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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의 3대 구라` ① 백기완 ② 방동규 ③ 황석영

한적한길 2016. 1. 1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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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3대 구라' ① 백기완 ② 방동규 ③ 황석영

 

'3대 교육방송'은 이어령·김용옥·유홍준

 

 

백기완

 

"내 이빨 중에서 14대가 가짜예요. 그동안 3~4년에 걸쳐서 임플란트로 해 박은 겁니다. '이빨 깐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젠 내 이빨이 아니라 그런지 '구라'도 옛날 같지 않아요.

자꾸 버벅거리고… 유창하게 나오질 않아."

소설가 황석영은 5년 동안 징역을 살면서 19번이나 단식 투쟁을 했다. 그랬더니 속은 좋아졌는데 칼슘이 몽땅 빠져나갔나 보다. 석방돼서 보니 이가 엉망이었다. 그 좋던 '이빨'이 무뎌졌다.

요즘처럼 날렵하고 빠른 디지털 시대에는 자기 같은 '아날로그'는 더 이상 '이야기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도 '구라'다.

소설 '장길산'을 10년 동안 연재할 때 한국일보 기자들이 붙여준 '구라'라는 별명이 문단으로 번져 오래 전부터 '황구라'로 통한다.

 

 

방동규


 

조선엔 3대 '구라'가 있다. 백구라, 방구라, 황구라.

'방배추'란 별명으로 통하던 '협객' 방동규가 20대 초반 어느 날 '지식 청년'백기완과 함께 했다.

백기완이 물었다.

"자네 주먹 좀 쓴다는데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나?"

"뭐, 그저 한 삼십명 정도…"

백기완이 벌떡 일어나 방배추의 '싸대기'를 날렸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삼천 명이나 삼만 명은 상대해야지 겨우 삼십 명이야. 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꺼져."

주먹 꽤나 쓴다던 방동규는 그 날 이후 백기완을 깍듯하게 '형님'으로 모신다.

1970년대 유신 독재로 답답하던 시절, 문인들은 청진동에 자주 모였다. 어느 날 청진동 이모집에서 '원맨쇼' 대결이 벌어졌다.

문단의 알아주는'구라' 황석영과 재야의 걸쭉한 '구라'방동규가 한번 붙어야 한다고 김정남(김영삼 정부 청와대 교문수석) 등이 부추겼다. 문인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을 하던 또래들이 30~40명 모였다.

'구라 대결'은 다수결의 판정에 의해 황석영이 졌다.

조선의 3대 구라 중 최고는 역시 민족 대서사적 '구라'인 '백구라'. 구라의 서열이 매겨졌다.

1995년 9월 첫 광주비엔날레가 열렸다. 광주 출신으로 한국일보를 거쳐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태홍이 문화계 인사를 초대해 술자리를 만들었다.

평론가 염무웅이 함께 자리한 '방배추'를 자극하려고 "이제 구라들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백구라'는 민중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뒤 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 더 이상 구라를 풀 수 없고,

'황구라'는 교도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구라'를 풀고 싶어도 풀 수 없게 됐으니 '구라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 또 했다. "지금 중원에서 신흥 '구라'들이 물 밀듯이 나오고 있는데 '라지오'가 좋다"고 덧붙였다.

방구라 왈

"앞장 선 놈이 누구냐?"

광주 비엔날레에 큐레이터로 참여하고 있는 유홍준을 가리키며 염무웅 왈

"저기 와 있네."

방구라 왈

"쟤가 무슨 라지오냐. 인생이 없으니까… 쟤는 '교육방송'이야."

모두가 배를 잡고 넘어갔다. 조선의 3대 교육방송은 그렇게 정해졌다.

 

1대 이어령, 2대 김용옥, 3대 유홍준.

소설가 황석영의 옥바라지를 하던 화가 홍성담이 면회를 와 들려준 이야기에 '황구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일보 연재 '장길산'이 나를 키웠다"창간47주년 인터뷰

 

시대의 입담꾼 황석영

 

미리 받은 집 반채값 고료 일주일간 술 마시고 탕진

장기영 사주 아니었으면 소설 햇빛 못봤을것

1989년 북한 방문은 작가로서 할일 했을뿐

우리사회 이념대립 극단적 중도가 인정받는 세상 돼야

 

 

 

"친정이죠. 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에요."

고희(古稀)를 눈 앞에 둔 소설가 황석영(68)은 한국일보와의 인연을 한마디로 표현한다. 그리고 올해로 창간 47주년을 맞는 '주간한국'에 대한 감회도 또렷하게 이야기한다.

