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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라캉의 주체개념

한적한길 2016. 2. 23. 23:46

라캉의 주체개념

 


1)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라캉 Jacques Lacan 1901-1981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에콜 노르말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에 의학으로 전향, 소쉬르의 영향 하에서 형성한 이론으로 구조주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64년 ‘파리 프로이트파’를 창설(80년에 스스로 해산). 그 이론은 프랑스 사상, 나아가 현대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는 “에크리” 등이 있다.


라캉은 그의 저서「로마 담론」(1953)에서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면서 프로이트가 초기에 관심을 두었던 언어를 강조한다. 그는 이 담론에서 말과 언어의 총체적 기능, 이른바 상징계의 기능을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개념들은 프로이트의 정신구조론과 비교하며 이해할 수 있는데, 라캉에 의하면 인간 정신은 독립되는 세 개의 상이한 평면, 곧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구성되며 이들은 비록 서로 연결되지만 상이한 기능을 지닌다.


상상계는 거울 단계에서 발전한 것으로 그 개념은 성인 주체와 타자의 관계로 확장되며, 환상, 이미지를 포함하는 세계이다. 상상적 관계의 원형은 거울 앞에 선 유아로, 이 아이는 거울 이미지에 매혹된다. 당대의 정신분석은 정신병을 질병, 예컨대 뇌손상 같은 질병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라캉에 의하면, 특히 에이메를 모델로 연구하면서, 정신병은 그녀의 삶에 나타난 사건들에 대한 그녀의 인성의 반동, 갈등으로 이해된다.

본명이 마그리트인 38세의 이 여자는 1931년 4월 18일 저녁 가방에서 식칼을 꺼내 여배우의 암살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만다. 그 해 6월 ‘해석 망상에 의한 체계적인 피해망상증, 과대망상적 경향과 색광적 기질도 보임’이라는 진단에 따라 그녀는 생트-안느 수용소에 입원한다. 라캉은 그녀를 1년간 만나면서 여성의 광기에 관한 자기 이론뿐만 아니라 환상과 가족에 대한 자신의 강박관념들도 함께 투사한다.


라캉에 의하면 에이메의 살인 의도는 자신의 망상을 외부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망상 체계를 파괴하는 행위인데 결혼 4년째부터, 특히 임신한 다음부터 옛 친구들이 자신을 비난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비판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첫 딸을 사산한다. 그 후 남자아이를 낳지만 그녀의 망상은 계속되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녀는 언니를 증오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어머니를 대신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태만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너무 민감한 성격으로 불안에 시달리고 남들을 의심하고 결국 언니가 어머니 대신 가사를 돌본다. 그녀는 언니가 어미이기 때문에 언니 증오에 실패하며 그녀는 모성애와 분노라는 양가심리(ambivalance)에 시달려 여배우를 공격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언니에 대한 양가심리를 반영한다. 왜냐하면 박해자를 증오함으로써 그녀는 직접적 증오 대상인 어니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자를 공격하는 것은 한편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고, 자신의 이상형을 공격함으로써 죄의식에 빠지고, 이 죄의식에 의해 망상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에이메와 여성 친구들의 이중적 관계는 거울 단계의 확장이고 그 구체적 양상이다. 이 상상계는 또한 전언어적 구조, 예컨대 유아, 정신병, 도착증 환자에게서 발견되는 원시적 환상들을 포함한다.


상상계와 다르게 상징계는 한결 포착하기 쉽다. 언어는 상징계에 포함되고, 라캉에 의하면 주체가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이 언어를 통해서이고 주체가 재현되거나 구성될 수 있는 것은 이 상징계를 통해서이다.


실재계는 가장 포착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죽음이나 성욕과 관계된다. 실재계는 주체 밖의 영역, 상징계 외부에 존재/부재하며 주체는 이 영역에서 해체된다.


2)나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한다.

