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개인글

[스크랩] 한국불교 최초 교단분열

한적한길 2016. 9. 20. 16:34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교단분열

 

고려 광종 때 선종-화엄종 갈등 표면화

 

의천 스님 진영. 의천은 분열된 교단을 통일하고 왕권의 지배이념 강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훗날 그의 문도와 계승자간에 주도권을 둘러싼 분열이 일어났다.

법을 둘러싼 논쟁으로서의 법담을 넘어, 서로의 날선 대립각이 정치권력과 얽히면서 생겨난 교단의 분열과 분쟁사례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교파의 정치세력화와 세속화를 동반한 분열과 분쟁은 초기경전인 『법구경』에서 설한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 결코 풀어지지 않는다. 원한을 빨리 버릴 때에만 풀리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라는 가르침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치열하기도 했다.

 

한국불교에서 교단의 분열 역시 불교와 정치권력의 연관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불교는 고구려에 처음 전래될 때부터 왕법과 불법이 하나인 것처럼 됨에 따라 정치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백제에서는 정치권력과의 연관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을 정도로 직접적 관계를 맺었다.

 

신라 계율종으로부터 시작한 불교종파는 통일신라시대 들어서면서 화엄종과 법상종이 중심이 되었다. 통일신라 초기 최대 종파였던 화엄종은 고구려·백제의 귀족과 신라 귀족의 반목 및 나라 잃은 유민들의 포용문제 등 정치적으로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을 때 귀족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치유할 정신적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권력자들은 불법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승병을 양성하기도 했고, 승병은 불법수호를 넘어 국가적 목적에 동원되거나 귀족세력간의 정치싸움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한국불교에서 교단 갈등을 유발한 분열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왕건 시기엔 선종이 주류

화엄종을 중심으로 한 교종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정치권력과 유착관계를 강화하고 있을 때 선종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9세기 들어 교종사찰에서 기반을 닦은 선종은 9세기 중엽 중국의 회창폐불 이후 유학승들의 귀국이 본격화되면서 구산선문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지눌 스님 진영. 지눌은 종파간 분열이 심각해지고 교단이 부패하자 이를 바로잡는 것은 물론 불교쇄신을 주창하며 정혜결사문을 발표, 결사운동을 벌였다.

 

선종은 교종이 중앙 정치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기반을 다진 것과 달리 지방호족들의 비호를 받게 됐고, 신라 왕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후 왕건, 견훤 등의 새로운 세력과 서서히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선종과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던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세웠다. 불교를 신봉했던 왕건은 이때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이라 할 수 있는 ‘훈요십조’에서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은 것이므로 선·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보내 분향 수도하게 하라”고 숭불을 표방하면서도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탁을 따르게 되면 각 종파가 서로 사찰을 뺏는 다툼을 벌일 것이니 이를 엄히 금하라”며 불교를 국가가 직접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어쨌든 고려초기에는 개경의 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의 영향으로 선종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왕건은 지방으로 분산돼 독자적 기반을 갖춘 각각의 불교세력을 종파로 인정했고, 개경에 각 종파의 근거를 마련해주면서 불교의식을 분담시키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선종과 교종의 분열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고려 광종 시기에 이르러 교단 분열이 수면위로 부상하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광종은 왕실의 왕권 강화 정책을 펴면서 지방 호족세력의 이념적 기반이자 태조의 후광을 받았던 선종을 버리고 화엄종을 택했던 것. 그리고 왕권강화 정책으로 과거제도를 실시면서 승과를 개설해, 승과의 선발 기준으로 균여의 화엄학을 채택했다. 여기에 균여 역시 화엄종의 남악파와 북악파의 갈등을 해소해 통합된 지배이념으로써 광종의 왕권강화 정책을 도왔다.

