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
현대 철학의 경향 – 데카르트<플라톤> 죽이기 + 니체 살리기 서양에서의 현대철학은 니체에서부터 시작함.
서양의 현대철학은 니체에서 시작한다. 근대 서양철학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의미한다. 즉 자아 개념과 생각한다는 사유로서의 이성 개념으로 성립된 데카르트식 근대철학의 기초를 허무는 것이다. 자아개념 이성주의 기독교의 신 개념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니체<1844 – 1900> - 1844년 라이프치히 근처 뢰켄 출생. 부친 루터교 목사. 모친 목사의 딸. 어린 시절 꿈은 목사. 작은 목사라 불림. 4세 부친 사망. 할머니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음. 20세 본 대학 입학. 라이프치히 대학 이적.
서양철학에서 니체만큼 기독교를 공격한 사람은 없다. 니체 사후 누이 동생이 저작권자 역할을 했다. 4세 아버지가 죽자 할머니 어머니 누이 동생의 여성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논문이 아닌 그 때 그 때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 남성적인 글이다.
니체 - 25세 스위스 바젤대학 고전문헌학 교수. 26세<1870년> 최초 저서 비극의 탄생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긴장. 35세<1879년> 두통과 불면증으로 교수직 사퇴. 병약함과 건강함의 갈등.
음악에 대한 비극의 탄생. 냉철과 격정적인 것의 화해 추구. 디어니소스적인 것을 강조. 자연과 세상과의 합일 삶에 대한 철저한 긍정이 니체 철학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교수직 사퇴 후 주옥 같은 저술이 만들어졌다.
니체 – 39-41세<1883-1885년> 대표작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2-42세<1886-1887년> 선악의 피안 도덕의 계보 – 도덕 상대성. 45세<1889년> 우상의 황혼-소크라테스, 기독교, 칸트 비판. 56세<1900년> 사망 20세기 현대의 시작.
선악의 피안 선악을 넘어선다는 말이다. 기독교적인 선악을 뜻한다. 기독교는 선과 악의 끝 없는 대결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절대성에 의해 악은 제거 되야 한다는 선악의 이분법인데 이런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불교와 상당히 통한다. 불교는 불사선 불사악이다.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 우상의 황혼은 소크라테스 기독교 칸트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1889년 니체는 미쳐 길에서 쓰러진다. 10년 간 그 상태로 회복이 안 되다 56세 사망한다. 10년간의 창작활동이 100년간의 현대철학을 결정 짓고 있다.
아버지가 뇌질환으로 죽었기 때문에 자신도 미쳐 죽었다. 니체 사상 속에는 근대적인 요소와 탈근대적 요소 즉 현대적 요소가 혼재한다. 현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상가다. 인간은 죽어가는 자이고 신은 죽지 않는 자다. 삶의 고통 속에서 살 수 밖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삶을 긍정하자 이다. 이 그리스 비극 정신이 니체 철학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반 기독교적일 수 밖에 없다. 삶의 긍정이 니체 철학이다. 삶을 가장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기독교다. 왜냐 하면 기독교는 이 세상과 저 세상 차안과 피안 이분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부정해버리고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저 세상에 의존해 당연히 존재하는 이 세상의 삶을 부정한다. 이렇게 보면 삶을 긍정하고자 하는 니체 입장에선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비판은 신을 죽이는 것이다.
삶의 긍정은 삶의 강화로 볼 수 있다. 삶 속에서 강한 주인이 되자. 기독교는 신이 나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니체는 신이 되고자 한 것이다. 삶의 단순한 긍정을 넘어서 삶의 강화로 나가기 위해서는 신을 죽이는 데서 더 나아가 내가 신이 되야 한다. 신이 된 인간이 바로 초인이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누구나 다 아는 말이지만 이 말과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없다. 기독교 입장에선 부정하고 싶은 말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이성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된다. 신은 그리스인 입장에서 봐도 죽지 않는 자다. 그런데 죽지 않는 자가 죽었다. 말이 안 된다. 이성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근대철학의 이성주의를 강력하게 공격한 것이다. 신은 죽었다 에서 이성의 공격을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 식으로 보면 창조주가 죽었다.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가 죽었다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창조주에 의해 피조된 인간도 죽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인간은 살아 있다. 그러니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간다. 신이 죽고 난 후의 새 인간 더 이상 신에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스스로 주인이 되는 인간이 초인이다. 이렇게 보면 신은 죽었다는 말은 무척 난해한 이성의 한계다.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의 주장으로 이어져 간다.