"주간한국은 출발할 때부터 여러 사람들이 좋은 매체라고 평가했어요. 문예 취향이 있는 젊은이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주간한국은 1964년 9월27일 첫 호를 냈다. 그리고 47년, 올해 10월31일자로 통권 2396호를 맞아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홍익대 앞 상상마당에서 황석영 작가와 특별 인터뷰를 가졌다.

황석영은 1974년부터 1984년까지 10년 동안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했다. 무명 신인에 가까웠던 서른두 살의 젊은 소설가는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를 만났고, '장길산'은 생명력을 얻었다. 마침내 황석영은 작가 반열에 올랐다.

'장길산'은 1972년 10월 유신에 이은 독재 체제, 10·26사건, 12·12사태, 5·18광주 민주화 운동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궤를 같이하며 이어졌다.

 

 

1974년 7월11일 한국일보에 연재된 '장길산' 첫 회. 김기창 화백이 삽화를 그렸다.

 


- 소설 '장길산'은 어떻게 신문 연재를 하게 됐는지요.

"원래 중편 정도, 1권짜리 의적 소설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시놉시스를 당시 '문학사상'을 맡고 있던 이어령씨에게 보여줬더니 '이거 탐나지만 간단하게 처리할 게 아니라'며 한국일보를 소개해 줬어요. 얼마 후 이영희 문화부장에게서 '사주가 만나고자 한다'며 연락 온 것이 인연의 시작입니다."

- 사주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라고 했더니 대뜸 '얼마나 쓸 수 있겠냐'고 하시더니 '우리하고 길게 해보자'는 겁니다. 내 소설을 모두 읽어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하신 겁니다. 그래 자료 수집하고 연구하는데 6개월에서 1년 정도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무슨 소리냐'며 '두달 줄 테니까 하라'는 거에요. '다른 것은 우리가 모든 지원을 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집 반 채 값 정도 되는 돈까지 자료 수집비 명목으로 내놓았어요."

가난한 문인들 사이에 소문은 빨랐다.

'황석영이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졌고,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서울 한복판 청진동으로 몰려 들었다.

술자리가 시작됐다.

- 자료 수집에 써야 할 돈이었는데.

"악귀 같은 문인들이지요. 기다렸다는 듯이 떼거지로 모이더니 결국 수유리 쪽에 있던 '니나노집'으로 옮겨 일주일 정도 술판이 이어졌어요. 이 놈이 빠지면 저 놈이 오고… 결국 술값으로 자료수집비를 몽땅 탕진하고 말았어요. 눈 앞이 캄캄했지요."

사상계에 '실의'란 작품으로 등단했던 한남철을 비롯해 방영웅, 김승옥, 이문구, 천승세 등. 심지어 조선일보 기자였던 허술까지도 합류했다. 몇 날 며칠 집에도 들어가지 않는 선배들을 위해 내의를 사다 나르는 후배 문인이 있을 정도였다.

황석영은 염치 불구하고 다시 한국일보사를 찾아갔다. 이번엔 담당 부장을 거치지도 않고 비서실에만 이야기한 채 곧바로 사주를 만났다.

- 뭐라던가요.

"'진척이 있느냐'고 묻길래 사실대로 이야기했어요. 가난한 문우들과 술 먹느라고 다 날렸다고. '이해는 하지만 한꺼번에 날리면 어떻게 하냐'며 또 돈을 주시면서 '꼭 자료비로 쓰라'고 당부했어요. 그러더니 문화부 담당 기자를 불러 규장각 자료는 모두 사진으로 찍어 정리해 보내라고 지시하더군요.

그리곤 당신의 명함에다 술집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주며 '친구들과 술 마실 일이 있으면 그 곳에 가서 내 앞으로 달아놓고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어요. 그러나 너무 미안해서 그 술집은 한번도 가지 않았어요.

놀랄 일이 또 있었어요. 바둑 대국장으로도 유명한 인사동의 운당여관 특실을 잡아주곤 글 쓰는 일에 매달려 보라고 했어요. 대단한 분이었어요. 그런 배려가 없었으면 '장길산'은 출발도 못했을 겁니다."

마침내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은 1974년 7월11일부터 신문 연재를 시작했다. 조선 숙종 때의 실존 인물 장길산을 중심으로 모인 광대들의 공간에서 반봉건 운동이 펼쳐지고, 그 안에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그려냈다.

연재는 쉽지 않았다.

황석영은 그 해 11월15일 청진동 귀향 다방에 모인 문인들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자는 데 뜻을 같이 한 뒤 18일 고은(대표 간사), 신경림, 염무웅, 박태순, 조해일, 황석영이 6인 간사를 맡아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반유신 독재 투쟁에 앞장 섰다.

시인 김지하 등 긴급조치로 구속된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고, 언론·출판·집회·신앙·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에겐 이들은 '눈엣가시'였다. 감시가 심해졌고, 활동에 제약이 많아졌다.

