요 터부였다. 위대한 예술혼의 근저에는 광기가 있음을 이성의 역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푸코는 광기, 달리 말해 정신병이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내려온 것임을 논증하였다. 그는 반이성주의, 반역사주의, 반과학주의, 반형이상학을 표방한『광기의 역사』를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1984년에 숨을 거두었을 때 역사가 폴 베인은 추도문에 이렇게 썼다. “푸코의 전 저작은 그것 자체가 금세기에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여겨진다.” 그의 많은 저작 중『성의 역사』『지식의 고고학』『병원의 탄생』『말과 사물』 등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 아래의 신문기사는 2001년 10월 6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렸던 것입니다. 원래는 <제네바/AP 연합>에 실렸던 것을 다시 전재한 것입니다.
세계인구 4분의 1 정신질환 앓아
WHO 보고서 지적…매년 1천만~2천만 명 자살 시도
세계 인구 4명 가운데 1명이 일생 동안 1번 이상 정신ㆍ신경 질환을 앓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보건기구(WHO)는 4일 발표한 ‘정신건강―새로운 이해, 새로운 희망’이란 제목의 연례보고서에서, 현재 세계적으로 4억5천만 명이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ㆍ간질ㆍ알코올중독증 등의 정신・신경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창피하다고 생각하거나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 전문의 상담을 받지 않아 매년 1천만~2천만 명의 환자가 자살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00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3대 정신질환인 정신분열・우울증・간질을 치료하는 처방약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가 세계에서 25%에 이르며, 정신건강에 대한 보건정책이 아예 마련돼 있지 않은 나라도 40%나 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80% 이상이 가족들의 도움 아래 1년 정도 치료를 받으면 정상이 될 수 있고, 우울증이나 간질 환자도 60~70% 정도는 회복이 가능한 만큼 정부 차원의 정책적 지원과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아래의 글은 예전, 『폭력과 광기의 나날』을 펴낸 직후에 썼던 것입니다. 이번에 낸 시선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은 그 시집의 리바이벌에 가까우므로 이 자리에 다시 올려봅니다.
나는 왜 ‘폭력’과 ‘광기’에 대한 관심을 가져온 것인가
1
내가 평생토록 추구해나가야 할 문학세계, 즉 내 문학의 화두는 무엇일까. 사랑과 유토피아에 대한 탐구도 욥의 신앙심도 아닌 ‘폭력과 광기’, 그리고 ‘생명체에 대한 연민의 정’ 정도일 것이다.『폭력과 광기의 나날』은 나의 네 번째 시집 제목이다. 동명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이 시집을 내기 6년 전, ‘비동인’ 동인지 3집 『아무도 그 숲에 가지 않았다』에 나는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하였다.
조용히 피 흘리며 내가 쓰러진다면 너는 무얼 할래?
매맞아 아프지 않은 지도 오래
두들겨 맞으며 나는 자랐다 자란다 두 살 아래 내 누이야
잠 오지 않을 땐 나를 생각하렴 최면 걸린 시민이 되면
전혀 신음하지 않는다 몇 대를 두들겨 맞아도
녹초가 되어도 초주검이 되어도 얼굴이 흰 작은오빠는
울지 않는다 빌지 않는다 상처가 아물면
다시 굴욕의 밤, 다시 통제된 밤이다
누이야, 원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법
가장 미운 사람을 가장 많이 닮는 법
바깥에 봄비 추적추적 내리던 날, 가옥에서 나가리라
차라리 내 다 용서하고 평생 머리 기르지 않으리라
맹세했건만 버릴 수 없어 더 가증스런 살붙이
매일 보는 겨레붙이가 알고 보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무서워 치가 떨리는 城 城內 계단 밑 방
숨어서 울던 어린 네가 생각난다 城內는 무서워요
나를 내버려두지 말아요 나는 혼자 달아나곤 했다
자주 맞으면 아프지 않아 차라리 희열이다
면역이 된 내 몸과 만성이 된 내 마음이다만
고뇌의 황홀을 맛보기 위하여 나는 다시 더 세게
맞아야 한다 자, 때리십시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살 아래 내 누이야 오락가락하지 말고 나를 봐
작은오빠는 통나무란다 맞아도 맞아도
아프지 않아 아프면 어때 뒤죽박죽인 낮과 밤