즐거운 학문<1882년> 125번 광인 –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그대들은 저 광인에 대해 들은 적이 없는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 들고 광장으로 달려 나와 나는 신을 찾는다!<Ich suche Gott!> 나는 신을 찾는다 라고 끊임 없이 외치던 저 광인에 대해서 말이다. 마침 광장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기에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신이 행방불명 되었나 보지? 라고 어떤 사람은 말했고 신이 어린 아이처럼 길을 잃었나 보지? 라고 다른 사람은 말했다. 아니면 신이 숨바꼭질 하나 보지? 신이 우리를 두려워하나 보지? 신이 배를 타고 떠났나? 아니면 신이 이민을 갔나? 라고 그들은 떠들썩하게 소리치며 비웃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이 명시적으로 가장 의미 있게 쓰여진 것은 즐거운 학문이다. 여기 신을 찾는다고 나오니 기독교인들은 니체는 신을 찾는다는 점에서 철저한 기독교인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 말은 신이 어떤 상황인지 찾아보겠다는 의미다. 오늘날 유럽은 20% 정도만 기독교인이다. 그러니 이민 갔다 말하는 것이다. 현재 기독교의 신이 가장 왕성하게 남은 곳은 아메리카 밖에 없다. 아시아 필리핀 한국의 개신교 빼고 유럽에서 떠난 신은 미국으로 이민 갔다 볼 수 있다.
광인은 그들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그들을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신이 어디로 갔냐고? 그는 소리쳤다. 내가 그대들에게 말해 주마!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Wir haben ihn getoten!> 너희들과 내가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의 살해자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일을 했을까? 어떻게 우리가 바다를 다 마셔버릴 수 있었다는 말인가? 지평선을 모두 닦아버릴 수 있는 해면을 누가 우리에게 주기라도 했던 것인가? 이 지구를 태양의 사슬로부터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지구는 이제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
너희는 서양인 모두를 말한다. 즉 인간이 신을 죽여버렸다는 말이다. 바닷물을 마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정도로 신을 죽인다는 말은 엄청난 일이다. 해면은 스폰지다. 신을 죽이는 자라면 지평선을 없애는 정도는 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Wohin bewegen wir uns?> 모든 태양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계속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말이다. 아직도 와 아래가 존재하는가? 우리는 무한한 무를 통과하는 것처럼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Irren wir nicht wie durch ein unendliches nichts?> 텅 빈 허공의 숨결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 추워지지 않았는가? 더욱 더 칠흑 같은 밤이 계속되지 않을까? 밝은 대낮에도 등불을 켜야 하지 않을까?
지동설 지구가 태양을 도는 이 것 조차도 신에 의해 유지된다고 보는 데 신이 죽었다면 이 질서도 깨져야 한다. 원심력과 구심력의 긴장이 깨지면 떨어져 나간다. 신이 죽었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신이 죽은 이 후의 방향 상실을 말한다. 무한한 무는 허무에 빠졌다는 말이다. 인간을 그 때까지 유지해 왔던 최고의 가치인 신이 있어 뒷받침 해주었던 발판이 없어졌다. 기독교는 신을 빛과 일치시킨다. 빛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어두움은 악을 상징한다. 이런 이분법적인 것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 바닥에 들어선 자신의 입장을 표현한 것이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암흑이라 봤고 그래서 등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신을 매장하는 자들의 소란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신의 시체가 부패해 가는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하고 있는가? 신도 역시 썩는다! 신은 죽었다! <Gott ist tot!> 신은 죽은 상태다. 그런데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살해자 중에서도 살해자인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까?
