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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민기:봉우리

한적한길 2016. 7. 2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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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 - 김민기

김민기 4집 (1993)

김민기 1951-

No.1 - 봉우리

 

출생 1951년 03월 31일 / 한국
학력- 서울대학교 회화과
프로필- 극단 학전 대표
'김민기' 의 음악 활동-도비두 (1970)  with 김영세

김민기의 "봉우리" 라는 노래의 탄생 배경은 88년도 서울 올림픽이었다. 모래시계의 작가로 유명한 송지나씨의 의뢰로 88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을 위한 TV프로그램의 테마음악을 김민기씨가 작곡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금에서 자유롭지 못한 김민기라는 이름은 드러낼 수 없었다. 이떤 이는 이 노래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같이 연상하여 듣는다고 한다는데...

김민기씨의 음악은 항상 순수하게 시작됐으나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운동권 가요도 되고, 시대를 대변하는 노래도 되었다며, 그게 자신의 팔자라고 김민기씨 스스로 말했답니다. 아무튼 배경이야 어찌되었든 곱씹으며 들을 만한 노래입니다. 지나의 재즈로도 만들어진 곡이다.

 

봉우리 (작사:김민기 작곡:김민기 편곡:김광민)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저기 부러진 나무등걸에 걸터 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 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을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같은 것이 저며 올때는
그럴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전인권 Rock 2003년
양희은
Gina 2005

우리 시대의 가객 김민기

우리 시대의 가객 - 바람의 노래 희망의 노래/김민기

글 : 김해자

소리 없는 노래

서산 마루에 시들어지는 지쳐버린 황혼이/창에 드리운 낡은 커텐 위에 희미하게 넘실거리네/어두움에 취해버린 작은방 안에 무슨 불을 밝혀둘까/오늘밤에는 무슨 꿈을 꿀까 아무것도 뵈지 않네 -「기지촌」 1절

나는 지금 김민기의 음성으로 이 노래를 듣고 있다.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빠진다. 가만히 따라부르다 보니 3절까지 이어진다. "가로등 아래 아무에게도 들리잖는 장님의 노래"가 들리고, "작은 별들이 하나 둘 떨어지는 밤거리 짙은 화장의 젊은 여인네들이 길가에 서성"댄다.

어려운 청탁을 받고 그의 노래들을 흥얼거리다 40년 내 생애는 반을 탁 접어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연극 장면 같은 그림들이 김민기의 배경음악을 깐 채 끝없이 펼쳐진다. 막걸리를 마시다 젓가락 두드려가며 부르던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 개에 오 만원씩 이십 만원에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털이래 야야야야 야야야야"'. 수업 땡땡이치고 인촌묘소에 올라 부르던 한낮의 「아침 이슬」과 「세노야」나직한 노래들은 영상처럼 계속 페이지를 넘어가고.

장구와 꽹과리 소리와 휘파람과 잡음 속에서 듣던 <공장의 불빛>을 기억하던 내게, 93년 새로 녹음된 네 장짜리 그의 전집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의 음악 세계가 이렇게 단아하고 세련되고 클레시컬하고 웅장한 한편, 이렇게 편안하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다니. 우리가 부르던 동요풍의 노래가 색소폰이 끼어들다 피아노와 베이스로 마무리짓는 재즈풍의 노래였다니.

71년도에 나온 음반이 72년 압수조치 당한 후, 그의 음악은 양희은의 목소리를 타고 혹은 입에서 입으로 건네져 나에게 왔다. 그의 목소리로 불리워지지 않음은 물론 다른 음반에 실려도 작곡자의 이름을 숨긴 채 전해진 노래들은 불온한(?) 작곡가의 손을 떠나 자기 방식과 상황과 감정에 따라 재해석되고 편곡되어 저마다의 노래가 되었다.