싸우는 소리 환청으로 들려오는 계단 밑 방
나는 더 자라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ㅡ「통나무」 전문
이런 시를 써서 발표했다는 것 자체가 내 가슴을 아프게 했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게 했다. 어느덧 연로해지셨고, 자식들 앞에서 임종의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부모님이다. 허나 이 시는,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노래’였으며, ‘써야 숨이라도 크게 들이쉴 수 있는 글’이었다. 폭력과 광기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평생토록 자유로울 수 없을 내가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인간 정서의 따뜻함을 노래하는 서정시만을 쓴다면 그것은 극복이 아니라 위선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단언할 수 있는데,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내 부모님을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 나름대로는 필사적인 노력을 해왔고, 그 노력의 과정에서 한 생각들이 시가 되었다고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다. 아니, 한없이 부끄러워해야 한다. 부자지간의 인연을, 모자지간의 인연을 끊을 마음으로 집을 뛰쳐나가곤 했던 나를 하늘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이 내게 그 어떤 천벌이 내리더라도 달게 받아야 할 것이다. 그간 벌을 무수히 받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지라도 앞으로 더 많이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얘기 다 그만두고 옛날 얘기를 하자.
나는 외할아버지께서 지금껏 생존해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하는 가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나의 외할아버지이시니 근 45년이 지난 지금은 불귀의 객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2대 국회의원의 되신 지 25일 만에 6·25가 발발해 납북되신 나의 외할아버지는 어린 일곱 남매가 거리로 나앉을 만큼의 빚만 남겨두고 사라지셨다고 한다. 졸지에 가장이 된 어머니가 동생들의 등록금을 벌고 또 친척들한테 돈을 빌리러 다니는 동안에 입은 상처를 나는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나는 내 할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왜 술병으로 돌아가셨는지를 대강은 알고 있다. 고려말에 난을 일으킨 이자겸의 후손들은 양반은 양반이되 조선조 500년 동안 변변한 벼슬에 올라보지 못하고 오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야 했던 이른바 잔반(殘班)이었다. 할아버지는 겨울에는 대구역 앞에서 마부를, 여름에는 채소 장수를 하면서 일곱 식솔 거둬 먹이느라 하나뿐인 아들을 소학교에도 못 보낼 지경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작은할아버지가 계신 대구 근교 무태에 가서 소학교를 다녔고, 고학으로 중학교를 마친 뒤에는 학비가 안 들어가는 경찰전문대학에 들어가 경찰관이 되었다.
시골 지서 주임으로 전전하다 김천경찰서 정보주임까지 올라갔지만 계급은 10년 내리 경위였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고 아첨도 모르는 아버지는 결국 어머니가 하시는 문방구점의 점원이 되셨다. 중학교 때 옆자리에서 커닝하던 아무개는 국회의원이 되어 외유를 하고 아무개는 사장이 되어 떵떵거리는데……. 이런 아버지의 한이야 나도 조금은 알고 있다. 증조할아버지한테 너무 많이 맞아 탈장한 할아버지는 피똥을 싸다 자식 장가드는 못 보고 생애를 마치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해준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나는 집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곤 하는 아버지의 광포한 행동을 그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폭력과 폭언에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 이유가 분명치 않을 때가 많았다. 거의 언제나 분노하고 계셨고, 가족이 분노를 푸는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부부싸움의 직접적인 원인은 대개 말 한마디도 남편에게 결코 지지 않으려 하는 어머니의 자존심인 경우가 많았다.
