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
민중미술은 제2차 세계 대전이후 독립한 신생 공화국들이 제 3세계 블록을 형성하여 독자적인 행보를 하고자 했던 세계사적 배경 하에서 생성되었다.
종속이론과 해방신학이 부상되었고 정치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식민주의 극복과 민권, 인권의 확장을 위한 행동이 꾸준히 일어났다.
식민지를 강점했던 유럽과 북미 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사회경제적 종속 탈피와 자립 모색, 문화적 자긍심 회복과 역사 및 전통문화의 온존한 복원, 그리고 사회구성원 다수의 교양증진과 품격있는 삶을 위한 예술 창작과 보급은 시대적 과제였다.
우리나라, 한국은 남북분단과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세력이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기저에 깔고 차관을 들여와 특혜를 주며 대기업(재벌)을 육성하며 수출 중심의 고성장 시장정책을 펼쳤다.
“선성장 후분배” 내세워 국민을 설득하고 잘 살아보고픈 욕망을 동력화하여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으나 공화국의 공민(公民)인 사회구성원의 인권과 민권의 신장은 강하게 억눌렀다.
장기집권 19년, 개발 독재의 시효가 끝났음에도 신군부는 재집권을 시도하였으며 이로 인해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광주에서는 유혈 참극이 있었으나 언론 통제로 수년간 은폐되다 1984년 즈음에야 대다수 국민대중에게 실상이 알려졌다.
4.19와 5.18의 자장 안에서 성장한 작가들은 1984년 후반기부터 민중미술로의 지향을 본격화하였는데, 그 전에는 현실에 대한 (미술) 발언, 자유실천 미술, 산 그림 · 시민미술 등 미술소집단 마다 달리 표현하였다. 미술계에서도 신표현주의, 신형상주의, 현실주의 미술 등 가닥잡기에 따라 명명이 달랐다.
한국 민중미술은 1969년 결성되어 첫 전시를 시도하다 외압에 의해 무산된 ‘현실’ 동인 제1 선언문으로부터 이론 생성의 자양분을 제공받았다.
“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다. 참된 현실은 생동하는 현실의 구체적 반영태로서 결실되고 모순에 찬 현실을 맞받아 대결하는 탄력성있는 응전능력에 의해서만 수확되는 열매다. ”
민중미술운동의 전위를 자처한 이들은 12.12 신군부 쿠테타 주역들이 조성한 정국을 타개하는데 앞장 선 서울과 광주의 청년작가들이었다. 이들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5.18에서 문화선전대로 활동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민중문화운동에 제일 먼저 합류한 작가들도 이들이었다.
민중미술은 크게 비판적 현실주의(Realism) 계열 (‘현실과 발언’, ‘임술년’, ‘시월모임’ 동인), 민중적 현실주의 계열 (‘두렁’ 동인과 ‘일과 놀이’_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後身, ‘가는 패’, 서울미술공동체, 수원의 ‘나눔’, 인천의 갯꽃, 안양의 ‘우리그림’), 노동계급 현실주의 (그림패 ‘엉겅퀴’_노동미술진흥단 後身과 걸개그림패 ‘둥지’, 노동미술위원회) 계열, 변혁적(당파적) 현실주의(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미술분과, 미술비평연구회) 계열, 자주적 현실주의(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비판적 현실주의 계열의 미술동인 가운데 맏형 격인 미술그룹은 ‘현실과 발언’이었다.
세계 미술사에 등장하는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은 선언문 발표를 통해 자신들의 지향을 분명히 하는데, 현실과 발언의 선언문은 이렇다.
“ 미술이란 진실로 어떤 의미를 가지며, 미술가에게 주어진 사명은 과연 어떤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다해 나갈 것인가? ... 미술의 참되고 적극적인 기능을 회복하고 참신하고도 굳건한 조형이념을 형성하기 위한 공동의 의식의 심화와 연대감을 조성함으로써 새시대를 향한 예술의 전개에 창조적인 역할을 발휘하겠다. ”현실‘과 ’발언‘이라는 명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함축하고 있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미술가에게 있어 현실은 예술 내부적 수렴으로 끝나는가, 혹은 예술 외부적 충전(充電)의 절실함으로 확대되는가? 발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발언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누가 발언자이며 무엇을 향한 발언인가?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발언인가? 발언자와 그 발언을 수용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발언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어디서, 어떤 효율성의 기대 아래 이뤄져야하는가?“ _ 1979년 12월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은 작가 못지않게 다수의 비평가가 함께 하였다.
민중미술은 동시대 이웃 예술 장르와의 교류와 협업을 통해 상호 촉진하며 진화하였다.
문학에서는 이미 판소리 풍의 담시(譚詩)가 출연하여 강력한 풍자시로 정국을 뒤흔든 역사를 축적하고 있었고,
공연예술에서는 풍물굿과 탈춤의 구성 원리를 응용한 마당극, 마당놀이, 마당굿이 급속히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창작 민요와 국악 풍의 노래가 작곡되고 노래극과 가극이 야외무대에 올려졌다. 마당춤이 펼쳐졌고 거리굿이 시도됐다.
시각예술에서도 괘화 풍의 걸개그림이 급부상하고 창작탈이 빚어지고 굿그림, 깃발그림이 공연판과 대중집회에 등장했다.
이것은 한국 전통예술을 발굴 계승하며 이것에 내재해 있는 특장점을 진보적 예술 실험 속에서 창조적으로 변용(變容)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대학가에서는 탈춤 동아리에 이어 풍물, 민요, 노래, 민화, 판화, 만화 동아리가 확산되고, 축제는 대동놀이로 전환하였으며
시민 사회영역 곳곳에서 풍물패가 생성되었다.