그는 음악 형식의 측면에서 통키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는 서구 포크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클래식과 재즈와 락 등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하여 노래를 만들었다. 그는 음악인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었고 시인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아니라고 말"하는 부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이었다. 그의 부정정신, 달리 말하면 창조정신은 아름다운 서정시와 다를바없는 가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내 귀"(「잃어버린 말」)를 부정하고, "이렇게 가까이 이렇게 나뉘어서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쳐다만 보"(「철조망 앞에서」)는 암담한 현실을 부정한다. "이 길 뿐이라고" 한 곳만을 가리키는 억압의 손가락을 부정하고(「길」)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말하"(「친구」)는 세상의 잣대를 부정하다, 마침내는 자신의 이름조차 잊은 채 바람의 노래가 되었다.

자유의 노래 저항의 노래

8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또래들은 양희은을 듣고 김민기를 알면서 하루아침에 업그레이드되었다. 뭔가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며 알레고리가 숨쉬고,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클래식한 노래는 우리 세대에게 색다른 미각으로 다가왔다. 새벽기도를 다니던 크리스찬의 버릇을 아직 간직하고 있던 대학 초반, <금관의 예수>는 김지하라는 저항시인의 이미지와 함께 비장한 운명적 분위기로 다가왔다.

『민중과 지식인』을 시작으로 의식화를 접하던  그 즈음 김민기는 갈 길을 찾아 헤매는 자의 자의식과 번민을 강하게 드러내는 노래로 받아들여졌고, 우리는 「친구」「아하 누가 그렇게」「두리번거린다」 등을 부르며 "아무데도 없는" 길을 걸어간 선배들의 고민과 만났다. 제도권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간주된 그의 노래들이 정치적 함의를 띈 채 다가온 것은 당연했다. 사실 당시도 막연히 느끼기는 했지만 김민기의 노래 세계는 정치적 의미연관으로 제한할 수 없는 폭넓고 다양한 프리즘을 지니고 있다. 공장과 탄광 농촌에서 땀 흘리며 자신의 예술을 건져올리려 했던 그의 족적과 더불어 가중된 정치적 규제에 의해 과장되어지고 신비화된 측면이 있을지 모른다. 이런 정치적 요소에 의해 재단될 때 한 예술가의 진정한 의미는 훼손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많다.

강남의 청담동 달동네 원주민이었던 아주 가난했던 선배가 횃불시위를 주동하고 손이 데인 채 옷 벗겨 끌려갔을 때, 한 선배는 술집에서 「친구」를 부르며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아니라고 말할 사람 어디 있겠소".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던 것 같다. 하필이면 째지게 가난한 선배가 주동할 게 뭐람.

순박하고 얼굴이 짱돌처럼 울퉁불퉁한 한 선배는 「차돌이 내 몸」이 18번이어서 별명이 짱돌이었다. 그는 몇 달 후 비밀집회랄 것도 없는 MT장에서 형사에 쫓기다 문건을 숨긴 채 옥상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졌다. 그는 잊을 만하면 다리를 절며 나타나 "산산이 부서져라 차돌이 내 몸 깨뜨리고 깨진 듯이 외쳐라"를 여전히 부른다. 또한 내 남편이 된 '청담동 달동네'는 감옥에서 나온 후, 지하 보일러실에서 일하며 따라부르지도 못할 저음의 김민기 노래를 들으며 불을 땠다고  한다. 그렇듯 우리는 청춘 시절 시위장에서 술자리에서 일터에서조차 그의 감수성을 자양분으로 먹고 자랐다.

시위를 시작할 때 "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잖게"를 부르며 물가에 심어진 나무는 왜 흔들리지 않을까, 속으로 궁금해하던 저학년인 내게 그의 번안곡 또한 달콤한 세례였다. 미국민요 「We shall overcome」은 그의 손을 거쳐 「우리 승리하리라」가 되었다. 우리보다 더 많은 짭새들에게 둘러싸여 치고 뛰는 벼락치기 시위를 하다, 주동이 끌려가고 난 후 몇 명쯤 그 자리에 남아 물가의 나무가 된 듯 꼼짝않고 '승리의 미래'를 불렀으며, 시위가 실패했을 때 끌려간 선배를 생각하며 "누가 알았을까 아픈 이 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지 저 부는 바람을"(「저 부는 바람」)을 부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예민한 미적 감수성 덕이다.