'장길산'은 그 뒤에도 몇 차례 중단 위기를 맞았다.

- 참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장길산'을 시작하면서 도회지 출신으로서 많은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농촌과 전통 사회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전남 해남으로 내려갔어요. 원고를 제대로 보낼 수 없을 때는 해남 우체국에서 전화로 불러주곤 했어요. 문화부 기자들도 고생 많았어요. 광주 항쟁과 맞물려 '현대문화연구소'를 만들어 문화운동을 할 때는 이 도시 저 도시로 도망 다니다시피 떠돌았는데 그 때마다 이름 모를 시민들이 제 원고를 한국일보까지 배달하는 일도 있었어요."

-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나중에 그 때 문화부 기자였던 김훈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약속된 시간까지 원고가 신문사로 도착하지 않아 고생했다는 거에요. 수소문해보니 휴가를 끝내고 귀대하는 군인에게 원고 배달을 부탁했는데 이 친구가 귀대 시간이 촉박하자 그냥 소속 부대인 국방부로 들어갔던 거지요.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김훈 기자가 부랴부랴 한밤중에 국방부를 찾아가 주번 사령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잠 자던 사병을 깨워 원고를 받아왔다 더군요. 욕도 많이 나오고, 여자들이 받아 쓰기에 거북한 문장도 많은 제 원고를 전화로 불러주면 받아쓰던 우계숙 등 여기자들은 주변 동료들이 하도 놀려서 여러 번 울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다 고생시켰죠."

이제는 '허허' 웃으면서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정말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당국의 감시를 받던' 소설가의 원고를 챙겨야 했던 기자들이 오죽했으면 '황석영의 구라는 언제 끝나는 것이냐'고 했을까.

 

1984년 7월5일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의 연재를 끝낸 뒤 황석영이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완간 기념회에서 무당 춤을 추고 있다.

 


마침내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은 1984년 7월5일 2,092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리고 현암사에서 전 10권으로 완간했다.

'황구라'란 별명은 기자들의 입에서 먼저 나왔고, 그것이 문단에 전해지면서 굳어졌다.

황석영은 지금도 술 한잔 하고 잠든 밤이면 6·25 전쟁 통에 텅빈 도시에 홀로 남아 있는 꿈, 중고생 시절 시험 볼 때마다 아무 것도 써내려 가지 못하는 꿈과 함께 '장길산 원고에 얽힌 꿈'을 꾼다고 한다.

'세 가지 꿈'은 죽는 날까지 잊히지 않을 상처이자 강박 관념인 것이다.

-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이어 확대 개편된 민족문학작가회에서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표현의 자유가 너무 극악하게 제한 받던 시대에 작가의 책무라고 할 수 있어요.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써야 하는 것이 바로 작가잖아요. 특히 역사소설은 무엇을 썼느냐보다 어떤 때 쓰여졌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황석영은 1989년 민족예술인 총연합회 대변인 자격으로 북한의 조선문학예술 총동맹의 초청으로 방북한다. 그 후 5년여 동안 '망명자'로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등을 떠돌았다. 1993년 귀국하자마자 구속 수감돼 7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1998년 3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 방북, 망명, 수감 등 고난이 계속됐습니다. 분단 극복은.

"젊은 사람들에게 '분단 극복'이니 하는 소리는 낡은 이야기이고, 통일은 관념적으로 먼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현재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입니다. 통일은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현 상황의 변화는 코 앞에 있는 일이지요.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한계성을 벗어날 수 없어요. 엄연히 우리는 분단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아직도 나를 '종북좌파 빨갱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조직적이지도 못하고, 이념적으로 투철하지 않아요. 자유주의자일 뿐입니다. 방북은 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한 사회의 터부나 억압받는 것을 무너뜨려 상식화시키고, 대중화시켜야 합니다. 금기시하는 것이 억압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작가입니다. 작가는 민족의 주술사 같은 거예요."

- MB 정부가 들어선 뒤 대통령과 함께 중앙아시아 순방 길에 올랐던 것은.

"제가 방북한지도 벌써 20년이 지났어요. 현 정부가 보수정권이지만 북한하고 뭔가 진전된 관계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노무현 정부 때부터 6자 회담과는 별도로 남북한과 몽골, 중앙아시아 5개국이 경제 문화권을 형성하면 분단 극복을 위해 또 다른 면에서 유효하지 않겠냐는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접근했고, 북에도 의사를 타진하니 양쪽이 모두 좋다고 해서 움직였던 거예요.

결과적으론 기회주의적 희망으로 그쳤고, 유라시아에 동행한 이후 좌우 양쪽 어떻게 두들겨 맞았는지 양 볼이 다 방방해졌어요."

- 남북 관계의 해결 방법은.