라캉이 상징계를 강조하는 것은 환자와 분석가 사이에 두 가지 말, 곧 ‘공허한 말’empty speech과 ‘충분한 말’full speech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환자의 말은 진리에 닿을 수 없고, 환자의 말을 소재로 분석가가 상징계, 말하자면 환자의 개인적 역사, 가계, 사회적 환경을 제대로 구성할 때 환자에게 있어 은폐된 진리가 드러나고, 따라서 이때 그것은 공허한 말이 아니라 진리를 알리는 ‘충분한 말’ 이 된다. ‘충분한 말’은 환자가 은폐하는 진리를 드러내고, 은폐된 진리는 하이데거와 관계된다. 그 이유는 라캉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공론’Gerede과 ‘담론’Rede과 ‘공허한 말’과 ‘충분한 말’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담론’이 은폐된 존재의 노정이고 개시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1950년대 초 라캉은 레비-스트로스와 하이데거를 결합하면서 프로이트를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1955년 하이데거를 방문하면서 하이데거의 논문 「로고스」의 프랑스어 번역을 허락받는데, 라캉은 이 논문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언어관과 하이데거의 문체에 깊이 매혹된다. 헬라클레이토스가 강조한 것은 어떤 스승의 권위도 받지 않고 말하기이고, 주체가 표현하지만 주체 너머 있는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이 진리가 로고스, 언어라는 점이다. 이것은 라캉이 「로마 담론」에서 강조한 것과 일치한다.


라캉은 ‘공허한 말’과 ‘충분한 말’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other(타자)와 Other(대문자 타자) 개념을 사용한다. 주체의 진리는 자아ego 속에 드러나지 않고, 따라서 그 진리는 자아가 아닌 다른 곳, 대타자Other 자리에 나타난다. ‘공허한 말’의 경우 자아는 타자에 대해 말하지만 이 타자는 자아의 상상적 짝이고, 이 타자에 의해 주체가 소외된다. 그러나 ‘충분한 말’의 경우 주체는 대타자Other에게 말하고, 대타자Other는 자아의 말을 넘어서고, 대타자Other는 다른 곳, 꿈속에 있다. 이런 말의 주체는 무의식이기 때문에 무의식은 대타자Other의 담론이 된다.


라캉은 ‘공허한 말’을 극복하기 위해 상징계를 도입한다. 그에 의하면 소포클레스의 비극 「외디푸스 왕」의 주제는 외디프스를 존재케 한 담론, 언어, 싱징계에 대한 점진적인 해명이고, 그가 몰랐던 진리에 대한 점진적인 해명이다. 인간은 상징계에 들 때 비로소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 상징계에 든다는 사실을 모른다.


불교식으로는 인연(因緣)이다. 나는 없고 인연이 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역사를, 인연을 모르고 타인처럼 한 세상 산다. 이 타인이 나이고, 그러므로 나는 타인, 나를 모르는 헛것이다. 진리는 언어 너머에 있지만 언어에 의해 진리를 말할 수밖에 없고,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언어를 초월하지만 언어로 존재하고, 그것은 언어의 피안이지만 동시에 언어의 차안이다. 불교적 진리는 비유하면 실재계에 가깝지만 실재계도 아니다. 이 진리는 방법론적으로는 상상적 관계를 수용하고, 따라서 상징계와 실재계 역시 상상의 세계, 꿈, 환상이고 이 꿈의 주체인 본래 마음을 지향한다.

 


3)아이들의 실패 놀이


인간은 상징계, 언어의 세계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주체성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라캉은 우리가 최초로 상징계, 언어에 들어가는 것이 언제이며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라고 질문하며 프로이트의 「쾌락 원칙을 너머서」(1920)에서 해석하는 손자의 놀이를 보기로 든다.


18개월 된 아이가 실패를 던진다. 실패를 던지면 그 실패는 반동에 의해 되돌아오게 되는데, 아이는 실패가 멀리 가면 ‘오-오-오 o-o-o’라고 소리를 지르고 실패가 되돌아오면 ‘아 a’라고 소리를 지른다. 프로이트 의하면 이 소리가 ‘갔다’ fort와 ‘여기 da’ 라는 소리로 들린다고 해석한다. 프로이트의 해석에 따르면 어머니의 부재중의 아이의 실패 놀이는 몇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로 아이가 실패 놀이를 하면서 ‘오’, ‘아’ 하는 것은 어머니의 부재와 현존에 대한 갈등을 나타낸다. 둘째로 이 놀이는 고독 속에서 자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이다. 결국 아이는 어머니의 부재가 환기하는 고독을 견디기 위해 자신을 소멸시킨다. 셋째로 이 놀이를 통해 아이는 어머니와의 분리를 시도한다. 넷째로 아이는 수동적 경험(어머니의 부재)를 능동적 경험(실패 던지기)으로 전환하고, 끝으로 아이는 실패를 던지면서 ‘좋아 그럼 가! 난 엄마가 필요 없어/ 난 엄마를 던지는 거야’ 라고 어머니에게 복수한다.