 

때문에 지방호족 세력과 친분을 맺고 있던 선종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외면당하면서 전면에서 물러나 와신상담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불교사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교단분열상은 이렇게 왕권과 직접적으로 연계돼 있었다. 이후 고려초기를 지나 중기로 접어들면서 화엄종과 법상종이 왕권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위세를 떨치던 시기, 지방의 호족세력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던 선종도 서서히 왕권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기득권을 지키려는 교종과 새롭게 왕권에 다가서려는 선종은 상호 대립과 분열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각 종파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시기 불교는 정치적 관계에서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을 받았던 화엄종과 왕실의 외척 및 문벌의 지원을 받았던 유가종, 그리고 지역토호와 하급관리의 지원을 받으며 새롭게 왕권에 다가서는 선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태조가 훈요십조를 통해 말했듯, 왕권을 가진 입장에서는 교종과 선종의 분열이 통일된 지배이념을 실현하는데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각 종파의 융화를 바탕으로 한 지배이념의 통일화가 필요했고, 왕자 신분으로 출가한 의천(1055~1101)은 이같은 필요사항을 충족시킬 적임자로 떠올랐다. 왕자가 승려의 지도자가 됨으로써 불교세력을 적당히 통합하고 왕권의 통제아래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합 나섰던 의천 제자들도 분열

송나라에서 천태학을 익힌 의천은 천태종을 창립해 불교교단을 재편하고 선교의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는데 나섰다. 의천은 천태학의 회삼귀일을 이념으로 활용했고, 1101년 뛰어난 학승 100명을 봉은사에 모이게 해서 승과를 통해 40명을 선발했다. 그러나 이때 천태종의 승과 이후 의천이 입적하면서 그의 문도와 계승자간에 주도권을 둘러싼 또다른 분열이 일어났다. 선봉사의 대각국사 비문에 법안 종풍의 5산문도가 제외된 이유도 이때의 분열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문도 의천 사후 무려 36년이 지난 시기에 그것도 의천의 자취가 없는 선봉사에 세워졌다. 의천이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종파의 고착화에 기반한 분열상을 해소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려중기를 지나면서 교종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문벌의 시대가 지고, 무신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교종이 위기를 맞았다. 무신정권과 교종은 불편한 관계를 형성했고, 최충헌은 선종세력을 중심으로 불교계 재편을 시도했다. 때문에 12세기말에서 13세기초까지 불교계는 급격한 변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변화는 국사(國師)와 왕사(王師)를 책봉하는데 있어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국왕의 입장에서는 국사나 왕사를 매개로 불교계의 지지여론을 흡수하여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2세기 전반에는 문벌출신의 교종 승려가 국사와 왕사 자리를 독점했고, 무신정권이 들어선 12세기 후반에는 선종 출신의 국사와 왕사가 책봉됐다. 그리고 교종의 쇠퇴는 곧 군소 종파의 성립으로 이어져 교종에 가까운 지염업, 율업, 분황종, 소승업 등의 종파가 형성됐다. 물론 여기에는 교종의 분열을 염두에 둔 무신정권의 정책적 고려도 작용했다.

 

고려 후기 불교 종파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무신의 난 등 정치적 변동을 거치면서 더욱 세속화됐다. 불교계 제 종파가 이처럼 각각 왕권, 문벌, 지방 호족 등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본연의 자세를 상실한 채 타락해갈 무렵 등장한 인물이 바로 지눌(1158~1210)이다.

 

지눌은 1190년 정혜결사문을 발표하면서 불교계 현상을 비판하고 불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다. 지눌에게 부여된 시대적 과제는 분열된 승단을 통합하고 승려의 도덕적 타락과 잘못된 수행풍토를 바로잡는 것이었던 셈이다.