"중도적 입장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신념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념의 스펙트럼이 너무 극과 극이라 개인이든,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중도를 표방하고 실천하기가 무척 힘들어요. 움직이는 것,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늘 균형을 잡으려 합니다.

지금은 집권 세력이 급격하게 우향우를 하니까 저는 좌로 기울게 되는 겁니다. 상식이 설 자리가 없어요. 선(善)한 상식이 서있는 사회가 '열린 사회'입니다. 상식이 바로 서야 진보와 보수가 양립할 수 있고 대화를 통해 발전적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황석영은 얼마 전 신작 '낯 익은 세상'을 발표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서 사람과 물건과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쓰레기장을 배경으로 한 원주민과 이주민의 세계, 도깨비 세상과 산업 사회의 모습을 통해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황석영은 1962년 경복고 재학 시절 단편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의 신인문학상에 입선하면서 등단했다. 내년이면 등단 50주년이다. 19세기 구한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야기꾼의 일생을 그려가는 새로운 작품의 구상을 마무리한 상태다. '여울물 소리'란 제목도 정해 놓았다.

"제가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했던 만큼 등단 50주년의 마무리도 한국일보와 함께 신문 연재로 하고 싶네요. 문학 인생의 방점을 찍는 거지요. 그 후부터가 저의 '만년 문학'이 시작될 겁니다."

/ 주간한국 2011.10.

 

 

 

 

 

‘배추’ 방동규 “요즘세상 의리가 없어 서운해”

 

“되지 못한 세상에서는/ 꼭 엉뚱하기는/ 천장에 매달린/ 대들보 같은 사람이 있어야 했다/ 힘깨나 쓰지만 힘자랑보다/ 입심좋아/ 그 입심에 술자리 눈과 귀 집중하다가/ 술자리 입들 짝 벌어져/ 와/ 와 웃음터진다.”

 


 

 

 

10여년 전에 발표된 연작시 만인보에서 고은 시인은 방동규씨(73)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땅에 튼튼하게 뿌리를 박고 천장을 받치고 서 있어야 할 대들보가 천장에 매달린 형국이라니 방씨의 인생이 그만큼 기묘했다는 얘기일 거다. 게다가 힘깨나 쓴다고 하고 거기에 입심도 좋다고 하니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배추’라는 별명이나 소설가 황석영, 재야운동가 백기완과 함께 ‘조선의 3대 구라’ 중 한 사람으로 더 잘 알려진 방씨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이부영·김태홍 전 국회의원, 작가 구중서 등 수많은 재야세력과 교분을 쌓고 민주화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다.

그도 1973년 강원도에서 노느메기밭을 일구며 공동체생활을 꿈꾸다 재야인사들을 접촉한다는 이유로 간첩 혐의로 복역하고, 86년에는 또다시 ‘말’지 사건에 휘말린 김태홍 전 의원을 숨겨줘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정작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 흔한 ‘명함’ 하나가 없다. 다만 그는 몸으로 세상을 살아왔을 뿐이다. 어린 시절에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으로 통했고 서른 되던 해에는 파독 광부생활을, 70~80년대 중동 아랍에미리트 현장을 누볐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헬스클럽 강사로 활동했고 일흔에는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일했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장배 보디빌딩 대회에 최고령자로 참석해서 입상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전국대회 출전이다.

남들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두고 ‘한 번쯤 풍운아처럼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는 “당신들이 내 ‘구라’를 들으면서 웃는 것을 보면 나는 아주 환장할 노릇이야. 평범한 게 좋은 거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특히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는다.

머리가 하얗게 센 칠순 노인이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지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의리 하나로 살아온 그는 요즘 자본이 근본이 되는 세상이 서운하다고 했다.

 

“의리나 사람이 근본이 되어야지 세상이 좋은 건데 요새는 자본이 근본이고 재산이 근본이 아닙니까.

‘자본’이 어떻게 ‘주의(主義)’가 되지요?

의리고 뭐고 없고 이기는 놈이 장땡이고 이기려다보니 모략하고 배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결과 잘된 놈은 잘된 놈들끼리만 모이고 안된 놈은 사그라지는 것 아닙니까.”

 

세속의 틀과 이기심에 갇혀 사는 우리에게 배추의 파란만장 일대기가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배추

-이름보다 ‘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별명을 얻게 됐습니까.

“배추는 배추장수의 약자예요. 아 왜 유명한 사람이 되면 단축하잖아요. 두 글자로. 나도 유명해지니까 짧아졌더라고요. 6·25 뒤에 대부분 학교가 폭격으로 부서져 종합학교라는 것을 운영했어요. 여러 학교가 한군데 모여서 공부했지요. 내가 다니던 경신은 대광, 정신여고 등과 함께 인사동 정동교회 쪽에 있었어요.

