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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민기

한적한길 2016. 7. 21. 09:50


홍수처럼 번져 온 노래 - '아침이슬'.. 김민기

                                                                 





문화적 대안의 제출자

그가 우리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에 이 땅에 처음으로 기성세대와는 구분되는 청년의 문화가 소위 '통기타 문화'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을 때, 낭만적인 혁명을 꿈꾸었던 청년의 문제의식을 대변했었던 '아침이슬'이라는 '포크' 장르의 한 노래가 그 시발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서 조직적인 변혁운동이 전개되기 전부터 그는 마당극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90년대는 '록 뮤지컬'로 그 문화적 반경을 확장한다. 이렇게 그는 시대를 앞서서 문화적 대안을 제시하는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개항 이래로 외국의 수입이 ‘비판적 수용과 재창조’가 아니라 '패션의 추종과 소비'의 연속이었던 문화수입의 역사 속에서, 패션으로서

문화를 소비하고 또 다른 패션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정리가 필요 없는 몰역사적인 나라에서,

현재의 유행과 관련되지 않은 문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예 '문화적 국외자'로 취급하면서도 '문화의 세기'를 부르짖는 '비문화적인' 나라에서

'김민기'라는 문화적 코드가 제 대로 읽히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밖에 없는 한 어렵더라도 정리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 연구자의 운명일 것이다.

그가 거둔 전체의 성과에 대한 정리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음악의 분야에 한정해서 얘기를 해 보자.


한국 대중음악사의 첫 번째 얼터너티브

한국에서 통기타음악을 이야기할 때 항상 김민기는 먼저 언급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대중음악의 거물급인 신중현이자 조용필처럼 많은 음반이 있는 것도 아니다.

통기타음악을 담은 그의 정규음반은 단 한 장이 있을 뿐이다.

(78년의 "공장의 불빛"은 불법으로 배포된 카세트 테이프였고 93년에 나온 4장의 음반은 과거의 곡들을 정리한 것이므로 제외한다면). 이 단 한 장의 음반으로 그는 70년대의

통기타 혁명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으며 아주 고가로 그곳도 비밀리에 거래되는

음반수집가들의 표적음반이 되었다.

이것이 발표되던 71년도의 상황을 보자. 60년대 후반까지는 여전히 이미자, 남진,

나훈아에 의한 트로트와 현미, 최희준, 패티김 등의 미8군 출신의 스탠더드 팝이

대중음악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64년에, '에드 포'를 결성한 이래 고전을 면치

못하던 한국 록의 시조인 신중현은 68년에 이르러서야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으로 그 포효를 터뜨린다. 하지만 아직 일렉기타의 왜곡된 소리가 청년들의 음향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유행을 추구하던 청년들의 집결지였던

무교동과 종로의 음악 감상실과 YMCA회관에서 67년부터 트윈폴리오, 양희은, 서유석, 투코리언스, 쉐그린 등이 모습을 드러냈고, 69년 9월에 한대수



가 남산의 드라마 센터에서 본격적인 한국 통기타음악의 탄생을 알리는 공연을 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부 마니아급의

청중들과 통기타음악가들에 의한 통기타음악의 향유였고 아직 전체의 청년으로 확산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이런 국지적인 움직임은 70년에 결성된 남녀 혼성 듀엣 '뚜와에무아'와 '라나에로스포'

그리고 여자 솔로 은희가 71년에 속속 음반을 발표하여  방송이라는 대중매체를 장악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서를 대변할 새로운 음악을 갈망하던

당대의 청년들을 사로잡으며 전체의 대중음악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이들 오디오 스타들의 통기타음악은 6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된 모던포크의 외면적 양식만 빌린 청춘남녀의 사랑노래에 머물고 있었고

(실제로 이 당시 발표된 음반의 반 이상이 외국 포크의 번안곡으로 채워져 있었으며 또한 영어로 부른 곡도 있었다)

한국화된 통기타음악어법의 모색이라든지 더구나 미국 모던포크의 중요한 줄기인 사회비판적 통기타음악은 서유석에 의해

겨우 그 초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71년에 김민기가 발표한 음반은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던지는 엄청난 문제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전까지 한국 대중음악은 고단한 삶에 지친 대중을 위로하거나 그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차원에 머물렀지만 그의 음반은 유신치하의

개발독재 시대를 살아가는 억눌린 한국 청년 지식인의 내면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사랑 노래로 일관되던 당시의 통기타음악에 대한 대안적 시도였으며, 한국의 대중음악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사회적 발언으로서

위안과 오락이라는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집단적 무의식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의 음악에서 보여준 음악어법은 개항 이후 이 땅을 지배해왔던 서구의 고전음악과 미국의 대중음악을 한국인이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미국 모던포크의 모방으로 점철되던 당시의 한국 통기타음악에 대안의 제시였다.

