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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니체의 자평을 포함한 여타 석학들의 평가

한적한길 2018. 5. 17. 17:46
"나의 책 중에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준 것이다. 앞으로 수백 년 동안 퍼져나갈 목소리를 가진 이 책은 현존하는 최고의 책이며 저 높은 산정의 공기이자 인간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저 아득한 밑바닥에 놓이게 만드는 고산이다. 이 책은 또한 마르지 않는 샘, 두레박을 내리면 황금과 좋은 것들이 가득 담겨 올라올 풍요의 샘이다. 이 책에는 어떠한 예언자도 없고 종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질병과 권력욕, 그리고 이 양자가 합쳐진 소름끼치는 혼혈아도 없다. 이 책에 담긴 지혜의 뜻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가락을 똑똑히 들어야 한다.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장 조용한 말이다. 비둘기걸음으로 오는 사상만이 세계를 이끈다.’”

-- 프리드리히 니체,『이 사람을 보라』 중에서


“... 우리는 ... 저 서정적인 작품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검토함으로써, 시인이 사상가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니체는 수직적인 시인, 정상(頂上)의 시인, 상승하는 시인의 전형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천재란 단지 혼자만으로도, 개인적이고 독자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하나의 유형을 이루는 바, 우리가 드러내보이고자 하는 것은 바로 '니체는 역동적 상상력을 구사한 가장 특별하고 가장 뚜렷한 전형들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공기와 꿈』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위대한 사상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책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기애(自己愛) 속에서 스스로를 북돋울 진정한 힘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 가스통 바슐라르,『공기와 꿈』중에서.


“... 신이란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며 모든 신은 죽었다고 하는 사상은 흔히『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말해지고 있지만,『즐거운 지식』속에서 이미 고전적으로 정식화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정식화된 형태로 신의 죽음을 선포함으로써 니체는 자기를 단지 시대를 '진단하는 자'로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서 신의 죽음을 ‘확인’했던 것이지 그 자신이 신을 살해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에른스트 베르트람(Ernst Bertram)이 니체를 신의 살해자로 지목한 것은 틀린 것이다.”

-- 이보 프렌첼(Ivo Frenzel),『프리드리히 니체』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술형식과 언어의 절묘한 높이는 니체의 다른 저서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 있음을 니체도 자인하고 있다. 이 작품은 철학적 의도로 구상되었지만 매우 시적으로 쓰여 있다. 문장은 비유의 자물쇠가 채워진 것처럼 보이며, 종교적 설교를 연상케 하는 면도 있다. 니체 자신도 이 책을 ‘제5의 복음서(fünftes Evangelium)'라고 부를 정도였다. 허나 이 새로운 삶의 지혜는 한편으로 철저히 반종교적이어서 기독교 교의에 대한 활기찬 풍자인 동시에 새로운 디오니소스적 주신찬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비유와 상징이 어우러진 풍경과 사건들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생명감각을 고취하고 위대한 긍정을 노래하는 차라투스트라의 행보는 예술적 의지의 고양으로 상승해간다.”

-- 이보 프렌첼,『프리드리히 니체』중에서.


“... 가장 조용하고 수줍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니체는 ... 개방된 세계에서 문명화된 민족과 국가들이 언제 세계대전들이 발생할지 전혀 모른 채 ‘진보’라는 종교에만 목을 매고 있던 10여 년 동안 큰 소리로 ‘황무지는 자란다......’고 외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외치기 위한 방법은 글쓰기밖에 없었다. 이런 그의 절박한 사유의 외침이 글로 표현된 것이 바로『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 마르틴 하이데거,『사유란 무엇인가』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니체가 붙인 ‘모든 이를 위한 책, 동시에 아무도 위하지 않는 책’이라는 부제는 책이 출간된 지 70년 만에 사실임이, 그것도 정반대의 의미에서 사실임이 입증되고 있는 것을 보면 너무나 전율스럽다. 왜냐하면 모든 이를 위한 책이 되었음에도 아직 그 책이 품고 있는 근본사상과 비의에 맞설 수 있는 사유자(Denkender)는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가 이 책의 4부에 쓴 ‘황무지는 자란다......’란 문구는 적실하며, 니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은 바로 이 한마디에 녹아들었던 것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사유란 무엇인가』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말하는 자이며 특별한 유형의 말하는 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한 명의 ‘긍정자’이다.”

-- 앨런 슈리프트(Alan D. Schrift),『니체와 해석의 문제』중에서


“아마도 우리는 니체의 경험을 인간학의 뿌리를 뽑는 시도들 중 첫 번째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니체는 문헌학비판 내지 생물학주의에 입각하여, 인간과 신이 서로 얽혀드는 지점, 다시 말해서, 신의 죽음이 인간의 소멸과 동의어가 됨과 동시에 초인을 기다리는 인간은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지점을 다시 발견하였다.”

