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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한적한길 2016. 2. 29. 23:17

야생의 사고

작가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출판
한길사
발매
199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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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를 읽어보기 전에 나는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읽어보았다. 야생의 사고와 달리 슬픈 열대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기술하기 보다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 남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면서 그리고 그 밖의 공간을 이동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하나의 기행문에 가깝다.


그래도 그런 기행문일지라도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인 영역에서 인류학자의 관점에서 적어 내려갔기에 거기에 살고 있는 원주민에 대한 현재와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살아온 과정을 서술한 점에서 인류학적인 가치가 있었다. 또한 인류학적인 관점에 떠나 레비 스트로스가 보는 원주민들은 기존에 서구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이 아닌 레비 스트로스의 새로운 관점으로 그들을 관찰하였다.


레비 스트로스가 인류학을 연구하기 전에 레비 브릴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연구한 내용은 분명 인류학적인 부분에서 당시 기준의 근현대 문화에 살고 있는 유럽사회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했는지, 레비 브릴과 레비 브릴 같은 사람이 관찰하는 인류학이란 그저 오만과 편견에 가득한 입장에서 본 학문이었다.


이에 반해 레비 스트로스는 그런 서구사회의 이성을 중시하는 일방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마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를 가지고 있던 이성중심사고 방식이 오히려 이성적인 영역만 치중한 것 자체가 이성적이지 못한 것을 알릴 계기라고 본다. 앞서 보았던 슬픈 열대의 경우 레비 스트로스가 보는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다수의 원주민들을 볼 때 레비 스트로스의 깊은 관찰력과 이해력이 돋보였다.


레비 스트로스 본인이 서구인으로서 원주민들을 관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고 했다. 아마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계속 발전해 오면서 문명사회를 이룩한 서구사회가 아닌 말 그대로 원주민들의 사회구조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 레비 스트로스가 프랑스에서 만들었으나, 곧 세계적으로 크게 학문과 사상의 발전을 이룩한 구조주의가 시작됨을 알린 것이다.


구조주의에 대해 내가 설명하고자 하면 그렇게 쉽게 간단히 하지 못한다. 그러나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레비 스트로스의 글에서 모든 것을 1가지 기준으로 하여 2원화적인 대립구도로 나누어 차별하기 보다는 그 2원화 대립이 보이는 각각 영역에서 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런 레비 스트로스의 시점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최근 서구사회의 문화가 세계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정치,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인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사회는 이미 자기들의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서구화가 되었다면, 이에 반면에 비서구사회에서는 그 자체적으로 역사적 흐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화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영역이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가 변하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변모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것은 기존에 있던 것을 지키기 위해 변화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유한한 생존을 가진 동물로서 어느 한 개인이 그것을 유지하고 가꾸고 지키고 싶어도, 그의 수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흐름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키고 하려한 그 가치가 그대로 소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레비 스트로스에겐 인류학이란 현재의 모습에서 미개사회라고 하는 곳은 보고 서구사회의 입장으로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서구사회에 있는 인간이 그 세계의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고 한 것이다. 단지 미개인들은 문명인과 달리 문자문화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적인 영역의 축적이 되는 문자와 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파할 언어학적인 체계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미개인이란 존재라도 문명사회가 가진 이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이성적이지 못하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그들이 가진 하나의 과학이란 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문명사회의 인간보다 더 그들은 과학적인 면모를 가질 수도 있다. 그들이 생존하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연 있는 그대로를 따르고 적응하였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적으로 물리공식이나 화학반응에 대한 내용은 원주민들은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자연에 놓인 어느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여 그것을 하나의 생활화 시킨 점은 분명 과학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중 제일 인상 깊었던 점은 식물분류학적인 내용이었다. 일반 식물학자들도 발견하지 못한 식물들을 매우 상세하게 관찰하여 분류한 점과 그 식물의 잎, 씨앗, 뿌리 등의 식물체 특성을 보고도 어떤 식물인지 알 수 있는가이다.


당시 20세기 중반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생물학 영역의 식물학자들도 활발히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식물분류체계를 훨씬 자세히 아는 반면 식물학자들은 같은 식물을 다른 종으로 착각하여 중복되는 식물종이 8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주민들이 과연 비과학적이란 사실이 맞을까?


그런 점을 시작하여 레비 스트로스가 보는 원주민들의 생활은 단지 그들이 미개하였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큰 착각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단지 내가 아쉬운 부분은 야생의 사고를 읽기 전에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과 구조인류학을 읽지 않은 것이다. 또한 레비 스트로스가 원주민과 그들의 생활에서 신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신화는 공시론적인 영역 즉 시간의 영원성을 강조한 점, 역사는 통시성으로 공시적이지 못한 점을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다.


일단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 영역은 구조주의라고 하여도 그의 구조주의 영역 아래 있는 학문은 마크르스의 사회과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또한 기호학을 만든 소쉬르의 언어학이다. 이전에 마르크스 자본,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도 읽어보았지만, 메를로 퐁티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은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그런 학문적 체계의 연계성에서 각각 이어주는 고리가 없는 상태에서 읽다보니 야생의 사고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적인 고찰 역시 매우 깊이 들어가고, 그들의 신화를 풀이하고, 그들의 이름과 토템까지 풀이하면서 원주민들의 생존방식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나는 레비 스트로스가 해석하기 위한 전초과정에 대한 부분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야생의 사고를 읽는 내내 조금 힘들었다. 물론 다른 서적도 마찬가지이나, 야생의 사고는 어떤 이론과 그 이론에 대한 정립을 내세우기 보단 인류학적 고찰로 인해 탄생된 학술서적이기 때문에 못내 아쉬운 것이다.


단지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은 역자후기에서 나온 것처럼 레비 스트로스가 얼마나 원주민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당시 서구사회에서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와 그리고 마르크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 시초자인 레비 스트로스 사이에 벌어진 학문적 논쟁이었다. 야생의 사고 9장에 레비 스트로스는 장 폴 사르트르와 그동안 벌어온 논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가 레비 스트로스에게 학문적으로 패배한 것은 프랑스 학문과 사상이 구조주의로 변화한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본다면 미개인들이나 혹은 미개인까지 아니지만 비서구사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적인 서구지식인들에게 큰 여파를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단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 서적 앞부분에 흑백과 컬러 사진이 있는데, 거기에 언제나 원주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1980년대 레비 스트로스가 안동 하회마을에 찾아와서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관찰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분명 어느 국가와 민족, 하물며 국가와 민족으로 규정하기도 어려운 소수 부족들까지 계속 생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원주민들의 신화이야기에 서구사회의 야만성이 엿보인다. 사실 기존에는 원주민과 같은 미개족속들이 야만적이라 하지만, 그들은 야만적이라 생각하면 안될 존재였다.


그들은 그저 자신만의 영역, 즉 인간 역시 자연이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원주민 신화와 그리고 토템에서 초반엔 동물, 식물, 돌, 생체 일부부분, 생활도구 등에서 칼, 총, 비행기와 같은 무기나 기계문명이 올라가 있었다. 이들의 생활영역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인간은 통시성과 공시성을 둘 다 가지고 있으나, 이들의 통시성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의 영역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슬픈 열대나 야생의 사고를 읽으면 원주민들이 무참히 자신의 서식처를 잃고, 희생되는 장면이 머리 안에서 그려진다. 또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 등을 비롯한 그의 서적 내용도 생각난다. 욕망으로 가득한 문명사회보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미개사회가 문명사회보다 행복하지 말란 법은 없다고 말이다.

 

출처 : sun land
글쓴이 : piglis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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