지눌은 이에 따라 결사공동체인 정혜사를 세우고, 교종인 화엄종의 이론을 선종의 수행에 연결시킴으로써 분열된 불교계를 통합하려 노력했다. 즉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괄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천태종의 요세(1163~1245)도 1208년 보조선에서 천태교관으로 사상을 전환하고, 1211년 만덕산에 사찰을 세우고 백련결사를 시작했다. 요세가 훗날 이런 저런 이유로 정치권력에 밀접해지기는 했으나, 지눌과 요세 모두 고려후기에 교단분열을 해소하고 타락상을 바로잡는데 기여했던 인물들이다. 

 

일제시대 승려들의 친일행각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30본산 주지들이 불교개혁을 주제로 각황사에서 회의를 열고 있다. 사진=민족사 간행 한국불교 100년.

 

고려 말기인 공민왕 시대에는 신돈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또다시 선종을 밀어내고 화엄종의 천희를 국사로 책봉하는 등 선종계열과 신돈의 분열이 두드러졌다. 공민왕 초기 왕사로 추대돼 분열됐던 선종 각파의 통합을 꾀했던 보우(1301~1382)는 승직임명권을 갖게 됨으로써 고려불교 전체를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신돈이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왕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왕에게 그를 멀리할 것을 주청하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자연스럽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고려말 신돈은 선종 배척 일관

고려시대가 마감되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가 열리면서 불교계는 분열하고 다툴 사이도 없이 존폐의 기로에 서게됐다. 다만, 조선후기 들어 백파와 초의 사이에서 고려시대 보여줬던 권력투쟁 양상의 분열이 아닌 법담의 한 양식으로 볼 수 있는 ‘선 논쟁’이 벌어져 주목을 끌었다.

 

백파는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의 3종선을 주장하면서 의리선을 가장 하급선으로 보는 한편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초의는 여래선, 조사선, 격외선, 의리선에 대해 『선문염송설화』를 지은 귀곡각운의 설을 인용해 의리선과 격외선, 여래선과 조사선, 활인검과 살인검, 진공과 묘유의 네 가지 측면에서 백파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리고 백파의 견해대로라면 세존이나 혜능도 도를 깨치지 못한 인물이라고 논박했다. 이후 백파와 초의의 문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때가지 한국불교사에서 보기드문 신선한 논쟁이자 분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암울했던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대에 이르러 적지 않은 수의 친일파가 등장하는 등 분열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1945년 광복기에는 혼란을 틈타 종권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이후 불교교단은 비구와 대처간 피를 부르는 이른바 정화시기를 거쳐 종권을 향한 분열과 분쟁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근현대 비구·대처 절 뺏기서 종권분쟁까지 치열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 강행에 맞서 불교개혁을 기치로 내세운 개혁회의는 종교문제에 간섭하는 공권력과 대치하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불교는 진리를 놓고 그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소모적인 다툼에 매달려 분열로 치닫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1954년 정화운동 이후 한국불교는 무려 40여건의 크고 작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지난 반세기 동안 불교계의 관심은 ‘잿밥’에 치우쳐 있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는 “불교 종단 또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향할 뿐,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영역에 속하는 곳이기 때문에 대립과 갈등이 밥 먹고 숨쉬는 일처럼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스님들이 운영의 주체격인 종단 역시 사람 사는 세상에 있으니 다툼과 대립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원인이 불법(佛法)에 있지 않고 이권과 세력다툼이며 갈등이 결국 폭력으로 발전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60년대 종정·총무원장 동반퇴진