라캉에 의하면 이 놀이는 첫째로 대립되는 두 음소, ‘오-오-오’와 ‘아’의 놀이로 드러나며, 아이는 부재와 현존 현상을 상징적 차원에서 수행한다. 말하자면 ‘오/아’라는 음소대립에 의해 상징계가 나타나며 동시에 아이는 이 상징계, 곧 언어 속에 탄생한다. 둘째로 부재로 구성된 현존인 낱말은 부재에 이름을 부여하고, 현존/부재의 대립을 통해 언어의 의미 세계가 태어나고, 이 의미 세계 속에 사물의 세계가 구성된다. 말하자면 언어가 존재하고 다음 사물이 존재한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오/아’라는 음소 대립 속에서이며, 이런 대립은 의미를 낳고, 따라서 아이의 놀이는, 아이가 오/아 하는 것은 이 의미, 언어, 상징 속에 그가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승훈은 문학 행위, 시 쓰기 역시 이런 놀이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왜 내가 시를 쓰느냐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왜 내가 놀이를 하느냐 라는 질문과 같다고 말한다. 최초의 말하기가 최초의 놀이와 통하고,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손자 놀이는 예술 행위, 시 쓰기의 알레고리이다.


결론적으로 이승훈은 첫째로 시 쓰기, 혹은 말하기의 원형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부재, 결핍, 고독을 견디고 극복하고 이기려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둘째로 시 쓰기는 실패 던지기/돌아오기처럼 언어를, 낱말을 던지는 행위이고 또한 언어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행위이다. 던지다/돌아온다는 자아포기/자아회귀를 표상한다. 나는 시를 쓰면서 나를 포기하고 동시에 나는 나에게 돌아온다. 셋째로 이런 포기와 회귀는 아이가 어머니를 포기하고 동시에 어머니를 갈망하듯이 상상계/상징계 갈등을 표상한다. 말하자면 시 쓰기는, 그리고 언어놀이는 라캉 식으로는 상징계에 들면서 동시에 상상계를 갈망하는 행위이고, 언어와 싸우는 행위이고, 이 싸움이 놀이가 되는 세계이고, 언어에 의해 소외되면서 언어를 향해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침묵의 소리이다.


4)도둑맞은 편지

라캉은 그의 논문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1966)에서 ‘상징계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명제를 예시하기 위해 포우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를 사용한다. 소설 속에서 편지는 이동하고 편지의 이동에 따라 주인공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말하자면 인물이 편지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가 인물들을 좌우하고, 이런 점을 라캉은 1955년 세미나에서 프로이트의 ‘반복 충동’ 개념에 의해 이른바 ‘의미작용 연쇄’signifying chain로 정의한다. 라캉은 억압된 무의식의 반복을 ‘의미 작용 연쇄의 고집’과 연결시킨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주체는 에고가 아니라 무의식적 주체이고, 무의식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 된다. 요컨대 편지, 문자, 언어, 시니피앙이 인간적 주체와 관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고 전환하고 치환하는 것은 무의식, 억압된 무의식 탓이고, 이 무의식이, 그러니까 편지가 인간들을 지배한다.

이 소설에는 두 개의 장면이 나오는데 첫째 장면은 궁정에서 발생한다. 왕비가 혼자 있을 때 편지(사랑의 편지로 생각되는)를 받지만 바로 왕이 들어와서 편지를 읽다말고 펼쳐진 채로 탁자 위에 놓는다. 그 때 장관이 들어오고 그는 왕비가 주소를 위로 하여 뒤집어 놓은 편지를 보고 그 필적을 알아차리고 왕비의 비밀을 알아차린다. 장관은 왕비가 보는 앞에서 그 편지를 자신의 것으로 바꾸고 편지를 들고 나간다. 둘째 장면은 장관 아파트에서 발생한다. 뒤팽이 장관을 찾아갔을 때 장관 역시 왕비처럼 자신이 안전하리라 생각하지만 뒤팽은 편지의 위치를 간파하고 다음날 전날 놓고 간 담배갑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트릭을 이용해서 장관이 모르게 편지를 바꾸어 유유히 나온다.