-- 미셀 푸코,『말과 사물』중에서


“‘아, 고독, 그대 나의 고향이여!’ ― 우수어린 이 노래는 적막한 빙하의 세계에서 울려 퍼진다. 차라투스트라는 마지막 밤이 다가오기 직전 그의 저녁의 노래를 직접 썼다. 바로 영원한 귀향을 알리는 차라투스트라의 노래를 말이다. 고독이 늘 그 방랑자의 유일한 오두막이며 싸늘한 화덕이자 돌지붕이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는 수많은 도시를 거치면서 무한한 정신적 편력생활을 해왔다. 종종 타향에서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늘 상처받고, 지치고, 절망한 모습으로 자신의 ‘고향인 고독’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신의 죽음’을 고지한 니체 곁에는 더 이상 신도 인간도 없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천재와 광기』중에서.


“새로운 책이 한 권씩 나올 때마다 니체는 친구 한 명을 잃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의 행위에 일말의 관심을 보였던 마지막 앙상한 초목조차 시들어 갔다. 처음에는 문헌학자들을 잃었고, 그 다음은 바그너와 그의 정신적 동료들을, 그리고 최후에는 어린시절 벗들까지도 그의 곁을 떠나갔다. 니체는 자신의 책들을 출판해 줄 출판업자도 독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가 20년 동안 집필한 6,400파운드나 되는 원고들이 흐트러진 채 집 지하실 바닥에 쌓여 있었다. 니체는 책을 출판하기 위해 겨우 모아두었던 돈에 손을 대야했다. 허나 누구도 그의 책을 사기는커녕 니체가 선물로 주는 책도 받을 이가 없을 만큼 말년의 니체는 한 명의 독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니체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제4부부터 자비로 40권을 더 인쇄했다. 하지만 니체가 그 책을 보내주고자 했던 사람은 7백만 명이 사는 독일제국에 단 7명뿐이었다. 창작의 절정기에 이른 니체는 오히려 그만큼 시대와 동떨어진 가장 낯선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니체를 조금이라 믿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에게 감사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죽마고우 오버베크를 위해 ... 그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신 니체는 1887년 동시대인에게 가장 위대한 책을 건넸다. 그것을 통해서 그는 그 무엇으로 파괴되지 않을 우정을 이루어 냈으며, 그는 그 성공에 이런 최고의 영웅적인 찬사를 붙였다 ― ‘차라투스트라도 파괴할 수 없는 우정을.’ 말 그대로 차라투스트라도 파괴할 수 없었다! ”

-- 슈테판 츠바이크,『천재와 광기』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 가치를 변이시키고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시키자고 주장한다. ... 즉 부정은 먼저 긍정의 권력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참거나 견디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 질 들뢰즈,『니체와 철학』중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전체 이야기는 니힐리즘과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해서 악마와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악마는 부정적인 것의 정신, 겉보기에는 몇 개의 대립적 역할을 하는 듯이 보이는 부정자들의 권력이다... 악마는 반동적인 존재인 인간을 이용하는 무(無)의 의지를 대표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의지는 그런 악마와 대립하거나 반대되는 의지가 아니라 오직 ‘다른' 의지일 뿐이다.”

-- 질 들뢰즈,『니체와 철학』


“변이가 영원회귀에 관계되듯이 차라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와도 복잡한 관계를 가진다. 어떤 면에서 차라투스라는 영원회귀의 원인이자 초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 차라투스트라는 사자의 털 속으로 손을 밀어 넣으면서 그의 아이들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 초인이 가까지 와 있다는 것을 느낀다.”

--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니체는 우리에게 펜의 춤을 권장한다... 그러나 니체는 작가는 결코 서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글쓰기란 우선, 영원히, 사람들이 몸을 기울이고 들여다보는 그 무엇이란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문자들이란 것이 불로 새겨져 하늘에 떠 있는 암호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니체는 그 점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부서진 서판들과 글이 절반쯤 새겨진 서판들에 파묻혀 있다. 그리고 기다린다. 내 시간이 오면, 다시 내려가서 파멸되어야 할 시간이 오면......’ 다시금 내려가서 작업하고 몸을 기울이고 새기고 새 서판을 계곡으로 가져오고 읽고 읽히고 해야 할 것이다. 글쓰기는 의미 자체 안에 있는 출구요 의미 밖으로 나아가는 출구이자 의미가 하강하는 출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자크 데리다,『글쓰기와 차이』중에서.
출처 : 니체와 현대
글쓴이 : 라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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