한국불교는 해방시기 이후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불교정화 과정에서 심각한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색불교의 청산, 청정수행가풍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갖고 시작된 비구 측과 대처 측의 갈등은 상호 사찰을 뺏고 빼앗기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비록 정화가 비구 측이나 대처 측 모두에게 생존권이 달린 일이기는 했으나, 결국 승자인 비구 측 역시 상처투성이 영광만 남았을 만큼 정화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남겼다. 즉, 권력과의 밀착을 비롯해 삼보정재 탕진 그리고 무자격 승려 양산 등의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진행된 비구-대처간 다툼에서 열세에 놓였던 대처 측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퇴진하자 반격에 나서면서 분규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이 불교분규를 수습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1962년 1월 18일 비구 측과 대처 측은 문교부에서 만나 불교재건위원회 결성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해 3월 문교부 주선으로 열린 재건비상종회에 대처 측이 불참한 가운데 15인 위원회를 구성해 새로운 조계종 종헌을 공포하면서 양측은 분열을 봉합하지 못한 채 대립과 분열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비구와 대처의 다툼은 사회법에 호소하는 소송과 사찰접수 시도 등으로 이어졌다. 60년대 양측의 소송과 사찰접수 시도는 1963년 흥천사 사찰 점유권 다툼을 비롯해 1964년 대처 측의 종헌 무효소송과 1965년 비구-대처간 ‘종헌 및 종정추대 무효 확인 소송’ 공방으로 이어졌다. 또 1967년 비구-대처 통합논의가 불발되는 와중에 종정 청담 스님과 총무원장 경산 스님간 대립으로 양측이 동반 퇴진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은 종단의 모든 권력이 종정에게 집중된 최초 종헌이 원인이 됐다. 종정은 인사와 재정에 관한 전권을 가진 반면에 총무원장은 종정을 보좌하는 역할에 그치도록 한 것이 화근이 됐던 것. 이같은 종헌은 비구와 대처의 분규 와중에 종정을 비구 측이 맡기로 하면서 종정에게 모든 권한을 몰아주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었기에 결국은 자승자박한 꼴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종정의 권한에 비해 뚜렷한 권한을 갖지 못했던 총무원장이 반발하게 됐던 것이고, 이는 곧 비구 측 내분 양상을 띠면서 가열되다가 결국 모두가 퇴진하는 사태로 일단락하게 된 것이다. 어쨋든 한국불교계는 67년 조계종 종정과 총무원장이 동반퇴진하는 사태를 겪은 이후에도 분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1968년에는 비구와 대처 측이 동국대 총장 후임 인사를 놓고 다시 불화를 겪었고, 대처 측은 불국사 부정 및 난동 사건 등 비구종단의 부패상을 공격했다. 이어 1970년에는 내장사 명도 집행에 항의하는 대처 측의 할복 소동이 있었고, 대처 측은 결국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해 문교부에 등록하면서 비구 측과 결별했다.

 

70년대와 80년대엔 총무원 양분

그러나 양측의 대립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며, 비구 측은 또 다른 내부 분열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1971년에는 동화사 승려가 부패에 항의하는 뜻으로 조계종 총무원에 뱀이 담긴 소포를 보내기도 했고, 1974년에는 중앙종회에서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는가 하면 불국사에서는 주지 자리를 놓고 분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어 1975년에는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과 교무부장 그리고 수종사 주지가 사기혐의로 구속 된데 이어 관음사 대성암 토지부정사건으로 총무원장이 구속되면서 집행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처럼 종단이 어수선한 가운데 종정중심제로 종헌이 개정되고, 김대심 등 20여 명의 승려가 총무원을 강제 점거해 종권 탈취를 기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종정중심제를 주장하는 총무원 측과 종헌종법개정을 요구하는 재야 측이 대립하면서 집행부 참여 없이 제49회 임시종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종정추대취소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종정은 비상종령 제37호로 중앙종회 해산을 명령하면서 끝간데 없는 대립으로 치달았다. 결국 양측은 종정 측의 조계사 총무원과 종회 측의 개운사 총무원으로 양분되고 말았다.

 

조계사와 개운사 양측 총무원의 분열은 1980년 개운사 측이 법적 다툼에서 승소하고 양측이 총선거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됐으며, 이때 제17대 총무원장에 송월주 스님이 당선됐다.
불교계의 6·70년대 분열은 80년대 들어 종식되는 듯 했으나, 계엄군의 10·27법난 사건 자행으로 또 다른 분란의 씨앗을 낳게 됐다. 조계종은 81년 1월 총무원장 중심제로 종헌을 개정하고 사법기능을 갖춘 호계위원회를 신설해 3권 분립의 모양새를 갖췄다. 이후 80년대는 실권이 사라진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이 아니라 종단 대표자인 총무원장과 대의기구인 종회의 대립이 분열의 주된 현상으로 나타났다.