라캉은 이 이야기 속에 두 개의 장면이 있다고 해석한다. 첫째는 편지를 도둑맞는 장면이고 둘째는 첫째 장면을 반복하고 편지를 되찾는 장면이다. 첫째 장면에서 청장이 뒤팽에게 말하며 이들은 귀머거리와 정상인의 관계에 해당하고, 둘째 장면은 뒤팽이 화자에게 말한다. 첫째 위치에는 제3자, 왕과 경찰이 속하며 이들은 상황을 모른다/볼 수 없다. 둘째 위치는 도둑맞은 자, 왕비와 장관이 속한다. 이들은 제3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편지의 비밀에 대해 속인다. 셋째 위치에는 도둑, 장관과 뒤팽이 속하며 숨겨진 것이 노출된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것은 세 위치들에 인물들이 놓이게 되면 그 위치에 따라 인물들의 모습들이 변한다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이런 행위는 새로운 위치의 결과이며 왕비와의 나르시스적 동일시에 의한 상상적 간통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은 이야기 속에서 주체들이 편지의 단순한 경로에 의해 수정됨을 의미하고, 이들은 상호주체적 반복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치환되고, 이 치환은 도둑맞은 편지가 도달하는 장소에 의해 결정된다. 편지는 움직이는 시니피앙(기표)이고 각 인물들은 의미작용 사슬을 경과하면서 무엇이 발생하는가를 깨닫는다. 결국 라캉의 강조점은 그 내용도 모르고 누구에게서 왔는지도 모르는, 그런 점에서 순수한 시니피앙이 편지가 주체의 운명과 행위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정신분석에서 주체가 말하려는 것은 진정한 주체의 실현, 곧 주체에서 대타자로 가려는 것이지만 그는 상상적 관계에 빠진다. 따라서 진리는 언제나 도둑맞은 상태에 있고 주체는 언제나 이 도식의 네 항 사이에 표류한다. 요컨대 주체 구조의 기본은 상징적 대타자와 상상적 타자의 이중성이다. 이 이중성이 억압될 때, 진리의 자리로서의 대타자가 상상적 타자로 대치될 때 정신병이 발생한다.


5)시니피에, 주체는 계속 미끄러진다

인간이 편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가 인간을 지배한다. 말하자면 편지, 수신인도 내용도 모르는 편지, 그런 점에서 순수한 시니피앙, 상징계, 언어, 문자가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구성하고 인간의 운명과 행위를 결정한다. 그런 점에서 언어 혹은 문자가 중요하고, 문자의 권위가 중요하고 문자는 우리의 무의식이고 이 무의식이 간청하고 탄원한다.


라캉의 경우 문자는 언어에 의존하는 구체적 담론을 지탱하는 물질을 의미하지만 이 물질적 지주는 일상적 의미로 사용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처럼 물질적이지만 경찰의 눈에는 발견되지 않는 것, 따라서 권력 시니피앙을 뜻하고, 또한 주체가 구성되는 언어의 구조를 뜻하고, 주체는 탄생하기 전에 이미 언어 속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그가 태어나기 전 담론에 의해 그에게 배당된 장소를 뜻한다.


라캉이 강조하는 것은 이른바 알고리즘algorithm, 혹은 기본공식 이며 이는 소쉬르의 원리에 기본 토대를 둔다. 라캉의 공식 에서는 화살표와 타원형이 생략된다. 화살표의 생략은 아무 관계가 없음을 말하고 대립성, 대립적인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또한 타원형의 생략은 언어 기호가 현실과 독립된 실체, 자율적 실체가 아니라 반자율적 실체, 아니 언어가 현실을 구성하고, 언어가 현실이고, 이 언어가 인간을 구성한다는 뜻이다. 라캉의 공식의 또 다른 특징들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위치가 바뀌고 시니피앙은 대문자S로 시니피에는 소문자s로 표시된다. 이러한 위치의 변화는 기의가 기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기표가 기의를 지배한다는 뜻이다.

기표가 기의를 지배하고 기의는 기표의 운동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힘이 없고, 기표에 억압된다.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기표의 독립, 기표의 선재성(先在性), 문자의 지배성이다.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통합이며 그것은 어지러운 관념과 공허한 소리 이미지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라캉의 경우 기표와 기의는 하나로 통합되지 않으며 기의는 기표 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또한 소쉬르가 언어의 선조성을 강조함에 반해 라캉은 이른바 닻의 지점anchoring point, 고정점point de caption 누비점quilting point을 말하고 문자에 의해 주체가 태어난 것은 이때이다.