다른 아이들은 여학생과 한방에서 같이 공부하니까 모양도 내고 면도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뭐 집이 가난해지면서 교복도 못 사입고 베잠방이 한복 반바지에 조끼 같은 민소매 옷 하나 걸치고 다녔죠.

운동은 그때부터 좋아해서 민소매 입어야 몸이 나타나니까.

신발도 그때는 게다짝이라고 했는데 나무판에 못 쓰게 된 타이어 같은 것 못 박아서 찍찍 끌고 다니고, 밀짚모자까지 썼어요. 그러니 배추장수 같다고 여학생들이 붙여준 거예요. 게다가 어렸을 때였지만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한마디로 불량학생이죠.”

-싸움을 조금 하신 정도가 아니라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이라고 불리시잖습니까.

“몇 년 전인가 보니까 학생들 싸우는 영화가 한참 유행하더구먼요? <말죽거리 잔혹사>던가? 참 잘 싸우더라고. 17 대 1로 싸워서도 이기고. 그런데 나는 진짜 17 대 1로 싸워봤어요.

영화에서는 이기던데 난 졌지. 아 도대체 17명을 어떻게 이기느냐고. 저쪽도 날고 기는 놈들인데. 그래서 병원에 한 두어 달 입원했었죠.

요새는 괜히는 안 싸우잖아요. 이해관계가 있다든지 시비가 있다든지 해야 싸우는데 예전에는 그런 것 없이 괜히 싸웠어요. 그때는 전화도 없으니까 상대편에서 쪽지를 들고 나와요.

‘나 영등포 아무개인데, 너 요즘 좀 잘나가더라? 한 수 겨뤄보자’라는 식이죠. 그럼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붙는 거예요. 보통 장소는 지금의 창경궁이었는데 전쟁 때 창경원에 넣어뒀던 동물들이 없어져서 아주 휑했지요. ‘코끼리 앞에서 보자’ 하면 널찍한 코끼리 우리 앞에서 붙는 거죠. 방법은 천하 없어도 1 대 1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힘은 세지만 싸움을 특별히 잘한다고 볼 수 없거든요. 계속 약한 상대들만 걸린 거예요.

그러다보니 내가 이미 센 놈이 되어 있더라고요.

삼국지에서도 보면 자기 나라에서 얌전히 왕 노릇하면 되는데 꼭 옆 나라를 치고 망신당하잖아요?

동네에서 골목대장 하면 유명해질 텐데 제가 유명하다고 하니까 도전했다가 번번이 깨지더라고요. 저는 그러니까 도전자를 계속 받아주면서 센 사람이 되어버린 거죠.

커닝해서 한 번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꾸준히 밤새워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격이지.”

-전쟁 때문에 가난해졌지만 그 이전에는 개성에서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걸로 압니다.

“내가 학벌이 화려한 게 그 당시 유치원을 다녔어요. 개성 주민이 10만명이었는데 개성백화점 하는 사장이 3륜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 집에는 승용차가 한 대 있었죠. 컨버터블 카. 원산만 근처 송전이라는 곳에 우리 별장도 있어서 차 타고 1년에 한 번씩 놀러 갔어요. 우리가 부자가 된 것은 할아버지 덕분이죠.”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됐습니까.

“증조부는 아주 망종이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그때까지만 해도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대요.

할아버지가 아버지인 증조부에 이를 갈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신 것이죠. 할아버지께서 어느날 ‘돈 벌어 오마’라는 말만 남기고 황해도 신천의 운수회사인 부잣집으로 종살이를 하러 갔죠.

개성에는 특별한 관습이 있는데 객지에 나가면 10년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죠. 10년이 넘어 돌아오면 개성 시내의 가장 큰 다리인 야다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했어요. 지방색이 강한 것이죠. 할아버지는 9년 만에 돌아왔어요. 5층 건물을 지을 만큼 큰돈을 들고 오셨죠. 그리고 그 건물에 편리화라고 지금으로 치면 구두 공장을 만드셨고 밀짚모자 공장도 했어요. 또 정미소도 했고요. 그렇게 악착같이 모으신 거지요. 저는 그래서 어렸을 적에 항상 구두만 신고 다니고 잡곡밥을 먹은 적이 없어요.”

-어린 시절 부유했다면 돈이나 부에 대한 집착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아 보이십니다.

“저요? 왜 그런 생각을 안 하겠어요. 어떨 때는 나도 노년을 보내려면 최소한 1억원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돈을 벌 기회가 생기면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면서 잘 안 됩디다. 최근에도 어떤 사람과 동업을 해볼까 했는데 돈하고 관계가 되면 절대로 더불어 살아지지가 않더이다. 주종관계가 생기고요.”

