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구조 -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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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최선을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관이었습니다. 현재는 역사적 인과관계의 사슬에 따라 형성된 최선의 결과고, 이는 권력과 결탁하여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푸코는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역사는 최선을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인위적으로 배제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왜 어떤 사건은 선택적으로 억압되고 비밀에 부쳐지고 은폐되었는가?”의 관점으로 역사에 접근하여, 배제된 역사인 광기, 감옥, 성에서 권력관계를 발견합니다. 신체형이 사라진 것은 그것이 역사적으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왕, 귀족 등 중앙권력의 권력과시용이었던 신체형이 이들에 반기를 든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옳고 그름 이면에는 권력관계가 존재하고, 이에 따라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배제되는 것입니다.
※ 어렸을 때 역사책을 보고 느낀 점은 ‘한민족은 잘났다’였습니다. 역사의 목적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내뱉는 것은 결론을 정하고 근거를 끼워 맞추려는 정치권력의 관점입니다. 역사는 ‘민족적 자긍심’이 아닌 ‘과거에 벌어진 일’을 말하는 학문이어야 합니다. 비록 완전히 객관적인 사실로의 역사는 존재할 수 없더라도, 이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에 역사의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는 것도 안 지겹나...
언어의 구조 – 바르트
소쉬르는 언어에 따라 관념이 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바르트는 그 언어사용의 규칙에 주목하였는데, 이를 랑그(langage), 스틸(style), 에크리튀르(ecriture)의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랑그란 공식적인 언어체계로 모국어를 말합니다. 한국인에게 랑그는 한국어입니다. 스틸이란 언어를 사용하는 개인적인 방식입니다. 말투, 언어감각, 선호도 등이 스틸입니다. 에크리튀르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가 지닌 ‘자연’적 어법에 부여해야 하는 사회적 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랑그는 공식적으로 약속된 체계이고 스틸은 개인의 무의식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랑그나 스틸은 개인이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크리튀르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사회적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지역적인 언어 사용’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일단 어떤 어법을 선택한 순간 자기가 선택한 어법이 강요하는 ‘형태’로 말하게 됩니다.” 이처럼 에크리튀르에서 나타난 언어의 구조에는 권력관계가 있습니다. 페미니즘 비평이론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자연적인 어법’이란 ‘남성중심주의’적인 어법”이고, 사람들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남성중심주의적 가치관을 은밀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확고한 견해를 가진 인간으로 텍스트를 읽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르트의 이론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이처럼 ‘얽힌’ 구조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비평의 기본원리로 제시한 것”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 한국말은 존댓말과 반말이 엄격하게 구분됩니다. 존댓말을 하는 ‘아랫사람’은 반말을 하는 ‘윗사람’에게 자연스레 예의를 갖추는데 이는 ‘공손하게’ 말하고 ‘얌전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존댓말과 반말에는 개인의 말과 행동을 통제하는 한국 특유의 권력관계가 있습니다.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 대단한 것 같음.
문화의 구조 - 레비스트로스
사르트르는 역사에 옳고 그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상황 속에서 주체는 늘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야”합니다. 이는 역사의 결과인 문명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반박합니다. “각각의 사회집단은 각각 자기들의 실리적 관심을 기초로 해서 세계를 잘라”내는데, 실리적 관심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에, 역사의 옳고 그름을 선택의 결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실리적 관심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는 관심이 ‘선택’이 아닌 ‘구조’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친족구조 연구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에 관계없이 모든 가족집단이 아버지, 아들이 친밀하면 조카와 외삼촌은 소원하거나 아버지, 아들이 소원하면 조카와 외삼촌이 친밀한 구조를 발견합니다. 친족구조가 인간의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친족구조에 따라 동일하게 형성되는 것, “인간이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인간적 이론에 앞서서 이미 그곳에 있”기에 구조의 기원이나 의미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집단이 지금 어떤 친족구조를 ‘왜’ 선택했는지 그 개별적인 이유는 모르지만 친족구조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알 수 있”는데, “친족구조는 단적으로 ‘근친상간을 금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근친상간을 본능적으로 금지하는데, 이는 유전자가 왜곡되어 멸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지배하는 욕구는 식욕, 수면욕, 성욕인데, 식욕과 수면욕이 삶을 유지한다면 성욕은 필멸하는 삶을 유전자로 연장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생명체의 존재이유는 유전자의 보존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구조란 어쩌면 ‘이기적 유전자’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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