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떴다. 드디어...!
깨달음이 현학적인 표현에서 실제 삶으로 걸어 들어왔다.
하기사...
언제는 깨달음이 삶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단지 잊어 버리거나 망각한체로 흘러와 버렸던 거.
상실의 시대 속을 거치며 그 짙은 허무를 앞세워 잃어 버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체 하염없이 그저 꾸역꾸역 여기까지 왔던 거.
그동안 꾸역꾸역 쳐먹은 것이 소화되지도 못하고서.
체증의 시대를 거쳐 이제 소화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달이 떴다. 드디어...!
깨달음이 삶속에서 실현되지 않거나 삶과 연관이 없다고 여긴 그 모든 편견들은 가라.
삶과 괴리된 체로 흘러오며 허공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고 여기던 뜬구름 잡던 망상은 이제 가라.
마음안에 달이 하나 떴다. 지지 않을 달.
가려져도 끝내는 다시 드러날 달.
삶속에서 깨달음이 필요치 않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내 삶과 그 상관관계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어렴풋이 아는 사람들만 읽으면 된다.
모든 깨달음은 삶 그자체에 반영이 되어야 한다.
그럴때 깊은 허무를 털어낼 수 있다.
깨달음이 어디 고정되어 있는 물건이나 형상 정도로 생각하다거나,
어떤 방식이나 법식 정도로 생각한다거나,
누군가 반드시 전달해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거나,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따듯이 뚝 딸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만둬라.
내 마음이 깨달음으로 가득찬 세상과 자연과 서로 상호작용 하는 끝에 깨달음은 발견 된다.
세상은 이토록 복잡하고 암담한데 깨달음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니? 말이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암담하고 복잡한 세상은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다.
어디로 접속하든지 무엇을 통하여 접속하든지 지극하면 통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지극함이란 무엇일까?
열심히만 하면 되나?
무조건 노력만 하면 되나?
마음을 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상호작용 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기본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무엇을 보아야 하나?
마음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마음은 언제라도 허무를 넘어서고자 한다.
비참을 넘어서고자 한다.
중심과 중심이 통하고자 한다.
이것을 알때 사람은 노력하게 된다.
이때 지극함이 빛을 발한다.
상호작용은 어떻게 해야 하나?
관계를 떠난 것은 없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좌표를 찍어야 한다.
네비게이션을 통해 길을 찾아 가듯이 자신의 위치를 찍을 줄 알아야 한다.
좌표가 확인되면 포지션이 드러난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게된다.
이럴때 상호작용은 빛을 발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이 선행되어야 깨달음으로 가득찬 세상과 통하게 된다.
마음에 비로소 달 하나 뜨게 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팔아 먹지도 말아야 한다.
도둑 맞지도 말아야 한다.
지켜야 할 것은 이것이다.
이로서 자기다워진다.
스타일이 나타나게 된다.
이 스타일로 다시 세상과 만난다.
이 스타일로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두 번 생각하면 보인다.'
한 번 반전은 인생이 쏘아진 화살임을 깨닫는 것이다. 두 번 반전은 그 화살이 날아가면서 또 다른 화살을 쏘는 것이다. 한 번의 반전으로 결을 드러낼 수 없다. 두 번 뒤집을 때 결이 드러나고 그 결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소실점이 찾아진다. 전체를 하나의 소실점에 연동시킬 때 견고한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그 스타일의 견고함에 의하여 관계가 드러난다. 상부구조가 관측된다.
'생활의 발견'
행복한 돼지보다는 고뇌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했다. 방그라데시에서의 행복보다는 프랑스에서의 불행이 낫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생존하기의 행복보다는 생활하기의 행복이 더 절박한 가치가 된다. 그렇다면 먼저 생활의 존재 그 자체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대 생활을 발견하고 있는가? 그 비참까지도 파악하기에 성공하고 있는가?
마저 한마디....
' 끽다거 '
선불교에서 차의 공안이 생겨난 이래
차로서 도(道)를 추구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차(茶)로서 도를 추구하는 경우는 일본이 대표적이다.
'다도' 는 그러한 도를 추구함의 지극함을 양식화 시켜 놓았다.
한 사람의 스타일의 결정판이다.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다도가 권력과 맞물리면서 하나의 스타일인 다도는 고정된 불변의 것으로 인식되어 갔다.
한 사람의 스타일을 모두가 따라함으로 인해서 '다도는 곧 도(道)다' 로 인식되어 버렸다.
' 다도가 바로 도이다.' ?
아니다. 다도는 도를 추구하는 하나의 방편이자 방법일 뿐이다.
다도가 곧 도는 아니다.
다도는 도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전체가 아니다.
다도는 한 사람이 만들어낸 스타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스타일이 전체로 퍼져서 모두가 같이 추구하면 나쁜 것일까?
아니다. 비틀즈도 싸이도 모두 하나의 스타일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듯이 이것은 전부가 아니다. 그 시대의 아이콘이다. 그 시대의 방향성인 시대정신이 있었다.
이렇듯 계속 시대가 바뀌어 가도, 그 시대를 읽어내는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될 뿐이다. 이것을 알면 된다.
다도가 곧 도라고 인식되어진 탓에 다도를 하면서 도를 추구한다고 한다.
일부분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부 맞는 말은 아니다.
다도가 무엇인지 알고 추구한다면 그것은 도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도를 한다고 해서 도(道) 그 자체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깨달음의 반응점이 다르다.
한 가지 만으로 도를 보는 것은 아니다.
도를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한 다도라는 형식을 통하여 도로 갈 수는 없다.
그저 다도만을 하게 될 뿐이다.