기의는 기표 밑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짐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주체에게는 이 미끄러짐이 잠정적으로 멈추는 어떤 부착점이 있다. 이런 고정점이 없거나 이 점들이 부서질 때 정신병이 발생한다. 그러나 고정점을 말 그대로 고정점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기표와 기표 사이에 존재하고 기표와 기표 사이에 기의가 고정될 때 잠시 섬광처럼 존재할 뿐이다.


6)환유적 주체 은유적 주체

라캉이 말하는 진정한 주체는, 곧 무의식적 주체는 두 기표 사이에서 나타나면서 동시에 사라진다. 따라서 주체의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고 주체는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다. 진리는 말할 때 행과 행 사이, 곧 고정점에서 계속 생산되고, 프로이트 식으로는 ‘주체는 말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진리를 생산하고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말한다.’ 라캉에 의하면 우리는 기표라는 나무 위에서 곡예하는 진리를 제대로 듣고 이해해야 한다. 진리는 기표와 기표 사이, 의미작용 사슬의 텅 빈 구멍에 존재한다. 주체는, 진리는, 우리는 거기 존재한다. 결국 주체는 이 사슬 속에 있고, 이 사슬이 주체이다. 주체는 그가 일부로 참여하는 이 사슬을 따라 이동하며, 그는 기의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로 작용하고, 따라서 주체는 존재의 결핍이고 하나의 공허로 존재한다. 이때 공허는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혹은 존재와 부재를 초월하는 그런 무(無), 불교식으로 공(空)을 표상하며 주체의 진리는 이런 미끄러짐의 과정 자체로 나타난다.


라캉의 연산식는 기의가 기표 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그것은 또한 기표가 다른 기표를 위해 주체를 재현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따라서 주체는 기표와 기표의 관계,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전자는 환유, 후자는 은유로 해석된다. 환유는 낱말과 낱말의 관계, 혹은 연결에 토대를 둔다. 은유 역시 단순한 유사성 관계가 아니라 두 기표의 결합으로 정의된다. 그는 초현실주의 시를 보면서 시들이 보여주는 창조점 섬광은 동일하게 작용하는 두 기표의 현존에서 나타난다. 그의 은유 공식은 ‘낱말은 다른 낱말을 위해 존재한다’ 이고, 시인은 이런 지속적인 흐름을 생산하고, 이런 흐름이 쾌락을 생산하고, 이런 흐름이 은유들의 황홀한 조직을 형성한다.


라캉의 환유적 구조를 도식화한다면 아래와 같이 표시할 수 있다.

이 도식을 분석하자면
①f S는 의미작용의 효과인 함수
②S----S'는 기표와 기표의 연결이며 생략부호는 대상관계에서의 기표의 존재 결핍을 표상
③등식은 합동을 의미
④오른쪽 등식의 막대기 ㅡ 는 기표와 기의의 환원불가능성, 의미작용에 대한 저항을 뜻함

정리하여 전체공식을 말한다면 기표와 기표를 연결하는 의미화 함수는 막대기의 유지와 합동하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이런 공식은 기표가 막대기를 건너지 못하고, 따라서 새로운 기의도 창조될 수 없다는 라캉의 명제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의는 언제나 결핍이다.


환유적 주체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기표와 기표 사이에 침묵으로 부재로 존재하고, 한편 기표는 기의, 곧 주체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 기표는 주체의 창조에 저항한다는 것. 그러므로 이런 기표는 다른 기표로 끊임없이 치환함으로써, 혹은 기표는 항상 다른 기표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욕망과 관계된다. 고로 욕망은 환유이고 주체는 욕망이다. 환유는 의미화 사슬에서 한 기표와 다른 기표 사이의 통시적 관계이며, 따라서 환유는 단 하나의 의미화 사슬에서 기표들이 연결/결합되는 방식(수평적관계)과 관련되고, 은유는 하나의 의미화 사슬에 있는 기표로 다른 의미화 사슬에 있는 기표를 치환할 수 있는 방식(수직적 관계)과 관련된다.
또한 라캉에 의하면 은유적 구조는 아래와 같다.