매장할 때 조용히 매장하면 암매장이다. 장례식 때 아무 소리 안 하면 섬찟하고 무섭다. 다들 죽음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 때 일수록 더 많이 떠들게 된다. 미안하지만 죽은 자가 안타까워 운다기 보다 내 운명이 슬퍼서이다. 통곡해서 조용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이 죽었다는 데 어떻게 그 소리가 안 들리냐 이 말이다. 신이 죽으면 썩는 냄새가 나는데 왜 못 맡느냐는 것이다. 이 정도면 신의 썩은 냄새가 난다는 말이다. 완전히 죽어버렸다. 창조주라면 썩지 않는다. 그러나 만들어진 것은 썩는다. 니체는 신은 인간의 억측과 추측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력의 산물로 본다. 그러니까 썩어서 냄새가 난다 보았다. 신은 죽어서 끝났다. 진행형이 아니고 완료형이다. 누가 죽였나? 니힐리즘을 극복할 사람은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이다.
세계가 이제까지 소유했었던 가장 신성한 것 가장 강력한 것 그 것이 우리의 칼로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던 것이다. 그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가 몸을 씻을 수 있을까? 어떤 속죄의 의식을 어떤 성스러운 제전을 우리가 거행해야 할 것인가? 이런 행위의 위대함은 우리에게는 너무 엄청난 일이 아닐까? 그 것을 해낼 만한 자격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신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 아닌가? <Mussen wir nicht selber zu Gottern warden?>
피투성이는 원죄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추방되어 피투성이 카인의 후예가 되는데 동족의 살상 형제의 살상이라는 그 피가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신을 죽이는 그 피라고 본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그 피가 아니라 인간이 신을 죽여버린 피다. 속죄의 의식은 바로 초인의 등장이다. 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들이 신이 되어야만 한다. 여기 분명히 나온다. 왜 죽였냐? 우리가 신이 되기 위해 죽였다. 인간이 죽인 신은 유일신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이 되면 단수에서 복수가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죽이고 되고자 하는 신은 그리스의 다신이다. 유태적인 기독교의 신을 죽이고 그리스적인 다신으로 우리 자신이 되자는 말이다. 그리스 고전문헌학자의 통찰이다.
이 것보다 위대한 행위는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뒤에 태어나는 자는 모두 이 행위 덕택으로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역사보다도 한층 고귀한 역사에 속할 것이다! 여기서 광인은 입을 다물고 청중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역시 입을 다물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등불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등불은 산산 조각이 나고 불은 꺼져버렸다. 나는 너무 일찍 왔도다! 그는 계속 말했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무시무시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배회 중에 있다. 그 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당도하지 못했다. 번개와 천둥은 때가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미 행해진 행위라도 보이고 들리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행위가 인간들에게는 아직도 가장 멀리 있는 별보다도 더욱 멀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런 일을 이미 저질러버렸던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광인은 그 날 여러 곳의 교회에 뛰어들어 자신이 작곡한 신의 영원진혼곡<Requiem aeternam deo>을 불렀다고 한다. 밖으로 끌려 나와 심문을 받자 그는 오직 다음과 같은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이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유일신을 죽이고 다신이 되고 인간이 초인이 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고귀한 역사라 보았다. 이제까지 기독교에 의해 유지돼 왔던 서양의 역사는 천박하다 말한다. 등불은 밤과 낮의 이분법이 존재하는 동안만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죽었으니 등불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너무 이해 못하니 등불이 별 의미가 없어 깬 것이기도 하다. 소리를 못 들으니 교회에 뛰어들어가 아예 자기가 연주를 해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교회와 사제를 공격한 것이다. 니체는 예수님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대목들도 많다. 왜냐 하면 철저하게 진리를 왜곡하는 공간이 성속 교회와 시장으로 모두 왜곡의 공간으로 본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1885년> 한층 더 고귀한 인간에 대하여 2번 신은 죽었다 <Gott starb>. 신 앞에서!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어버렸다! 그대들 한층 더 고귀한 인간들이여. 이 신은 그대들의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가 무덤 속에 누운 후 그대들은 비로소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제서야 위대한
기독교는 신 앞에서의 평등을 말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 세상엔 고귀한 인간과 천박한 인간이 분명히 있다 말한다. 인간이 신처럼 강력한 주인이 되자는 강력한 인간중심주의를 말한다. 인간이 신이 되자 인간이 부처 되자는 점에서 보면 묘하게 불교와 통하는 점이 있다. 니체는 인간이 주인이 되자는 뜻에서 신은 죽었다 한 것이다.
이상 13강.
[출처] 553.신은 죽었다|작성자 Ink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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