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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광석과 안치환

한적한길 2015. 12. 3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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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함께 보낸 젊음
한 사람은 떠났고 한 사람은 남았다. 과거에서 멈춘 노래와 오늘도 현재 진행형인 노래를 비교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을 비교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었다면 이제 40대 중반을 넘긴 김광석과 안치환은 형 동생하며 소줏잔을 부딪치는 사이였을 터. 사실 둘은 서로 다른 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은 뮤지션이다.

 

둘은 모두 1980년대를 함께 보낸 젊음이었다. 1980년대는 광주의 피를 흠뻑 머금고 탄생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통치 아래에서, 자유를 자유라고 말하지 못하고, 민주를 민주라고 말하지 못했던 시대였다. 김광석과 안치환은 최루탄 연기 자욱한 교정에서 슬픔과 분노로 세상을 향한 눈을 떴다. 진실을 찾아 싸우고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그래서 노래가 세상을 외면하는 눈가리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노래가 세상을 올곧게 담은 거울이기를 바랐고 울고 있는 이들을 어루만지는 뜨거운 포옹이 되기를 바랐던 이들은 결국 노래모임 새벽에서 만났다.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진보적 노래운동 집단인 새벽의 활동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적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 활동으로 이어졌고 김광석과 안치환은 잠시나마 노래를 찾는 사람들 활동을 함께 하며 노래가 세상을 향해 쏘아 올리는 선언이 되고 함성이 되도록 만들었다.

 

서울 대학로에 세워진 故김광석 노래비  

 

그리고 그 둘의 가슴에 안겨 있던 것은 기타 한 대였다. 기타 한 대로 세상의 많은 노래를 다 부를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많은 노래를 불렀던 통기타의 시대에 김광석과 안치환은 대학 노래패에서 활동하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의 가요를 부르고 민중가요를 부르고 외국의 팝송들을 부르며 이들의 목소리는 다듬어졌고 감성은 더욱 정교해졌다. 이들이 기타를 통해서 배운 것은 단지 음악의 수많은 멜로디만은 아니었다. 김광석과 안치환은 기타 한 대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감정의 결을 표현해낼 수 있는지를 깨우쳤고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큰 울림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며 소박한 울림의 파괴력을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리하여 록과 헤비메탈의 시대에도 순정한 소리를 고수했고 힙합과 댄스 음악의 시대에도 기타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김광석과 안치환은 한국 포크의 적자가 되었다. 물론 안치환은 3집을 발표하면서부터 통기타에 머무르지 않고 록을 선택하며 자신의 음악을 두 겹으로 쌓았지만 그의 음악은 언제나 통기타 한 대만으로도 부를 수 있는 여백을 품고 있었다. 안치환과 자유라는 밴드 편성으로 활동하면서도 안치환은 통기타 한 대만으로 노래하는 공연을 꾸준히 계속하며 자신이 포크 뮤지션이라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음악을 했던 탓인지 김광석과 안치환의 노래에는 사적인 폐쇄성과 말초적 즐거움 대신 사람과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과 진지한 관심을 늘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386세대의 강박 같은 사회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혼자만 잘 살기보다는 더불어 함께 잘 살기를 더 바랐던 이들의 노래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선함에 대한 믿음과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낙관이 결코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김광석과 안치환의 노래를 좋아하고 부른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갖고 내일의 변화를 위해 함께 행동하겠다는 소박한 믿음을 나누는 행위였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은 김광석과 안치환을 한 몸처럼 좋아했고 1990년대까지도 대학사회에서는 이들의 노래가 불려졌으며 이들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움직임으로 대학사회가 유지되었다. 사회에서도 이들의 노래를 듣고 부르는 이들의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둘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활동하다가 솔로로 독립하고 동물원에서 활동하다가 솔로로 독립한 경로까지 비슷하고 소극장 콘서트로 활동을 시작한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따지자면 김광석의 결과 안치환의 결은 조금 다르다. 통기타에만 의지했던 김광석이 좀 더 맑고 여리고 여백이 많은 나무 같은 목소리로 삶의 편린들을 아프게 감싸 안았다면 안치환은 좀 더 격정적이고 뜨거운 호흡으로 세상을 끌어안으며 노래를 토해냈다고 할 수 있다.

 

목소리의 온도로 따지자면 김광석보다는 안치환이 훨씬 뜨거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광석은 특유의 차분함과 편안함으로 빈 방에 어울리고, 잔디밭에 어울리며, 소극장에 어울리는 노래를 불렀고 안치환은 로커로 변신하면서부터 광장에 어울리는 결기와 열기를 발산해냈다. 노찾사 활동을 함께 한 이후 김광석은 직설적인 사회적 주제를 잘 노래하지 않았던 데 반해 안치환은 항상 오늘의 현실에 답하는 노래를 내놓으며 민중가수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김광석이 상대적으로 자신의 창작곡이 적었던 데 반해 안치환은 늘 자신의 곡으로만 앨범을 채웠으며 김광석이 한국 포크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던데 반해 안치환은 포크와 록의 쌍두마차로 자신의 창작곡을 만들며 다채로운 음악적 색깔을 보여주었다.

 

앨범명 4집 내가 만일

만약 김광석이 1996년 세상을 등지지 않고 음악활동을 계속했다면 우리는 1980년의 정신과 호흡을 담지 한 음악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을 것이고, 한국 포크도 좀 더 대중적으로 명맥을 유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 더 이상 새로운 노래는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김광석의 노래는 영원한 청춘의 노래로 남았고 안치환의 노래는 함께 살아가는 벗의 노래로 함께 있다. 푸른 노래는 가슴에 울리고 격정의 노래는 세상을 깨운다. 쌍동이별처럼 함께 퍼지는 메아리.
[글: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출처 : 질병과 자연치유
글쓴이 : 물 흐르듯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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