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개인글

나희덕8

한적한길 2019. 8. 15. 15:43


나희덕 시인
나희덕 시인
나희덕 5년만에 시집 ‘야생사과’




시세계 변화를 향한 반성과 모색
“비우고 나니 자유롭고 풍요로워”

지난달 통권 300호를 돌파한 ‘창비시선’이 301권째부터 판형과 디자인을 바꿨다. 길이를 늘리고 표지도 실사 이미지를 활용하는 쪽으로 변화를 주었다. 바뀐 판형과 디자인의 첫 주자는 나희덕(사진) 시인의 <야생사과>다.

판형 변화와 함께 시인의 시세계에도 변모가 찾아왔다. 그 변모를 한마디로 하자면 ‘단정한 성찰에서 존재의 모험으로’라고 할 수 있겠다. 시쳇말로 ‘범생이’ 스타일이었던 기존의 면모를 버리고,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데에서 갱신과 신생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교무실에 나란히 꽂힌 검은 출석부,/ 그 정렬된 세계에서 이름이 사라졌어요/ 결석이나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누가 내 이름을 지웠을까요/ 모판 위의 모처럼 가지런히 박혀 있었는데/(…)/ 교실에서 쫓겨나면/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죠 모눈종이 위의 삶을/(…)/ 이름 밖에서 서성대는/ 아이 하나, 복도는 너무 길고 캄캄해요/ 누가 이 모눈종이 좀 치워주세요”(<누가 내 이름을>)

“처음엔 완강한 선 속에 갇혀 있었지요(…)빛은 가루가 되어 다른 빛과 몸을 섞어요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에 스며들어요 검은 개는 더 이상 검은 개가 아니에요 개의 털빛과 그 위에 내리는 빛이 만나 어룽거려요 희미해진 개와 고양이와 사람 들은 햇빛 속을 한가롭게 거닐지요”(<쇠라의 점묘화> 부분)

〈야생사과〉
〈야생사과〉
오래 입은 옷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갈아입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누가 내 이름을>에서 보듯 존재의 갱신을 향한 모험에는 불안이 따른다. 그러나 <쇠라의 점묘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불안은 자유로 건너가는 징검돌 구실을 한다. 등단 20주년에 맞추어, 앞선 시집으로부터 5년 만에 낸 이 여섯 번째 시집에서 시인은 거듭 갱신과 신생의 의지를 밝힌다. “나를 적신/ 모든 물이 양수였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갠지스 강가에서>)라든가 “나를 스르륵 지워버리고 싶어!/ 벗어나도 벗어나도 내 속에 갇혀 있는/ 나를 건져내고 싶어!”(<존 말코비치 되기>) 같은 대목들이 대표적이다.

변화를 향한 이런 욕구의 바탕에는 기존의 자아와 시세계가 딱딱하고 고집스러우며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것이었다는 반성이 자리잡고 있다. <심장 속의 두 방>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에서 “-나를 좀 지워주렴”과 “-나를 좀 채워주렴”이라는 상반된 주문이 되풀이되는 데에서 보듯 인간이란 다면적이고 때로 모순적인 존재이기도 한데, 그동안 자신은 너무 한쪽의 모습만을 고집해 왔다는 것이 시인의 판단인 듯하다.


그 결과 내면은 건조해졌고 문학적 생산성도 떨어졌는데, 마침 계기가 찾아왔다. 2007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이 그 계기였다. ‘시인의 말’을 들어 보자.

“내 안의 물기가 거의 말라갈 무렵 낯선 땅에서 물의 출구를 발견한 셈이다. 무수한 나를 흘려보내는 것이 첫 물줄기를 향해 거슬러올라가는 일이었으니, 경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와 기원에 대한 갈증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표제시 <야생사과>는 아마도 그때의 경험을 그린 작품일 것이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는데,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그 사과를 한 입 베어무는 순간,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야생사과를 먹는 낯선 경험이 존재의 갱신과 신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모호하면서도 신비롭게 그려졌다. 전화 인터뷰에서도 시인은 변화를 향한 적극적인 의욕을 드러냈다.

“20년 동안 시인으로 살아오면서 어느새 일정한 모습으로 굳어버린 자신에 대해 못마땅했어요. 변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긴 했는데, 어디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겠어요? 약간의 변화의 기미만 보여주었대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털고 나니까 시원하네요. 이제부터는 좀 더 자유롭고 달라진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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