두 분 모두에게 사생결단에 가까운, 온 동네 사람들이 혀를 차며 수군대는 갈 데까지 가는 주기적인 부부싸움. 다툼이 끝난 뒤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는 대구에 가 며칠씩 머물다 오시곤 했다. 어머니의 신세 한탄과 남편에 대한 저주를 곁들인 꾸지람은 1시간이 넘게 지속되기 예사였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하시는 내내 두 자식을 격렬하게 꾸짖는 습관을(그렇게밖에 자신의 분노를 다스릴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 누이가 발병하기 전까지는 버리지 못하셨다.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 집을 뛰쳐나갔었고, 잠 오는 약을 얻으러 병원을 전전하던 그 오랜 날들. 나의 창피스런 과거지사 고백과 악몽 꾸지 않고 잠 좀 자봤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영어로 무엇인가를 적기만 하던 신경정신과 병원의 의사들. 그 의사들이 1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하며 처방해준, 졸음을 몰고 오는 알약들. 그놈의 약 때문에 나빠져 음식물을 입 밖으로 되돌려보내곤 하던 위장.
그래, 이제는 아스라한 추억의 몇몇 페이지를 희화로 그릴 여유가 생겼으니 다 고백할 수 있다. 그때 내게 살아야 함의 엄정함을 설득하고, 바르게 살아야 함의 눈물겨움을 깨우친 것은 문학이었다. 나보다 훨씬 많은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보낸 선인 혹은 동시대인의 글이었다. 여러 작가들의 ‘자기 구원’의 논리를 충분히 인정한다. 나부터 구원하지 못해 쩔쩔매면서 남을 계도하겠다고 필봉을 휘두를 수는 없지 않은가.
중학교를 졸업한 그해에 대학에 들어갈 자격은 얻었으나 캠퍼스를 돌아다니게 된 것은 1980년이었다. 성장기의 5년 동안을 친구 하나 없이 이 도시 저 도시 헤매 다니거나,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보내지 않았더라면 시인이 될 꿈을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정신 또한 황폐해져, 타인을 향한 살기등등한 눈빛 때문에 오해를 산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이런 끔찍한 일도 저질렀다. 연 이틀, 그러니까 48시간 이상을 한숨도 못 자게 되면 온 신경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살의로 날이 시퍼렇게 서 있게 된다. 이런 때 또 어머니가 내 신경을 건드린 것이었다. 방황하는 아들이 안쓰러워서였을 것이다. 나는 달려들어 당신을 죽여버리겠노라고 목을 졸랐다. 어머니가 혼비백산하여 달려간 곳은 점쟁이 앞이었다. 어머니는 거의 한평생을 점괘에 의지해 살아오시더니 몇 해 전부터 천주교인이 되었다.
그래도 입에 붙은 말은 “승하는 난 시(時)가 좋아 잘 될 거다”이고 해마다 신수는 거기서 확인하시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난 시가 그렇게 좋다는데”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는 연민의 정으로 가슴이 아프다. 성경과 나란히 꽂혀 있는 정다운 스님의『인생십이진법』이란 책. 어머니는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주술적 예언에 그렇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한때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상주 고을을 떠들썩하게 했던 재원이셨는데.
대학 1학년의 가을부터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인식하고 자성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방과후에는 역사의 강에 떠내려간 억울한 주검들의 흔적을 찾는 공부에 몰두하였다. 때마침 고시공부를 하다 집어치우고 문학의 길로 들어선 형에게서 많은 감화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무렵 형이 사 들고 오는 계간지는 내 의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다. 친구들과 어울려 토론도 하고 동인지도 내는 등 개인적인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간 대학 시절이었다. 그 뒤 조교를 하면서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 과정까지 다니게 되었으니 나는 이 빈한한 땅에서 혜택 받은 자, 아니, 특권층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나는 블루칼라가 아닌 화이트칼라이고, 별 지식은 없지만 지식인 대열에 서 있다.
나는 내 능력의 최대치, 즉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체력도 남만 못하고 의지도 박약하다. 그래도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을 때 쓸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수 있으랴. 회사 일이란 것이 지겹기만 하고, 문학과는 무관하여 맥빠지게 하고, 상사의 심기를 늘 살피며 처신해야 하는 것이 저주스러울 때도 있지만, 열심히 세상을 읽는 과정이니 언젠가는 이 경험에서도 좋은 글이 나올 거라고 자위하고 있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을 시집의 제목으로 삼게 된 이유를 두서없이 늘어놓다 보니 밤이 깊었다. 내일 회사에 가서 졸지 않을지 모르겠다.