백기완과의 숙명적 만남과 조선의 3대 구라

-선생님은 재야의 여러 친구분을 역사를 통해 지켜봐 오셨습니다. 처음 그 분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 백기완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이지요?

“그게 19세 때예요. 내 친구가 ‘머리 좋은 너 같은 놈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서 자기 친구 하나를 소개해 줬어요. 그 친구가 당시 백기완하고 친했죠.

그 아이들이 당시 이승만 자유당 때 부패하고 엉망진창이니까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산에 나무 심는 운동도 하고 그랬어요. 겨울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운동을 하고요.

그때 백기완을 처음 만났죠.

참, 내가 보기에는 사람 같지도 않더이다. 바싹 마른 것이. 내가 그때는 힘을 엉뚱한 데 쏟으면서 유명해질 때라 백기완이도 나를 알더라고요.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앉은 채로 올려다보며 ‘네가 배추냐?’ 하더니 ‘너 주먹 한 번에 몇 명이나 쓰러뜨릴 수 있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한 10명이야 자신 있지’라고 대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아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귓방망이’를 때린단 말이야.

‘남자가 주먹을 들면 3000만이 울고 웃고 해야지 넌 10명이 뭐냐. 조자룡보다 못하잖아. 조자룡은 10만 대군을 물리쳤는데’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참 가소롭고 북어대가리 같은 게 내 따귀를 때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그런데 그렇게 맞고 한 일주일을 잠을 못 자겠는 겁니다. 그 말이 자꾸 머리를 맴돌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백기완 똘마니가 됐지.

에이, 그때 그냥 백기완이 몇 대 때리고 나왔어야 내가 지금 조폭 두목이라도 하고 빌딩이라도 갖고 있을 텐데 하하.”


“백기완 만나 평생 가난해…‘주먹’했다면 빌딩이라도 가졌을 걸”


 

방동규씨는 “재야운동 하는 사람들 안만났으면 지금쯤 조폭 두목이라도 하면서 빌딩 한 채라도 가지고 있었을 텐테”라고 농담을 하며 허허 웃었다. 하지만 그는 “후회는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앞에 다가온 도전은 보디빌딩 전국대회다. | 김세구 선임기자

 

 

-‘백기완’이라는 친구를 만나서 인생이 많이 달라졌나 봅니다.

“그 후로부터는 사회가 어떻게 하면 잘살아지는 건가. 전쟁 이후니까 길거리에 가난한 사람들이 오죽 많겠어요? 길거리에. 그런 걸 가슴 아파하기 시작했어요. 나도 배고픈데 나도 잘못된 거지요.

사회 현실에 눈뜨고 싸움 잘 안 하고 책도 보고 꼴값을 하는 거야 이게. 주먹 계통에서는 ‘배추가 돌았다’는 말도 나왔대요.”

-친구가 큰 영향을 끼치고 삶까지 변화시키는 것을 보니까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요새 사람들이 의리가 없어요. 사람이 근본이 되어야지 세상이 좋은 건데 자본과 재산이 근본이 아닙니까? ‘재산이 근본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지면 잡아갈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

그런데 무슨 주의라고 하는 게 ‘자본’이 ‘주의(主義)’가 된다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는 거지. 그렇게 되면 의리도 없고 경쟁에서 이기는 놈이 장땡이고 이기려니 모략하고 배신하고 이렇게 되는 거지. 그럼 잘된 놈은 잘된 놈끼리 모이고 안된 놈은 사그라지는 것 아닙니까. 지금 정치판에서 날뛰는 사람들 중에도 한동안 감옥에 같이 있었던 애들이 있는데 어떻게 해서 그쪽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씁쓸하신가요.

“백기완이는 나와 안 맞는 면도 있어요.

두목이라는 것은 안아줘야 하는 것인데 조금만 잘못해도 소리소리 지르고 호되게 하니까 머리 큰 사람들이 그걸 견뎌내겠어요? 그래도 요즘 씁쓸한 건 노나라 때(노무현 정권 당시) 만세 부르던 아이들이 민주투사라고 날뛰었잖아요. 그 아이들이 백기완 사무실을 거쳐간 아이들이거든요. 거의 대부분이 그래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반독재 운동을 한 사람들을 민주 인사로 안다고.

물론 반독재도 좋아요. 그렇지만 ‘민(民)’이 ‘주(主)’가 되는 운동을 한 게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보니까 민주가 진짜 뭔지 모르죠. 민주를 안 하잖아. 못 했잖아. 하고 싶어도 민주가 뭔지 모르니까요.”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재야운동의 흐름을 한쪽에서 묵묵히 지켜보셨습니다. 자서전에는 백기완 선생이 정치권에 발을 들였을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점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거예요. 당시에 저에 대해서 백기완의 경호실장, 경호대장이라고 소문이 나긴 했는데 저는 기완이 근처에 가질 못했어요.