민중미술의 주체 형성을 중시했던 민중적 현실주의 계열 미술그룹은 무속화, 불화, 민화 강좌와 함께 판화강좌를 열며
청년학생 중심의 동아리와 노동대중 중심의 동아리 생성을 추동하였고 종교계의 후원 하에 시민미술학교(판화교실)가 광주로부터 북상하며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우리나라 미술운동 가운데 전 계층, 전 연령층으로 미술운동의 가치가 공유되고 보급과 향유, 참여와 행동이 이루어진 드문 사례를
민중미술은 1980년대 후반기에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민중미술은 다 갈래의 미술 실천영역을 개척하였다.
판화, 만화, 괘화(걸개그림), 벽화, 생활미술, 미술교육, 여성미술, 노동미술 영역 등등
대중언로가 검열되고 인쇄소와 복사가게가 통제되는 시대 상황 하에서 수공작업으로 다량 복제가 가능한 판화는 작가들이 게릴라식 예술행동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여준 매체였다.
판화는 공연예술과 집회의 포스타, 시집의 표지화나 삽화로 쓰여졌으며 옆서와 연하장, 달력으로 제작되어 넓게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미술호혜시장 형성을 가능하게 하며 활동기금 조성에도 일조하였다.
만화는 누구나 친밀하게 접할 수 있는 매체로서 노동조합 교육용 학습만화나 농민회 교육용 학습만화로 제작, 보급되었다.
신군부의 강압통치가 한계에 이르자 이 틈을 비집고 비정기 간행물 무크(Mook)지의 시대가 열리면서 단편극화가 수록 되었다.
노동자들의 결집과 연대가 강화되자 노동자신문이 발간되고 정치풍자가 가능한 만평과 5단 만화가 선을 보였다.
만평 ‘깡순이’의 작가가 구속되었으나 뒤이어 노동자만화신문이 창간되었고 연재 극화 제작과 단행본 발간도 빈번해졌다.
사찰의 괘화를 변용한 걸개그림은 군중집회를 달구며 시위하는 그림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걸개그림은 고층건물에 내걸려 집회의 주제나 핵심내용을 농축하여 시각적으로 웅변해냄으로써 모임의 취지나 의의를 강렬하게 대중들에게 전달할 뿐아니라 대중집회의 분위기를 고양시켰다.
외신을 통해 세계로 타전되어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시각예술 장르가 되었다.
공동창작 또는 협동창작으로 산출된 것이 대부분이며 제작과 연출을 책임지는 주필이 있었다.
벽화는 제3세계미술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멕시코 혁명벽화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작가들의 작업실 외벽과 작가가 살고 있는 집 담벽부터 작업이 들어갔는데 작품 내용이 도전적이고 시위를 연상케 한다며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지워졌고 작가들은 광고물관리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벽화는 벽화에 대한 애정을 갖고 이를 지켜줄 대중조직 (농민회, 노동조합, 총학생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작가들은 벽화를 공동체 기반 미술의 하나로 진화시켰다.
생활미술은 민중들의 일상적 삶의 공간에 안착되어 위로와 격려가 되고 꿈과 용기를 북돋는데 한몫을 하거나 삶을 곱게 하는데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공예, 디자인 전공자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작가들의 장터미술로 많이 소개되었으며 이를 전문적으로 제작 보급하는 공방도 여럿이었다.
우리옷(개량 한복) 입기와 맞물려 곳곳에 매장이 개설되고 생활미술품을 전업적으로 기획 보급하는 기획사도 생겨났다.
시민사회단체 기금 마련 바자회의 단골품목이 되었다.
민중미술운동에 동참한 작가들 가운데 미술교육자가 많았다.
그들은 작품 창작과 보급 못지않게 교육현장을 중시하였다.
미술교육의 지향을 새롭게 하며 미술교육 방법론을 개발 공유하였다.
하향식 기술교육, 주입식 암기교육, 자폐적 예술지상주의 교육을 지양하였으며 모두가 적극적인 미술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본래 위치를 회복해야한다는 기본인식 아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 나름의 표현방식을 최대한 발휘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미술교육의 초점을 맞추었다.
자신들의 삶과 미술을 밀착시키도록 하며, 될 수 있으면 공동제작을 통해 공동노력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미술의 사회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교육 성과물은 집적되어 『신나는 미술시간』(1990년 푸른 나무)으로 엮였으며 매년 새 산출물이 소개되었다.
민중미술 작가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페미니스트 (Feminist)였다.
페미니즘(Feminism) 미술이란 “여성이 성차별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에 따른 여성문제가 파생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 사회문화 제 영역에서 급진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시각” 속에서 창조된 미술을 일컫는데, 80년대 미술계에서는 여성(해방)미술로 주창되었다.
여성미술운동의 기관차로 여성미술연구회가 출범 (1987년 결성)하였고 내부에 걸개그림패 ‘둥지’와 만화패 ‘미얄’을 두어 여성만화신문을 발행하며 여성운동단체들과 항시적으로 연대 실천했다.
노동미술은 민중미술의 밑둥지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형제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노동형제들의 꿈, ‘계급사회가 철폐되고, 만민이 서로를 섬기며 더불어 나누면서, 창조적 노동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살맛나는 새 세상을 앞당기는 것’을 같이 이루기 위해, 사회를 혁신시키고자 안팎으로 투쟁하는 가운데 생장한 미술이다. 노동미술의 씨알을 품고 직접 현장에 들어간 작가들도 있고 노동대중의 미적 대리자이자 협동생산자가 되어 공동창작, 조직 창작에 참여한 작가들도 있었다. 대작(大作)은 노동조합 투쟁사 연작으로 축적되었다.
라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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