대부분 대학가에서 불려졌기 때문인지 그의 노래는 지식인적 자의식이 심한 노래로 평가되기도 한다. 사실 그의 노래 중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나 「상록수」 「세노야」 고은 시에 곡을 붙인 「가을 편지」 등 몇 노래들을 빼면 대중화되지도 않았다. 그의 노래가 클래식처럼 부르기 보다 듣기 좋은 음악이라는 평가 또한 그의 음악 언어가 대중가요적 정서에 물들어 있는 대중들에게 접근하기 어렵고 웬만큼 노래 들을 여유와 포크송에 대한 이해를 가진 지식인층에 의해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현실조건을 반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재즈맛이 섞인 우수와 그 우수를 음 하나로 날려버리는 가벼운 비트의 「아하 누가 그렇게」는 그 대표적 예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내게 가장 엄혹한 시절 속에서조차 속물적 리얼리즘에 맡기지 않으려는 그의 예술적 양심과 정직성으로 비추어진다.

아하 누가 푸른 하늘 보여주면 좋겠네/아하 누가 은하수도 보여주면 좋겠네/구름속에 가리운 듯 애당초 없는 듯/아하 누가 그렇게 보여주면 좋겠네/아하 누가 나의 손을 잡아주면 좋겠네/ 아하 내가 너의 손을 잡았으면 좋겠네/ 높이높이 두터운 벽 가로놓여 있으니/아하 누가 그렇게 잡았으면 좋겠네
-「아하, 누가 그렇게」1.2절


소중한 꿈이 짓밟히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아이를 화자로 세워 노래하는 「꽃피우는 아이」나, 작은 연못의 붕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다 결국 둘 다 죽고 연못은 썩어버렸다는 분단현실의 알레고리로 읽히는 「작은 연못」또한 우리의 현실을 탁월하게 비유한 노래들이다.

미술학도이자 김지하 등과 지적 토론과 우리 사회의 모순과 극복 방안을 깊이 사유한 70년대 인텔리겐차인 그가 독재체제하에서 느낀 억압과 자유에 대한 바램과 세상에 대한 답답한 심경은 80년대를 시작한 우리 세대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학습하고 회의하고 조직하고 투쟁하는 한가운데서 불쑥 고개를 드는 온갖 의문문들.
사람과 풍경과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답답함과 의문들은 그가 10년 전에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는 「두리번거린다」와 「잃어버린 말」등은 우리의 공감을 자아내었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 늘 두리번거리며(「두리번거린다」)며, "가다 못 가도 죽은 후에라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길」을 노래한 그는 10년 후의 나 같이 회의하며 길을 찾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일러주었다. 길은 그렇게 흔들리며 가는 것이라고. 삶이란 "메마른 들판을 지나" 날아가는 가녀린 나비의 길이며(「나비」) "열릴 듯 스쳐가는 그 사이 따라" (「그 사이」) 난 길이며 "하얀 눈 쌓여 안 보이는"(「눈산」) 눈길이라고.


가난한 아이의 노래

갈숲 지나서 산길로 접어들어와/몇 구비 넘으니 넓은 곳이 열린다/길섶에 핀 꽃 어찌 이리도 고우냐/허공에 맴도는 소리는 잠잘 줄을 모르난다/에헤야 얼라리야 얼라리난다 에헤야/텅 빈 지게에 갈잎 물고 나는 간다
-「가뭄」 1절


청장년기 그의 노래들은 참 털털하게 변했다. 진지하면 부담스럽고 메시지가 담기면 무거워지는 법이거늘, 민요풍의 음조와 가사에는 길 길을 당연히 걸어가는 자의 편안함이 녹아 있다.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훈계도 나만 괴롭다는 과장도 없이 자기 속으로 난 길을 털털털 걸어가는 관조와 낙관의 정서가 있다. 그저 농군이 지게 지고 산길을 가듯 길을 갈 때 그것은 물이 제 길을 가듯 편안한 흐름이 된다.

