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16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 가족/개인글 2019.08.15
나희덕15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 가족/개인글 2019.08.15
나희덕10 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 가족/개인글 2019.08.15
나희덕8 나희덕 시인나희덕 5년만에 시집 ‘야생사과’ 시세계 변화를 향한 반성과 모색 “비우고 나니 자유롭고 풍요로워” 지난달 통권 300호를 돌파한 ‘창비시선’이 301권째부터 판형과 디자인을 바꿨다. 길이를 늘리고 표지도 실사 이미지를 활용하는 쪽으로 변화를 주었다. 바뀐 판형과 디.. 가족/개인글 2019.08.15
나희덕5 파일명 서정시* 나희덕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줌 손톱 몇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 가족/개인글 2019.08.15
나희덕4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 있네 그러면 내 스무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 가족/개인글 2019.08.15
나희덕3 낯선 편지 - 나희덕 오래된 짐꾸러미에서 나온 네 빛바랜 편지를 나는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다 건포도처럼 박힌 낯선 기호들, 사랑이 발명한 두 사람만의 언어를 어둠 속에서도 소리 내어 읽곤 했던 날이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저편에서 네가 부싯돌을 켜대고 있다 해도 나는 이제 그 깜.. 가족/개인글 2019.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