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나의 이야기

[스크랩]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한적한길 2016. 3. 4. 22:47

 

 1. 구조주의와 무의식

 

데까르트의 cogito(나는 생각한다)를 벗어나는데 구조주의는 성립한다. 데까르트는 나와 세계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와 문명과 인간세계를 보지 못하고 나로부터 세계로  건너뛴다. 구조주의는 나의 명증적 의식이 인식의 바탕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을 형성하는 무의식이 인식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의식은 나와 타자들간에 얽혀진 그물조직 속으로 사라진다. 여기에 사회적 무의식이 있다. < 무의식은 집단적 사유의 범주다.> 무의식은 시간이 빠진 전체의 흐름이다. 무의식을 채우는 것은 시간이 들어가 있는 기억들이다. 무의식은 언어활동으로 이루어지며, 언어활동의 법칙은 유한하다. 무의식의 법칙은 언어학적으로 통사론적이며, 의미론적이 아니다. 의미는 다양하나 통사는 동일하다. 따라서 무의식은 동일한 보편성을 지닌다. 무의식은 자연의 언어요, 자연의 문법이며, 정신은 물질적 자연 법칙과는 다른 모습이다. 무의식은 상징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무의식의 상징적 언어는 언어의 개념(시니피에)이 아니라, 언어의 감각적 청각적 기능(시니피앙)이다. 무의식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우선하며, 상호주관성이 무의식의 원천이다. <무의식은 타인의 진술이다.> 사유가 나타난 책은 주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말을 한다.  사유는 규칙들의 놀이가 지배하는 인식성이다. 사유는 사유하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유를 지배하는 규칙들의 놀이가 중요하다. 사유를 지배하는 규칙들의 놀이는 시간적 연속성이 아니라, 시간적 불연속성에서 각 역사시대마다 지배적인 인식성이다. 구조주의에서 개인은 집단의 지배를 받는다. 개인은 개인으로서 느끼는 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관습과 외적 규범에 따라 행동한다. 개인의 투명한 의식을 결정하는  불투명한 집단적 의식이 무의식이다.

 

2. 구조주의와 언어

 

 구조주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언어활동과 기호체계의 법칙으로 이루어진 상징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려주려고 하는 일종의 방법론이다. 구조주의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며, 언어도 두 개 이상의 용어가 형성하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언어활동은 언어( la langue)와 말(la paroie)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는 사회적 제도이고, 말은 사회적 제도 안의 개인적 언어활동의 행위이다. 말은 개인에 따라 다 다르지만, 언어는 개인의 자유의사와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의 의사전달을 하기 위해 복종해야 하는 체계이다. 말은 시간적이지만, 언어는 시간적이 아니다. 말은 시간에 따라 변화가능하기 때문에 동시적이지만, 언어는 시간에 따라 변화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통시적이다. 구조주의에서 언어와 말의구분 뿐만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구분이 중요하다. 시니피앙은 기호의 표현적 측면, 청각적 영상의 측면이며,시니피에는 기호의 내용적 측면, 개념적 측면이다. 의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전 현정(시니피앙) 과 나의 작은 딸(시니피에)사이의 관계에서 나의 작은 딸을 지칭하는 전 현정이라는 의미가 생긴다. 언어는 의미와는 달리 차이에 의해 구성된 가치의 체계이다.   나의 딸은 다른 집 남의 딸과의 차이에 의해 다른 집 남의 딸 보다 나의 딸이 더 소중한 가치의 체계를 가지기 때문에 나의 딸을  다른 집 남의 딸보다 더 사랑함으로써 나의 딸은 가치를 가진 언어로서 나에게 중요하게 된다. 레비-스트로쓰는 신화 속에서  시간적 차원에 속하는 말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적 차원과는 무관한 언어로서의 기호체계를 중시한다. 기호체계는 독립적 의미실체가 아니라, 적어도 이항적 대립의 논리로 짜여져 있다. 나의 큰 딸은 나의 큰 딸만의 의미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딸과 나의 아내와 나라는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기능을 발휘한다. 결국 나의 큰 딸은 딸로서 홀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나의 큰 딸은 나의 작은 딸과 나의 아내와 나라는 가족의 사회구조 관계의 그물 안에서만 제약된 자유를 갖는다. 나는 나의 투명한 의식에 의해서 자유로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의 불투명한 사회적 무의식에 의해서 결정되어 행동하며, 나의 사회적 무의식의 구조가 언어활동이다. 언어는 나의 존재에 선행하며, 언어는 나의 의식에 선행하며, 언어는 나의 의식과 존재를 결정하며, 타자와 나의 언어는 나의 무의식이다. 나의 무의식을 조건지우는 언어에서 언어의 개념적 측면인 시니피에보다도 언어의 물질적 측면인 시니피앙이 훨씬 더 중요하다.  무의식이 말하고자하는  시니피에는 직접 나타나지 않고, 무수히 다양한 시니피앙들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감추고 있다. "내가 세금을 내는 것은 나라의 경제를 걱정해서이지, 내가 세금을 내지 않음으로써 위법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통을 걱정해서 세금을 내는 것은 아니다." 라는 주장에서 나의 세금을 내는 행위에서 시니피앙으로서 나타난 우국지사는 진짜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무의식의 시니피에를 위장하고 있다. 무의식에서 말하여지는 것과 의식에서 표현되어지는 것은 일치하지 않고, 무의식은 의식을 감추고 있으며,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를 감추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으로서의 시니피에가 작용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때 나의 의식으로서의 시니피앙이 아니라 나의 무의식으로서의 시니피에가 생각하고 있다. 시니피앙에 고정된 의미는 존재하지 않으며, 무의식으로서 작용하는 시니피에의 언어활동에 의해 의미는 부여된다. 이것이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무의식의 언어활동이다.

 

3. 구조주의란?

 

 나의 의식이 생각할 때 ,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무의식에 의해 지배 받아서 생각하고 있으며, 나의 무의식은  나와 타자들 간의 언어활동이며, 나의 언어활동은 개념적 시니피에보다 청각적 시니피앙에 의해 지배받고 있고, 나의 무의식의 언어활동은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 의해 지배 받는다. 따라서 나는 나의 자유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는 필연성에 의해 행동하며, 나의 의식은 사회적  경제적 구조에 의해 지배받는 사회적  무의식의 결정체이다.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 김 형효 저 참고>

출처 : 훗설과 쉘러의 현상학
글쓴이 : 전동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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