그의 노래는 노동요나 민요처럼 단순하고 동화적이기도 하다. "굴뚝에 빗대면 졸음이 올까 봐 온 몸 흔들고 밤바람 쐬"며 "오늘 하루 흘린 땀 쉴 만한가" 돌아보며 "큰 숨 들이쉬고 두 팔도 치켜"든다. 그의 노래는 힘들고 홀로인 듯한 길을 걸으면서도 불평하거나 감상에 젖거나 비장감을 무기로 하여 과장된 목소리를 내지르지 않는다. 밤바다에서 홀로 서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며 작은 배일망정 밀고 나가는 뚝심이 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서 울고, 새하얀 눈 내려오면 우뚝 서" 있는「아름다운 사람」. 이 노래들은 진실하고 위대한 사람이 그렇듯 그들이 피우는 사랑이 그렇듯 아주 단순하고 평이하고 자연스럽다.

지식인적 고뇌와 감수성을 노래한 김민기의 노래는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입으면서 육체성을 지닌 민중의 삶으로 재생한다. 기지촌에서 몸을 파는 병든 여자의 막막함을 그린 「기지촌」과, 아무와 섞이지 못하고 혼자 종이연을 띄우는 아이의 외로움을 다룬 「혼혈아」등이 그것이다. 차츰 그의 시선은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 대한, 그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으로 아름답게 빛나고(「고향 가는 길」「서울로 가는 길」「강변에서」) 힘없고 상처받기 쉬운 여린 것들(「백구」「식구생각」「미운 내 얼굴」)에 골고루 미친다.

한 손에 과자를 들고 한 손에 초코우유 봉지를 들고 행복해하는 아이처럼,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세상 모르고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삶은 애초에 단순한 것인지 모른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 그는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치유하고 강팍한 세상에서 날카로워진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우리는 고무줄 놀이도 안 하면서 아이처럼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센 후 "살찐 송아지 한 마리 어~ 철둑길로 뛰어가요 새끼 염소도 한 마리 어~ 송아지만 쫓아가요 얘야 얘야 누렁아 기차오면 다친다" "어떡할래 어떡해 나도 인젠 모르겠다 아이구 아이구 속상해" 하며 「고무줄 놀이」를 부르곤 했다. 상처받기 쉬운 동심에 기우는 마음들은 철모르고 놀 나이에 서울로 올라온 열 서너 살 이 땅의 숱한 전태일에게로 넘어간다. 


잊지 못할 공장의 불빛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온다/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왠지 맘이 설레인다/강 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오르고/순이네 뎅그런 굴뚝엔 파란 실오라기 펴오른다/바람은 어두워가고 별들은 춤추는데/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강변에서」 1절


강변에서 기다리는 순이는 "우리 부모 병들어 누우신 지 삼년에 뒷산의 약초뿌리 모두 캐어 드리고 나서 돈벌러 서울 온" 아이다. "나 떠나면 누가 병드신 부모 모실까" 걱정하면서. (「서울로 가는 길」) 그 십대의 아이들이 얻어터져가며 일을 배우고 병든 부모가 계신 고향에 돈을 보내며 병들어 고향에도 못가는 신세가 되어간다.