통기타음악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 음악으로 표현될 때 생명력을 갖는 음악이므로 지신의 곡을 스스로 짓는 능력이 요구된다.

김민기에 이르러 작사, 작곡, 노래, 연주를 겸비하는 싱어 송 라이터의 전범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의 통기타음악은 한대수와 더불어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음악으로 발전하며,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자신의 창작곡으로 채워진 앨범의 시대를 열게 된다.

그는 한사코 사회성이 있는 음악, 저항적인 음악, 운동적인 음악은 만든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적어도 자신의 사고체계 내에서는

그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유신치하의 70년대에 들어 자신들의 문화적 지분을 획득하면서 유신체제 반대운동과 더불어 사회적, 정치적

각성을 해나갔던 70년대의 대학생들은 비록 은유적이고 암시적이었지만 김민기의 통기타음악을 자신들의 세계관을 담은 음악으로 채택한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창작자의 본의와는 다르게 수용자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재해석되고 적극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최초의 예가 된다.

그의 일관된 부인은 이런 수용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역설인지도 모른다. 이런 중요한 의미들과 함께 그는 통기타 문화의 상징적이고도

핵심적인 인물로 자리매김되며 그의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사의 첫 번째 얼터너티브가 된다.


두 번째의 반란 "공장의 불빛"

음반을 발매한 이후 가수 및 작곡가로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던 71년 겨울 무렵에 그는 70년대의 문화적 대안을 모색하던 모임에서 김지하를 만나면서 그의 문제의식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후 카톨릭권에서 문화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73년에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에 참가하면서 78년에 양희은의 음반에 수록되는 '금관의 예수'를 작곡한다.

한편 그가 본격적으로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작곡가 이종구와 김영동을 만나면서부터다. 이종구의 작품을 국악기와 기타반주로 편곡하여 무대에 올리곤 했는데 여기서 기타의 편곡과 연주를 맡으면서 그는 국악어법과 만나게 되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어 74년에 한일관계를 기생관광에 초점을 맞추어 풍자한 이종구의 소리굿 "아구"에 참가하면서 그의 관심은 음악과 극이 만나는 장소로 서서히 이동하게 된다.

74년 군에 입대하여 운동권 가요 작곡자로 본의 아니게 지목되어 약간의 고초를



겪은 후 77년에 제대해 보니 자신도 모르게 대학가에서는 투사로 변신되어 있었고 정부로부터는 사찰인물이 되어 있었다.

할 일도 갈 곳도 없던 그는 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고 거기서 그는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체험할 수 있었다.

당시의 한국의 통기타음악가로서 국악의 경험을 한 것도 유례없는 일이었지만 노동자적 삶을 체험한다는 것도 김민기가 아니면

겪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의 대중음악가로서 첫 번째 얼터너티브였던 그에게 주어진 이런 고난의 삶의 역정은 필연적으로 두 번째의 반란을

준비하는 과정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겪고 78년에 드디어 두 번째의 문제작인 "공장의 불빛"을 제작한다.

이것은 70년대의 대표적인 노조 탄압사례의 하나인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노래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한국교회사회 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하지만 불법으로 제작된 카세트 테이프로 보급되었다.

이것은 여러 모로 71년의 1집에 비하면 질적인 비약을 이룬 것이었다. 1집이 공륜이라는 공식적 검열기구를 거친 정상적 음반시장내의

상품이었다면, 이것은 불법으로 제작되어 비공식 경로를 통해 유통됨으로써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최초의 시도가 되어

이후 80년대의 노래운동에서 독립적인 생산‧분배 시스템의 원조가 된다.

1집 발매시 그는 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선택받은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이라는 지식인에 속해 있었고 음악도 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음반이라는 테두리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기득권을 빼앗기고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상태에서 막가파적 심정으로 음반이나 공연 등

어떤 전제나 구속도 없는 상태에서 제작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게 된다.

그래서 그는 3분내의 서정적 양식이라는 음반의 한계를 일련의 사건이 음악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는 40분짜리의 서사적 양식으로 전환함으로써

확장한다. 또한 그 동안의 음악적 경험이 반영되어 모던포크, 클래식, 국악, 구전 잡가 등의 다양한 음악어법이 총망라된다.

이런 내용을 담은 그의 음악은 75년 '대마초 사건'으로 초토화된 대중음악계에 갑자기 등장한 팝트로트와, 사회비판적인 통기타음악을 들어낸

대학문화를 순치시키기 위해 시작되었던 관제화된 대학가요로 장악된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김민기가 자신도 모르는 채 불쑥 저지른 두 번째의

대안의 제시였다.