 

당시 총무원장과 종회의 분열은 총무원이 주요사찰예산조정안을 신설하고 직영사찰관리법 등 재정과 인사권에 관한 세력간 알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종단 중앙권력기관간의 다툼은 1983년 신흥사 살인사태로 파국을 맞았다. 1983년 8월 6일 신임주지로 부임하기 위해 신흥사에 들어가던 전 총무원 규정부장 일행 14명이 신임주지 부임을 반대하는 신흥사 측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 것. 이에 정부는 불교계 정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게 됐고, 같은해 9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98년 다툼은 해외언론도 대서특필

이때 승려대회에서 비상종단운영회의가 설치됐으나, 총무원장 권한 강화와 본말사 폐지 등 중앙집권제 제도개혁안을 담은 새 종헌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비상종단운영회의는 1년여만에 좌초됐다. 그리고 1986년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들어섰다. 1962년부터 시작해 1986년 서의현 총무원장이 취임할 때까지 24년간 무려 25명의 총무원장이 교체되는 바람잘 날 없는 시절을 살아온 조계종의 상황을 고려할 때 서의현 원장의 취임과 순항은 언뜻 종단이 안정된 시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1998년 조계종 종권다툼에는 건장한 용역업체 직언들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양측의 폭력을 동반한 싸움은 해외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불교의 신뢰도를 한 없이 추락시켰다.

 

그러나 조용한 조계종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8년 총무원장 중심제 종헌종법 개정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강남 봉은사에 또 다른 총무원 현판이 내 걸리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조계사에 사무소를 둔 기존의 총무원에 강남 봉은사에 사무소를 둔 강남 총무원이 생기면서 소위 강남북 양 총무원 시대가 열린 셈이다. 양측은 1992년 정부 중재로 원로회의 주도의 개혁안 마련을 결의하면서 양분 사태를 마감했다.

 

하지만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이 종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선을 강행하면서 이번에는 구종차원에서 출·재가를 아우르는 개혁의 깃발이 올랐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가 결성돼 조계사에서 구종법회을 열었고,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해 총무원을 점거하면서 개혁회의가 출범했다. 개혁회의는 종회 권한까지 이양 받으며 종단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불태웠고, 선거를 통해 송월주 총무원장이 당선되는 과정까지 종단을 이끌다가 해체했다.

 

그러나 수많은 불자들의 열정이 담긴 개혁종단 출범에도 불구하고 1997년 불교방송에서 공금횡령사건이 터지고 일부 종회의원들이 총무원 불신임 성명을 발표하는 등 조계종은 바람잘 날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8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서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여부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 개혁과 종헌종법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운 양측의 갈등은 다시 한번 폭력을 동반한 종권 다툼으로 비화됐다.

 

당시 사태는 공권력이 투입돼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고 있던 정화개혁회의 측을 강제 해산하면서 종식됐으나, 그 후유증은 상당기간 지속됐으며 CNN 등 해외 언론에까지 대서특필되면서 불교에 대한 세간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국불교, 특히 그 중심에 선 조계종의 근현대사는 이렇듯 분열과 분쟁의 연속이었다. 학자들은 조계종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분열상과 관련해 “종단의 출발부터 분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비구와 대처의 다툼이 있을 당시 비구 측을 승리로 이끄는 일이 급선무가 돼 방법에 대한 불교적 성찰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결과”라는 설명인 것이다. 조계종이 지금이라도 심도 깊게 되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출처 : 문화재 사랑
글쓴이 : 나정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