두어라 가자 몹쓸 세상/설운 거리여 두어라 가자/언 땅에 움터 모질게 돋아/봄은 아직도 아련하게 멀은데/객지에 나와 하 세월도 길어/몸은 병들고 갈갈이 찢겼네/고향집 사립문 늙은 오매/이제 내 가도 받아 줄랑가
- 「두어라 가자」 <공장의 불빛>중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접하던 때로부터 4년째 되던 가을 나는 학교를 떠났다. 20만원에 4만원 하는 닭장집을 얻어 몇 달간 기레빠시를 천삼아 연습한 실력으로 미싱사라고 우겨가며 몇 번 시다로 좌천되기도 하며, 나는 내 이름을 잊은 채 몇 년째 스무 살과 스무 세 살 사이를 오르내렸다.
월급봉투에 적힌 잔업시간을 보면 대부분 140시간이 넘었다. 날마다 10시까지 잔업을 하고 수요일과 토요일은 야근했다. 어떤 날은 잠깐 눈 붙이고 일요일 오후까지 작업하기도 했다. 어쩌다 나도 몰래 '어떻게 사람이…' 놀라기라도 하면 6, 7년 경력의 A급 미싱사들은 영웅담처럼 말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냐. 명절 대목 땐 보름 동안 공장에 갇혀 일했어. 새벽에 잠깐 미싱에서 내려와 미싱다리에 머리를 대고 잠자고. 빵조가리 입에 문 채 그대로 앉아 잠들기도 하고"

그 뒤 7년 간 나는 미싱사였다. 때로 굽힐 수도 펼 수도 없는 허리를 비틀며 미싱 앞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때로 시를 끄적대기도 하며. 임금체불에 이어 위장폐업 하게 된 공장에서 몇 달간 물미역과 오이짠지로 점심 한끼 얻어먹으며 일을 하는 기숙사 친구들과 호박과 감자와 밀가루를 가져다 부침개와 수제비를 해먹으며 공장을 지키고 노동부를 걸어다녔다.  새벽길 잘 안나오는 휘파람을 불며 부르던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데 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이대로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공장의 불빛」)은 하얀  눈길에 비친 불빛처럼 아직도 따스하다. 

나는 특별히 <공장의 불빛>에서 심미적 감수성을 진하게 느낀다. 소름끼치게 들리는 "돈 벌어 돈만 벌어"를 들을 때나 "두어라 가자 몹 쓸 세상"을 들을 때 독특한 미감을 맛본다. 그는 아래서(under) 함께 서 있었던(stand) 것이다. 그래서 이해(understand)한 것이다. 여공들의 가난과 날마다 계속되는 노동과 "밤바람 찬 새벽에 교대"하러 가는 여공의 무섬증과 피로와 병들어가는 몸을 느낀 것이다. 仁이란 심미적 감수성이다. 같이 아프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속에서 나오는 것이 측은지심이다.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는 희망

돌아보면 김민기라는 이름은 나의 청춘에서 지워질 수 없는 고유명사다. 최근 거리에서 공장에서 부르는 노래들은 미안하게도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따라 부를 수 있을 뿐인 노래와 나도 몰래 3절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의 차이는 순전히 나라는 개인이 통과한 나이와 공유할 수 있는 시대, 감수성이 작동되는 경험과 유관할 것이다. 김민기의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할 때 나는 스무살. 사랑이든 이념이든 노래든 좋아하면 눈멀어버리는 스무살 언저리에서 그를 만났던 것이다.

이제 나는 김민기의 노래를 들어도 비장해지지 않는다. 낮은 음색으로 읊조리는 듯한  소리가 그냥 편하다. 낮으막한 산등성이에서 지나가는 바람소리인 듯 물소리인 듯. 친구에게 말하는 듯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봉우리」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세상의 길은 거창하고 위대한 곳으로 뻗어 있지 않다는 것을. "높고 뾰족한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는 길이 참 길이 아니라는 걸.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봉우리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여운과 함께 사라져가는 노래에 오버랩되어 낡은 테잎에서 들리는 <공장의 불빛>. 방만 바꾼 채 이루지 못한 혁명이 환멸이 된 시대, 가난한 여공들이 위로하듯 불러주는 노래가 들린다. 이 노래는 말하는 것 같다. 희망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플 대로 아파 본 밑바닥에서 마치 굿거리 장단처럼 터져나오는 거라고. 그리고 위로한다. "힘들 내여 힘들 내 기죽지 말고 힘 내 죽지는 말고 힘 내"라고. 슬픔과 눈물과 고통이 버무려져 위로가 되는 노래. 그 노래는 아직도 나직히 말하고 있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바람 속으로 걸어가라고.

     
출처 : 나미
글쓴이 : 나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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