①fS는 의미작용의 효과이다.
②괄호 속 는 한 기표를 다른 기표로 치환함을 의미
③오른쪽의는 기표S와 기의s가 있고, S와 s사이의(+)는 소쉬르의 연산식에 나오는 막대가 ㅡ 를 건너는 것, 곧 의미의 출현을 뜻함
④기호는 합동을 의미한다.

전체 공식은 한 기표를 다른 기표로 치환하는 의미화 기능은 이 막대기를 건너지르는 것과 합동한다. 고로 라캉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비판한다. 문제는 나의 존재에 대해 내가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말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의 관계이다. 말하자면 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행위 속에 있다. 그러나 존재되기, 존재로의 생성에 헌신할 때 나는 이 과정 속에 있고,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나를 상실한다. 진리는 기의의 부재, 알리바이, 환유이고 기의 혹은 의미는 오직 은유의 이중 왜곡(+)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7)라캉적 주체?

라캉적 주체를 말하자면 첫째로, 영미철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개인적 주체 혹은 의식적 주체가 아니다. 의식적 주체는 의식적으로 사유함을 말하며 자아 곧 에고를 뜻하지만 라캉에 의하면 이런 자아는 거울 이미지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은 오인된 자아이다. 이것은 불교 용어로 아상(我想)에 지나지 않는다. 아상은 나라는 상,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내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오류임을 말한다. 라캉이나 불교나 자아를 이미지로 보는 것은 같지만 라캉은 정신분석을 강조하고 불교는 직관과 은유를 강조하는 점이 다르다.


둘째로, 라캉적 주체는 이런 발언된 주체가 아니다. 라캉은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 주체의 기표를 발언, 곧 말해진 것 속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문제는 발언의 주체로 재현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자아라는 점이다.


셋째로, 라캉적 주체는 진술, 담론, 말해진 것 속에는 없다. 그럼 어디 있는가? 그는 프랑스어 ne(=not) 에 관심을 둔다. 이 낱말은 고립되어 사용되는 경우 망설임, 모호성, 불확실성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이 낱말에 의해 화자는 그가 주장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그가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꾸로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원하는 것 같다.


라캉에 의하면 이런 ne, 영어로 but이 이른바 ‘말하는 주체’를 지시한다. 말하는 주체는 아니no 라고 말하며 혹은 ‘말하지 않음’no-saying을 말한다. 그러나 이 낱말은 말하는 자, 화자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화자에 대해 무언가를 말한다. 이런 화자는 결국 어떤 것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암시하는, 곧 어떤 사실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하는 양가적 화자와 통한다. 진술의 주체 ‘나’는 전환사이고, 메시지를 지시하는 코드의 요소이다. 그러나 낱말 ‘그러나’는 말하는 무의식적 주체라는 점에서 주체가 되며, 이런 사실은 주체가 의식/무의식으로 분열됨을 의미한다. 라캉은 이런 주체, 곧 말하는 주체를 타자 주체, 혹은 다른 주체라고 부른다.


넷째로, 이런 주체는 고정된 실체를 소유하지 않고, 그런 점에서 덧없는 주체이다. 라캉은 「도둑맞은 편지 세미나」에서 ‘기표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삭제한다.’고 말한 바 있고, 이것은 기표가 계속 다른 기표로 치환되는 현상을 암시하고, 따라서 무의식의 주체는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곧 자신의 말을 부정하면서 존재하고, 그는 그가 말하는 것, 곧 그의 위치를 삼켜버린다. 왜냐하면 그는 말할 때 나타나고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부정하고 이 부정을 통해 다른 것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기표는 무의식의 주체를 대신하면서 계속 사라진다. 이런 기표는 주체를 표상하지만 곧 다른 기표로 대치되고, 따라서 이런 주체는 사라지면서 존재하고 존재하면서 사라지고 그렇게 계속된다. 이런 주체는 유동하는, 덧없는 주체이다.


다섯째로, 이런 위반으로서의 주체의 정체성이 문제이다. 프로이트의 경우 최초의 정신 모델, 곧 역동적 모델에 따르면 의식은 무의식에 토대를 두며 무의식은 자체의 고유한 의도를 소유한다. 그러나 라캉은 무의식이 정상적인 말의 흐름을 혼란시킨다고 말하지만 무의식의 의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경우 무의식은 의식 혹은 주관성과 분리된 담론, 곧 대타자의 담론 속에 머물고, 허위의 자아에 기초한 자아 담론에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그렇다면 주관성이나 의도가 부재하는 무의식의 주체는 과연 누구이고 그는 어떻게 자리 잡는가?