이 시대에 사람은 누구나 도를 추구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시대에 다도를 보고 참고해야 할 것은 하나의 형식이 만들어져서 스타일로 드러났다는 바로 그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스타일도 만들어진 것이니 자신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스타일이 다 성공적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스타일을 만들어 내어도 한 두어 개 성공 한다. 한 두 개 확산되고 만다.
이 확산되는 것이 현대성이다. 지금 필요하고 지금 삶에서 같이 호흡하며 방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시대 사람들이 반응함으로 인해서 그 스타일은 하나의 스타일로서 인정 받게 된다.
그러나 개인이 세상속에서 관계를 통하여 살아가는 동안에 개인의 스타일도 중요하다.
자기다워지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자기만을 주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이 소통하게 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다도는 만들어진 이래 몇백년동안 사람들에게 스타일로 받아 들여져 양식화 되었다.
삶속에서 같이 호흡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다도의 참 뜻은 여기에 있다.
다도가 일본에서 현대성이 없었다면 , 그 나라에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면 다도는 스타일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다도는 일본에서 방향을 제시했기에 다도로서 생명력을 유지 했고, 그 생명력을 세계에 퍼트렸다.
부정적인 측면과 긍적적인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산업화 시대에는 다도가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이제 산업화 시대를 넘어가고 있다.
앞으로 무엇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리나라의 선불교는 다도처럼 어떤 고정된 스타일을 만들지 않았다.
선사들은 깨달음으로 자신의 스타일이 분명 있었지만, 다도처럼 획일화 시키지 않았다.
다양성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서는 깨달음으로 충만해 있다.
한국의 선(禪)은 질의 상태로 있다. 잠재적 상태로 가득차 있다.
그 부분과 접속하면 된다.
우리의 환경에 이미 잠재적 상태로 내재되어 있는 그것을 알면 된다.
다도는 이미 눈에 보이므로 배우기 쉽다. 그러나 다도를 배워 무엇인가 창의 한다면 계속 어색해지고 만다.
그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적 정서안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도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대표성을 얻게 될 것이다.
현대성을 갖고 있다면 확산성도 있고 방향성도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두가 만들어도 모두의 것이 다 대표적 스타일이 될 수 없다면,
우리의 것을 만들어서 우리의 것을 확산시키면 된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 것을 배우게 된다.
이리되면 우리것만 배워도 충분한 것이니 더이상 무엇인가를 굳이 하지 않아도 허전함은 덜하다.
모든 문화선진국들은 이 방식으로 흘러왔다.
스타일은 각 시대마다 대표적 그 시대의 스타일이 있었다.
조선의 유교적 선비스타일도 대표적인 예이다.
그 선비스타일로 조선은 하나가 되었다. 대표성을 얻은 것이다.
이 선비스타일도 유교적이기는 하나 선불교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둘은 닮아 있다.
방향성이 있는 것이다.
한국은 하나의 스타일이 계속해서 시대를 거치면서 그 시대에 맞는 스타일을 새로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그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는 느낌으로서 그것을 알고, 문화적 형태나 예술적 형태로 알 수 있다.
막연히 느낌으로만 아는 것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확인하면 더 감을 잡기가 쉽다.
일본의 건축과 한국의 건축을 비교해보면 그것은 더 분명해진다.
한국에 선차(禪茶)는 다도처럼 눈에 보여지는 형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도와 선차를 느낌으로 비교해 보아도 어떤 다른 느낌을 전달받게 된다.
다도 역시 선불교를 받아들이고 중국사찰에서 행해지던 다회를 받아들이고
조선의 절집문화와 조선의 선비 문화의 심플함을 받아 들이고 다구를 받아 들였지만
(이 부분은 아직 일본에서 인정 안하는 부분이지만)
이 모두를 일본에 맞게 융합하여 압축하고 군더더기를 모두 내보내고 정밀하게 세공하듯이 다도를 완성하였다.
다도는 이미 더 손댈 수 없게 완성된 작품과 같다. 여기에 무엇인가 더 같다 붙이면 볼썽사나워진다.
다도를 배워서 다도를 변형하면 어색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보인다.
이미 완성되어서 더이상 손댈게 없는 것에서 창의는 일어나지 않는다. 영감은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서 창의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러자면 아예 틀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집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다도에 뭔가 덧 붙일려면 실패다.
단지 다도에 필요한 뭔가를 조달할 수 있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의 선차는 현재 자연상태 그대로이다.
한국의 선차는 아직 그 무엇과도 결합할 수 있는 상태로 남아있다.
잠재적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이다.
아직 우리는 그 가능성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도 하나의 예일 뿐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서나 앞으로의 시대에서 사용한다 하여도
한국의 정서와 환경에 남아 있는 한국스타일은 그 가능성을 언제나 남겨둔다.
아마도 이러한 것이 한국스타일이 아닐까 쉽다.
누가 그 무엇을 한다해도 누가 스타일을 확산한다 해도 그것은 한국의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지
한국의 대표적 스타일이 되지는 아니한다.
부분부분이 모여 한국 스타일임이 드러나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은 잠재적 가능성을 다 소모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적 스타일을 완성해간다.
역사적 흐름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한국 스타일은 어느 시대에서 종결된 것이 아니다. 계속진행형이다.
그러나 스타일이 이미 만들어져서 백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그 스타일 것 같은 나라들도 있다.
지루하다. 한국은 지루하지 않다. 이 부분이 한국의 강점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우리가 우리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감으로서 전혀 새로운 우리를 만날 수도 있다.
누군가 혹은 다른나라 사람들이 지정해주고 알려준 한국이 아니라 혹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다시 알아냄으로 인해서 우리를 재발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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