한국 통기타음악에서 김민기의 업적



대중음악은 가사(문학)와 음악이 결합된 그 무엇이다. 따라서 대중음악의 가사가 음악으로 불릴 때에는 그것이 그냥 시나

산문으로 읽힐 때와는 달리 음악과의 호흡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특히 통기타음악처럼 단순하게 간단한 기타 반주와

노래로 구성이 될 때는 가사와 음악과의 결합이 노래의 성공

여부에 중요한 변수가 됨은 물론 미국에서 들어온 음악인

모던포크 한국에서 자생성을 갖고 계속 발전할 수 있느냐를

재는 척도가 된다. 70년대 초반까지의 통기타음악이

외국음악의 번안 때문에 한국어 사용의 어색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적극적인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음에 비해, 그는 아름다운 한국어를

적절한 선율과 화성 속에서 구사해 내는 본능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다.

71년에 발간된 그의 음반은 이후의 통기타 음악가들에게

한단계 더 발전한 통기타 음악으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다.

(이 부분을 설득력 있게 밝혀내기 위해서는 문학, 언어학, 음악학의 학제간 연구가 필요하므로 현재 초기 단계의 연구 수준에서는

그렇다는 감만 잡고 언급하는 형편이다.)

두 번째의 업적은 그의 기타 연주에 들어 있다. 그 당시의 기타 연주는 몇 개의 간단한 코드를 스트로크로 치거나 아르페지오로 연주하는 것으로서

연주라기보다 '반주'의 수준이었다.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통해 기타를 독학으로 익혔던 그는 단순한 반주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아르페지오 반주에 선율을 넣음으로써 단순한 코드 위주에서 프레이즈가 드러나는 연주의 형태로 전환했다.

1집의 '친구'에서 그가 연주하는 하나의 기타는 마치 피아노가 반주와 대선율을 동시에 연주하듯이 연주하는 형태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80년대까지 대학가에서 수준 높은 연주의 전형이 되었다.

71년의 양희은 1집 음반의 '아침이슬'에서는 김민기가 클래식 기타를, 이용복이 12현기타를 치는데 김민기의 기타는 '친구'와 같은 형태로

연주하고 이용복의 기타는 노래의 프레이즈 사이를 경과적 선율로 연결시키는 연주를 함으로써 김민기의 연주와 훌륭한 합주를 이루어

한국 통기타음악의 기타 연주를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다. 이와 같이 김민기의 통기타음악은 그의 독자적인 기타 연주가 주를 이룰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데 비해 그의 첫 음반은 정성조가 재즈풍의 연주로 세션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음악적 의도를 방해하게 되었음은

애석한 일이다.


김민기의 음악언어

한 대중음악가의 음악세계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음악세계를 둘러싼

음악사회학적 조명과 그것이 그의 음악세계 내부에 작용하여 이루어진 결과

모두를 유기적이고도 균형있게 다루어야 한다. 김민기의 음악사회학적인 조명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음악세계 내부에 대한 조명은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물론 이 현상이 김민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 전체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한국 대중음악의 첫 번째 얼터너티브에 해당하는 음악가에

대한 대접치고는 너무 소홀한 감이 있다. 그의 음악세계 내부를 조명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충분하지 않고, 복잡하고도 전문적인 얘기를 하기에 지면의 제약도 있으므로 그가 사용했던 음악언어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 보겠다.

그가 제일 처음 접한 음악은 서구 고전음악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전공했던

누나의 연주를 늘 들었고 고등학교 때는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사용해 기타를

독학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피아노라는 것은 서구 고전음악의 미학과 이상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악기이다. 따라서 그 연주악보는 화성학과 대위법을

기본적인 음악어법으로 사용하여 구성된다. 그에 비해 기타는 피아노처럼 선율과 반주를 동시에 구사할 수는 있지만 음폭의 협소함과 음의 불연속성으로 인해

피아노와 같은 완벽한 화성진행을 구사하기는 어렵다.



이런 한계 때문에 피아노의 악보로 기타를 배우려면 피아노에 구사되어 있는 화성을 기타에 축소하여 적용해야 한다.

확장에 비해 축소가 훨씬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이 과정속에서 화성학을 완벽하게 터득했음을 의미하며 그 어려운 과정을

혼자 해냈다는 것은 그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남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후 그의 음악의 어법에서 뛰어난 화성의 사용이 가장 두드러지게 된다.