여섯째로, 프로이트적 주체는 데카르트적 주체와 관련된다. 라캉에 의하면 데카르트적 주체 곧 사유 주체 cogito 역시 보이지 않고 일종의 카메라 섬광처럼 존재/부재한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적 주체는 ‘나는 생각한다.’고 스스로 말할 때 존재하면서 이때가 지나면 소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기 위해서는 ‘나는 생각한다.’ I am thingking 이고 계속 반복해 말해야 하고, 이런 반복이 중단되는 순간 그는 소멸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신을 도입한다. 그러나 라캉이 비판하는 것은 데카르트적 주체의 간헐성, 순간성, 소멸성이다. 데카르트적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고 말할 때 존재와 사유는 순간적으로 하나가 된다. 그러나 주체는 사유와 존재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사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이 둘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유와 존재 사이에는 공백이 발생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자아ego의 수준에 있다는 점이다. 이런 자아는 자신의 사유를 스스로 지배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떤 역겨움, 현기증, 구역질도 느끼지 못한다. 한마디로 이런 데카르트적 주체는 허위의 주체이다.


일곱째로, 결국 라캉이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한마디로 이 주체는 분열된 주체 split sbuject 이다. 주체는 곧‘ 나는 생각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주체는 분열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가 근본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은 자아 혹은 허위 존재는 무의식을 거부하고 한편 무의식 혹은 무의식적 사유는 자아의 견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런 순간적 분열은 언어가 생산하고 또한 우리는 언어 속에서 소외된다.


8)분열적 주체 너머?

라캉적 주체는 에고와 무의식이 분열되는 주체이다. 이런 주체는 말실수나 행동의 실수에서 알 수 있듯이 잠시 존재하거나 곧장 소멸하는 양상으로 존재하지만 이 주체는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혼란에 대해 책임을 지는, 그 혼란을 확증하는 주체이다. 왜냐하면 라캉은 ‘우리는 주체로서의 나의 위치에 대해 언제나 책임을 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분열된 주체는 소외된 주체이고 소외되었다는 점에서 이 소외를 극복해야 하고 소외 너머로 가야하고 소외를 초월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외의 극복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그 극복방법은 텅 빈 원을 지향할 때이다. 텅 빈 원, 분열적 주체 너머에 있는, 분열적 주체를 초월하는 이 원을 지향함이다.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나가라주나가 말하는 근본주체, 본주(本住)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나가라주나가 말하는 본주는 근본 주체, 곧 주체의 기초, 근원, 토대를 의미하고, 이때 주체는 주(住)이다. 주체가 주라는 말은 주체는 언제나 어떤 장소, 공간, 자리에 머문다는 뜻이고 인간이 머문다는 뜻이다.


사람은 사는 것, 삶, 생을 강조한다. 인간(人間)은 독립적인 개인 혹은 주체가 아니라 문틈으로 달빛이 스미듯이(間틈 사이로 月이 변형된 日이 암시하는 달빛)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고, 그 틈으로 달빛이 스미듯이 있는 존재, 있으면서 없는 존재이다.


본주(本住)는 사람의 근본, 인간의 근본을 의미하지만 사람은 삶을 의미하고 따라서 사람이란 말만 놓고 보면 사람의 근본, 뿌리, 토대, 기원은 없고 현상만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말은 죽음이 아니라 산다는 것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인간의 근본이라고 할 때 그 근본은 인간(人間), 곧 사람과 사람 사이가 되고 따라서 현상 자체가 아니라 현상을 구성하는 관계가 중시되고, 그런 점에서 구조가 중시되지만 한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인은 이른바 이데아에 해당한다.


결국 라캉이 강조하는 분열적 주체 극복, 그가 암시하는 원은 존재와 사유의 일치가 아니라 그 공백, 분열, 틈을 극단화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이 원은 존재/사유, 현상/이데아, 주체/본주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강조하는 게 아니다. 원은 안과 밖의 경계를 해체하고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해체하고 무슨 사물처럼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출처 : 목련꽃이 질 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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