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개인글

[스크랩] 영혼의 삶

한적한길 2013. 9. 28. 23:12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합니다.

 

육도 윤회..

 

아귀, 지옥, 수라, 축생, 인간, 천상계라는 육도의 세계를 하나의 생명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즉, 윤회란 생멸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서로 다른 세상에 나고 죽는 것을 말합니다.

 

육도 윤회계는

육체를 가진 생명과 육체를 갖지 않고 영혼으로 존재하는 생명, 영으로 존재하는 생명이 있는데,

사람도 자기 의식의 역량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영혼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현상입니다.

이때, 저승사자가 오는데 대부분 영가의 의식성향에 맞춰 옵니다.

예를 들어 생전에 교회에 다녔으면 예수님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절에 다녔으면 보살이나 부처님의 모습으로, 무교였다면 배우자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생전에 이런 꿈을 자주 꾸었다면 저승사자가 미리 와서 안면을 튼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유는 망자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를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함입니다.

 

 

일단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면 혼절했다가 이틀 반에서 삼일 사이에 깨어납니다.

그리곤 생전의 육체에 자기도 모르게 끌려 다가갑니다.

전설의 고향에 가끔 나왔죠.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나

예수님이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영혼의 이치가 그렇기 때문이고

우리가 장례를 3일만에 치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와서보면 가족들이 울고 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보게 되지요.

옆에서 저승사자가 "당신은 이제 이승의 인연이 다한 몸이니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인사하고 가십시다" 하면

질병으로 죽은 사람은 죽음을 예견하였으므로 받아들이고 중음이라는 49일 동안 영혼의 삶을 살게 되고,

 

갑작스런 사고로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한 생명이나 죽으면 끝이라고 또는, 죽음을 부정했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 나는 안죽었어." 하면 저승사자도 어찌할 수 없어 가버리고 홀로 영혼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자식이 있는 집에 살거나 애착, 집착이 많았던 곳으로 가 머물게 됩니다.

한 공간에 사는 영혼을 지박령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공간은 음화되고 거기에 사는 생명들은 

매우 불편할 뿐만아니라 강렬한 음기로 인해 몸도 시름시름 아프게 되지요. 죽은자와 산자는 한 공간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이생의 삶을 잘 마무리 하시고 원망이나, 자식에 대한 애착,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만일 가족 중에 꿈에 자꾸 안좋은 모습으로 나타나시면 대개는 영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 공간에 있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천도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천도란 생전의 영가가 죽음에 대한 지식이 없어 영혼의 삶을 살지 못하고 중음계에 머물때

죽음에 대한 지식과 영혼의 삶에 대한 이치를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능력있는 좋은 분을 만나면 천도가 되지만 영가를 불러올줄도 모르고 생사의 이치도 모르는 이가

온갖 먹을거리나 차려놓고 외운 지식만으로 중얼거리면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즉, 영혼과 대화가 되는 분이 천도를 해야 영가가 알아듣고 수긍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49일 동안 중음의 상태로 영혼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최종적으로

염라대왕 앞으로 가서 업경대라는 거울을 마주합니다.

 

업경대에 서면 생전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쭉 나타나게 되는데

스스로가 봐도 잘 살았는지 남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는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염라대왕이 잘잘못을 말하면 수긍하고 그에 따라 지옥에 가든

천상계로 가든 아니면 다시 새 부모를 만나 인간세상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대략적인 영혼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이별하는 것이고

영혼은 또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돌아가신 부모님도

새로운 부모 만나 예쁜 아가로 귀여움 받으며 살아갈 것이라 생각한다면

육체의 괴로움을 벗어버리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요.

 

사람의 생사를 육체적인 관점에서는 어찌할 수 없지만

영혼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새로운 시작이 되는 셈입니다.

또 한편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부여되고 그 이야기를 새 삶속에서 써나가는 것..

 

그러므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되고

어떻게 죽느냐가 다음 삶에 중요한 요소가 되니

삷과 죽음 어느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삶에 대한 이해를 통해 생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현재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생과 사가 길고 짧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보람된 삶을 살았느냐

얼마나 가치있는 일을 하였느냐

얼마나 세상에 이로움을 주었느냐

하는 것으로 여기고 당당하게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병마는 나의 육체를 괴롭고 힘들게 할 수는 있어도

결코 나의 영혼을 갉아 먹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출처 : ♥충청도 = 탄금대의 피리소리
글쓴이 : 물 흐르듯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