그는 많은 코드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런 면에서 몇 개의 코드만을 사용하던 당시의 통기타음악과는 구별된다. '상록수'의 가사 "온누리"에서는

각 글자마다 코드를 부여하여 그 의미를 강조한다. 또한 많은 종류의 코드를 사용한다. 마이너 세븐코드, 마이너 식스코드, 메이져 세븐코드,

2차적 도미넌트 세븐코드 등은 당시의 통기타음악가 중 이정선 이외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일련의 코드진행을 사용하여 뛰어난 음악적 형상화를 이룩한다. '친구'의 첫 소절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의 반복되는

'미' 음은 끝없는 바다를 의미하고 여기에 부여되는 C-CM7-C7-F의 코드진행은 끝없는 바다 위에 내리는 비를 연상하게 하여 가사의

시각화‧공간화를 달성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쓰인다.

그는 또 같은 으뜸음조의 전조(C-Cm)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공장의 불빛" 중 '야근'에서 노동자의 비참한 공장생활을 노래할 때는 C단조(Cm)로

시작되지만 사장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앞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C장조로 전조됨으로써 서사적인 양식에 어울리는 대조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종이연'(원제목은 혼혈아)에서는 '혼혈아' 라는 한 많은 화자를 D장조로 나타내어 교대시킴으로써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는 또한 다양한 음악양식에 관심을 보인다. 먼저 미국 모던포크의 영향을 볼 수 있는 곡들이 있다. '아하 누가 그렇게'는

기타 반주와 좁은 음역 내에서 짧은 호흡을 갖는 선율구조는 전형적인 모던포크 양식이다. 그러나 5음계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인다. 그러나 '서울로 가는 길'에 이르면 가사의 내용은 이농현상이라는 한국의 현실을 담고 있으며 5음계 선율은 장조의 조성임에도

불구하고 장조와 단조의 중간적 성격을 느끼게 해줌으로써 미국의 모던포크가 김민기에 의해 한국에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기지촌'과 같은 곡은 블루스 양식을 사용하여 효과적인 표현을 한다. 그가 사용한 양식 중 가장 비포크적인 것은

서구 고전음악의 가곡의 양식이다. 이것은 '아침이슬', '상록수', '이 세상 어딘가에', '날개만 있다면' 등의 곡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통기타음악의 양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폭이 넓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런 곡들은 서정적인 분위기의 전반부와 절정부로 상승하는 후반부로 나누어지며 다양한 코드를 사용하여 큰 폭의 감정표현을 돕는다.

이런 양식의 사용은 그의 관심이 통기타음악이라는 양식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에 중점을 두고 계속 확장해 나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런 그의 음악적 태도와 함께 변방의 지식인으로서의 반성적 사유는 비록 그가 서구 고전음악의 음악어법으로 출발했지만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국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끈다. 양희은의 78년 음반의 '밤뱃놀이'와 "공장의 블빛"의 '두어라 가자'가

그것인데 모두 민요적 선율과 창법에 국악 반주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통음악의 양식으로부터 별로 발전되지 않았으며 성공적이지도 않다. 그에 비하면 '가뭄'과 '식구생각'과 같은 곡의 선율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50곡이 넘는 그의 자작곡 중에서 국악의 양식을 사용한 곡이 몇 곡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관심은 가졌으되 많은 성과는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 통기타음악의 태동기부터, 한국의 대중음악이 여전히 미국의 헤게모니 속에서 어떤 대안적 시도도 못하고 있을 때

그가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중한 것이다.

그의 문제제기는 학창시절 그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던 정태춘에 의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런 국악 양식의 도입이 너무나

큰 문제라서 힘겨웠던 반면 그가 "공장의 불빛"에서 보여주었던 구전 가요의 도입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지나가는 여대생을..." 어쩌구 저쩌구 하는

구전 가요의 트로트 선율(라시도미파)을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드러내는 곡에 사용함으로서 현실감의 획득에 성공하고 있다.


김민기가 남긴 과제
그가 한국 대중음악의 첫 번째 얼터너티브인 이유는 그가 남긴 과제의 중요성 때문이며 이것이 통기타음악에 한정되지 않고 한국 대중음악 전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면 내용적으로는 획일성, 순수성, 건전성이라는 발목 잡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산업적으로는 자본의 이익에 결국 봉사하게 됨을 일찍이 간파했다. 또한 한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의 추구는 한국 대중음악의 자아가 서구의 대중음악에 의해 장악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벗어나 그것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전통음악으로 눈을 돌려 한국적 음악어법을 추구할 때 가능함을 인식했다. 끝으로 김민기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수용자들이 그의 음악을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 통기타음악의 가장 큰 힘은 개인의 사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 동반될 때 발휘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 바람에 날개되어
글쓴이 : 바람의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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