2
이브 미쇼의『폭력과 정치』나 미셸 푸코의『광기의 역사』를 읽지 않아도 좋다. 신문 한 장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폭력의 피와 광기의 울부짖음으로 점철되면서 진행되고 있음을. 전임 대통령을 테러하려 했다고 미사일을 쏘아 무고한 양민을 살상한 미국 대통령이 건강을 위해 조깅복을 입고 뜀박질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칼라로 1면을 장식한 1993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6면에는 ‘학대받는 어린이 늘고 있다’란 제하에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아이티의 경우 10만여 명 아동이 다른 가정의 하인으로 종사하고 있다. ……인도 봄베이에서도 12세 이하 아동의 매춘 인력은 수만 명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콜롬비아에서 어린이 2명이 납치 살해되고 눈을 강탈당한 사건이 있었으며…… 난민 수용소에는 5백만의 어린이가 보호를 기다리고 있고 집 없이 떠도는 어린이도 1천2백만 명에 이른다. ……지난 10년 간 분쟁으로 인해 어린이 1백50만 명이 사망하고……
세계 상황이 이렇게 암담한데도 불구하고 나는 커피를 마시거나 음악을 들으며 시를 쓰고 있다. 사무사(思無邪)의 시, 진선미의 시를. 아니 무기력한 시, 무의미한 시를. 선하품 같은 나의 언어는 무수한 어린이가 학대받고 죽어가는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 도대체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부끄러워서 시를 쓰고 있다고 고백하자. 폭력의 현장에서 그저 체념하며 보낸 지난 30여 년과, 광기의 실체를 보고 그저 체념하며 보낸 지난 10여 년이 한스러워 나는 요즈음 심야에 거의 발작적으로 시를 쓰고 있다. 펜을 잡고 그렇게 꿈이나 꾸는 것이다. 폭력과 광기가 없는 나날을. 결코 도래하지 않을 유토피아의 나날을.
폭력은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물리적 폭력이 그 전부는 아닐 것이다. 파괴된 오존층과 산성비는 경제적 폭력의 산물일 것이므로. 공해와 각종 식품 첨가물로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으니 경제적 폭력도 물리적 폭력에 못지않게 무서운 폭력이리라. 또 폭력을 방관하는 무관심이나 폭력을 무시하는 무지함은 또 다른 폭력을 초래하므로 심리적 폭력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의 폭력과 문자의 폭력도 심리적 폭력이며 소문도 소음도 심리적 폭력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각종 폭력 앞에서 나의 언어는 너무나 무력하지만, 무관심과 무지함만은 단호히 거부하고 싶다. 세계 상황을 먼 산 불 보듯이 하면서 나만의 안온한 공간에 침잠하지 말 것이며, 나의 번민을 침소봉대하여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도 말 일이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어린이들이 그렇게 많다니, 장송곡을 작곡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자. 비폭력의 정당함을 외치다 광기에 의해 죽은 마하트마 간디와, 폭력의 정당함을 외치다 광기에 의해 죽은 흑인 인권운동가 말콤 X를 조상하는 기분으로 시를 쓰자. 폭력 없는 세상에선 광기도 없으리니.
그러나 광기 중에도 참된 광기가 있다면, 광기 없이 무엇을 이룰 수 있으랴. 니체의 광기가 ‘차라투스트라’를 탄생시켰듯이, 고흐의 광기가 ‘해바라기’를 그리게 했듯이, 이중섭의 광기가 ‘소’를 탄생시켰듯이, 광기의 뜨거움과 끈질김을 부정하지는 말자. 자기 얼굴을 화장하는, 슬픈 분장술에 불과한 나의 시일지라도 폭력 없는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말(언어), 말이 일으키는 바람, 바람이 흩뿌리는 편편의 티끌, 티끌에 의해 흘러내린 눈물의 시를 쓰도록 애쓰자. 광기 없는 세상에선 폭력도 없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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