백기완이 사직공원에서 대통령 민중 후보 수락 연설을 할 때였는데 저는 반대했어요.

‘네가 할 때가 아니다. 도저히 터지지 않으면 안 될 때 나가자. 학생들 몇몇 만세 부른다고 너 찍는 거 아니다’라고. 그런데 그때 나가더라고요. 그 이후로 나는 접근조차 어려워지고요.

학생들, 시민사회 단체 사람들이 되기도 전부터 모여들었죠. 그런데 몇 표 못 받고 망조가 드니까 내가 다시 사무실 드나들게 되고 결국 뒤처리를 했지요. 다 백기완을 떠났죠.

도리어 주먹 쓰고 싸우던 불량자 의리보다 (그들의 의리가) 더 엉성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죠.

의리나 우정을 얘기하면 지능이 낮은 것으로 치죠. 근데 그건 백기완이뿐 아니라 누구나 그렇고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을 거예요.”

-‘조선의 3대 구라’로 유명해진 것도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해 재야 쪽 인사들과 어울리면서부터 아닙니까.

“깡패니 싸움 잘하느니 하는 게 사실 언짢은 일이라도 그걸 갖지 못한 사람들은 동경을 하나봐요.

황석영이나 백기완이나 다른 국회의원들도 자기가 없는 것을 가진 나를 과대포장해서 만들어 놓고 나를 잘 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말을 잘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 바람에 내가 유명해진 것 같아. 황석영과 백기완과 나를 3대 구라라고 하는데 스타일이나 이야기 내용부터가 다르지요.

황석영이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이야기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인생파 구라니까요.”



어머니 그리고 노느메기 공동체

-64년 독일에 광부로 가서 일했습니다.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한 것입니까.

“우리 어머니가 사위가 쏜 총에 맞았어요. 둘째 동생이 남편하고 헤어졌는데 그때 승강이 때문에 그랬죠. 사실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우연히 시험을 보게 된 것이었는데 어머니가 출국 예정일 바로 전날 그런 일을 당하시니까 난리도 아니었어요. 동생들도 어머니가 이런 상황인데 가면 되겠느냐고. 그런데도 그냥 돈 벌러 가겠다고 했어요. ‘어머니 제발 살아계시라’ 속으로 기도를 하면서 떠났죠.

계속 한국에서의 일들이 떠오르고 오버랩되고 했지만 열심히 일했어요. 술도 끊었죠. 주말에 일을 하면 휴일수당까지 주기 때문에 자청했고, 또 야간에 일하면 야간수당도 붙어서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벌었어요.

한 달에 400달러 벌었는데 그때 보통 다른 사람들은 120달러를 벌었죠. 집에 돈을 악착같이 부쳤는데 그 돈으로 도곡동에 국민주택인가 13평짜리 아파트를 샀어요. 어머니도 다행히 기적처럼 깨어나셔서 안정이 되어갔죠.”

-광부 생활이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우리나라 무연탄 공장은 넓은 탄광에 들어가서 캐는데 거기는 탄층이 얕기 때문에 누워서 일을 해야 해요. 삽자루를 짧게 잘라서 힘을 주려니 그게 지렛대 원리가 작용할 수 있어요? 무조건 힘을 써야 하는 일이죠. 또 무릎으로 서서 지탱하는 일이 많은데 거의 기어다니는 거예요. 힘들죠.

독일에서는 탄광 천장을 받치는 쇠기둥이 있는데 나올 때 광부가 그걸 가지고 나오면 개당 10달러씩 쳐줘요. 왜냐면 그 받침대가 100달러 정도로 비쌌는데 광부가 그것을 가지고 나오다가 갱이 무너져서 다치거나 죽을 수가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목숨 걸고 비싼 걸 건져오면 수당을 준 것이죠.

그날도 그걸 메고 나오려는데 천장이 내려앉은 거예요.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나면 산 거고 안 깨어나면 죽은 거였는데 눈이 떠지더라고. 그런데 기억이 없는 거예요.

어머니 이름, 내 이름, 여기가 어디인지 등 다 알고는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는 거야. 나와 무관한 것 같고 괴롭고 그랬어요. 하루 종일 창밖만 보고 있었는데 같이 일하던 네덜란드인 동료가 기억이 돌아오도록 이것저것 얘기도 해주고 그랬나봐요. 보름 만에 돌아왔어요.”

-3년의 광부생활을 마치고 또 바로 프랑스 파리로 가셨습니다. 별다른 계획이나 생활 대책이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습니까.

“우리나라는 그때 군사정권이니까 억압적인 분위기지만 외국은 자유스럽잖아요. 게다가 내가 독일에서 3년째 되던 해에 동백림 사건이 있었어요.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죠. 그리고 집에 갈까 했는데 베트남 전쟁이 터졌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프랑스에 가서 공부 좀 하고 들어가자는 생각이 들었죠. 접시닦이 하면서 불어 공부를 했지요. 돌아와서는 ‘살롱 드 방’이라는 양장점을 차렸는데 인기도 꽤 있었어요.”

-돌아와서 바로 노느메기밭을 일구러 강원도로 떠났습니다.

“자급자족해서 삭막하고 각박해지는 이 세상에 서로 함께 산다는 꿈을 품었지요. 노느메기밭은 노나메기에서 나온 말이에요. 수확농산물의 공동분배란 뜻이죠. 그래서 밭 이름도 그렇게 지은 겁니다.

하루에 삽 7개까지 부러뜨려 가면서 직접 개간했어요. 몸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땅이 쓸모 있게 변해가고 그 자체로서 가장 기쁜 나날들이었어요.

제가 철원에 100만평을 얻어서 있던 곳이 580고지인데 산이 평평했어요. 발밑으로 봉우리가 있고 거기에 구름이 쫙 끼곤 했는데 살짝 물러나고 나면 그 위로 해가 비추는 것이 보입니다. 구름이 굉장히 빠르게 움직이면서 오색찬란하게 변하는 풍경이 보여요. 그런데 서 있으면 좋지요. 그것도 4년 정도 했나.

빨갱이라고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잡혀가게 됐어요. 재야인사라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하니까.”

-74년 간첩혐의로 잡혀가면서 노느메기밭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고 들었습니다. 86년에도 또다시 고초를 당했습니다.

“대구 대공분실로 끌려갔어요. 제가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 반체제 인사들과 교류했다는 것이었죠. 김일성과 무전교신을 했던 암호를 대라고 하면서 몽둥이찜질과 전기고문을 했죠. 그러고 나서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어요. 6개월 있다가 나왔지만 노느메기밭을 잃은 상실감이 엄청났죠.

이후 86년에는 당시 민주화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이었던 김태홍이 ‘말’지의 보도지침을 공개해서 수배됐는데 광주까지 보디가드를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 건으로 결국 고문기술자 이근안까지 만났죠.”

-살면서 이것만은 참 후회된다는 순간이 있으세요.

“내 생각에 지금까지 도움만 받고 살았다는 것이 참 후회됩니다. 저를 참 많이 도와줬던 분이 선우휘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에요. 내가 노느메기밭을 꾸리는데 선뜻 돈을 내주었고, 내가 힘들 때면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었습니다. 다시는 선우휘 형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중동에 나갈 때 비자를 받는 일까지도 힘을 빌려야 했죠.

85년에는 선우휘 형이 술병을 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왔어요. ‘네가 동지들 위해서 총대 한 번 메라’라면서 저를 설득했지요. 정권 쪽에 발 하나 들여놓아야 운동하던 친구들 뒤를 봐주고 쌀이라도 사줄 수 있지 않으냐는 거였죠. 다름이 아니라 대통령의 비선에서 일하라는 거였어요.

펄쩍 뛰었더니 ‘내가 얼마나 어렵게 말을 꺼내고 있는 줄 아느냐’며 설득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참 그게 안 됩디다. 내가 소인배니까 배신자, 나쁜 놈 소리 듣기 싫었던 거죠. 선우 형은 ‘아주 큰 그릇은 못 되겠구먼’이라고 하더니 앞으로 그런 이야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내가 생각해도 그래요. 그래도 그건 못 하겠습디다.”

-앞으로 남은 꿈은 무엇인가요.

“ ‘그냥 맥없이 살지는 않는다, 뭐라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면 된다는 것을 늙은이가 보여주고 싶어요.

노인들에 대한 정책이 일단 잘 안 되어 있고, 정책이 되어 있다고 해도 노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안 돼 있다고 생각해요. 마냥 지원금만 바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내 생각에는 노인들도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사실은 보디빌딩 대회에도 나가는 것이고요. 서울시 대회에 지난번에 나갔었고 이제 전국대회에 나갈 자격도 얻었습니다. 내년에 도전할 테니 꼭 지켜봐 줘요.”

/ 경향 2008.12.11.

 

 

방동규 씨(76)는 지난해 75세의 나이로 미스터코리아대회에서 당당히 입상했다.

"내 몸의 전성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그는 주민등록 상의 나이와 몸의 나이는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방 씨는 1974년, 시대의 희생자로서  남들은 한 번도 견디기 힘들다는 고문을 2번이나 참아냈다. 그는 그 후로 이유 없이 일 년에 두어 번씩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껴왔다고 호소했다.역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그의 몸. 그에게서 몸의 또다른 의미를 찾는다.
/ SBS인터넷뉴스부 2009.06.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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