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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울고 웃던 그 시절 생활속의 자화상

한적한길 2013. 9. 18. 23:13

울고 웃던 그 시절 생활속의 자화상

이 사진들은 정확히 71년도에 자료들입니다

가난했던 그시 절 웃고 울던 우리의 (국민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자화상과 생활풍습을 뒤돌아 보고자 해서 편집해서 올립니다


공공 장소에서 휴지 없으면 가래침이나 콧물을 삼키(생키)라는 계몽을 하네요

이 시절엔 어린이들 누구나 손수건이 없어서 양쪽팔 옷소매에 닦았지요

번들 번들 하얗게 말라서......그땐 더러운 것도 몰랐답니다


일부 유행했던 동물 농장 춤입니다

노는 장소에 여럿이 모여서 짐승들 흉내를 내는 춤이었는데

괴상 망측한 춤이 다 나오곤 해서 배꼽을 잡곤 했답니다


만화가계= 보는데 1원에 5~6권 대여는 3권정도

한 사람이 빌려가면 온 동내 다돌려서 보다 보니

근방 헌책되고 좋은 그림들은 찢어서 보관하고 반납할때

주인에게 걸리면 책값 다물어주던 시절이었죠


극장 포스터입니다


우리나라 모 항공사의 여승무원 정복입니다

단정한 학생복 차림같지요


구로공단 방직공장= 털실로 니트를 생산 하는 공장입니다


고등학교 교복= 우리나라 남자 교복은 모두가 똑같았습니다


당시 대졸출신 월급 3만 5천원 , 좌측에 보이는 흥신소는

가정사나,사건을 의뢰하고 해결해주는

사립탐정 비슷한 요즘의 해결사 사무소입니다


레코드판=( 전축판)지금의 CD의 원조라고 할수 있겠네요.

이후에 테이프가 나오고 CD가 나왔지요


맥주마시기 대회= 당시 양대 산맥이었던 두개의 맥주 회사들이

홍보를 위해 이런 행사를 했답니다


아파트값 무척 싸지요?/

현재도 이곳에 사시는 분 계시면 손 좀 들어주세요^^*


먼지가 자욱하도록 비비고 또 비비고 젊은이들 여럿이 모이면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경입니다


도로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바위(사기)노름꾼 들입니다

막대기 뽑기/화투/장기등으로 서민들 많이도 울렸지요


90마력1500CC급 코로나 승용차입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무작정 가출한 어린 소녀의 모습입니다


당시는 농어촌 젊은이들이 서울만 가면 출세하는 줄 알고

부모 몰래 한 밤중에 서울로~서울로~

개나리 봇짐싸서 무작정 상경하던 시절이였습니다..

청량리역 용산역은 늘 상경한 젊은이들이 북적 거렸지요..

명절때 먼저 간 친구가 시골 내려오면 어떻해서든지 따라 가려고

애쓰던 시절이었답니다


이때는 머리에 이가 많아서 위생상 불결하다고 대다수가 빡빡머리였지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DDT 백색가루 살충제를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몸에 뿌리곤 했지요


국회의원 선거유세장= 신문깔고 머리에 쓰고 박수 부대 같습니다

당시는 지지 후보에게 돈도 받고

식사 대접도 받고 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량 전자제품 전시회 입니다


연극 소의 한 장면이며 당시 배우들입니다


창경원 식물원 같습니다

두루마기에 갓을 쓴 노인의 뒷모습이 이채롭네요


선거유세를 듣고 있는 할아버지들입니다

긴 장죽(대나무 담배대)에다가 백 고무신,갓,

손에는 쌈지(돈,담배가루등 담음)를 들고 경청 중이네요


선거유세장 = 나무가 견딜런지 불안합니다 ㅎㅎ~

우측 철봉대에도 아슬아슬....


한쪽에 드럼이 보이고 신바람나게 노는것이 학교 축제 같습니다

단발머리 묶어 매고 자세 나오는 여학생 귀여운면이 있네요


이곳은 부산 산성 누룩마을 모습입니다


종이가 귀할때라 행사가 끝나면 종이를 모아서 팔곤 했지요

부엌에 앉아 숯으로 종이 대신에 부엌삽에 글씨 연습하곤 했답니다


가족 나들이 갈때도 한복= 당시는 어머니들의 외출복은 거의 다 한복이였었지요


교련 훈련 반대 시위입니다( 교련=학생 군사훈련) 1편에 소개 되었던 내용처럼

모든 학교는 학생들에게 총 쏘기등 군사 훈련을 받았답니다 (일부 여학교도 포함)


시위가 가열되자 일부 학교나 도서관은 휴교/휴관하고 진압 군인들을 투입함

당시는 전경이란 제도가 없었으며 사회 문제는 군에서 통제를 많이 하였습니다


자전거/시골에선 남자들 재산 목록 1호

여자들은 재봉틀 뭐 이런 순서였어요

부부가 나란히 자전거타고 외출갑니다. 자전거 못타는 사람이 대부분이였어요


일본식 판자 건물이 많았습니다


식육점에는 고기를 바깥에 걸어두고 팔았지요 ...일부 저장도 했지만...

동내 파리들은 식육점이 아지트였답니다


용산동 기지촌 이라고 들었읍니다..

맞는지?


청평 땜 사고= 국내 자동차 사고로는 최대의 참사 사건 80명이 참사했답니다

당시는 버스 정원이라는 것이 없고 콩나물 버스라고 표현해야겠지요


어느 학교의 계몽 켐페인 같습니다

모습들이 참 청순해 보입니다


저이가 누구여?

선거 유세장에서 홍보물 인물과 후보자가 맞는지 대조해보네요 ㅎㅎㅎ~


놀이 문화에 빠져서는 안될 장고였지요


재래식 시장입니다= 북적 이는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죠

당시에는 물건 사는 사람보다 시장 구경가는 사람들이 많았답니다.


농기계가 없는 시절

평생을 우리의 부모님들은 수 작업으로 농사일을 하셨답니다


대학교 주변 대포집 (막걸리)에 낙서는 변한게 없는 것 같군요


삼배 옷을 짜기 위해 손질 하는 중입니다

저걸 배 틀에 한올 한올 끼워서 몇날 며칠을 매달려 타닥 타닥 배틀소리...

배 한필을 짜곤 했지요


담배 가게 겸 우표 수집소 입니다

우표 수집을 취미로 하는 이들이 많아서 새 우표가 나오는

날에는 하루 전 부터 우체국에 줄을 서곤 했답니다.

 

 

 

 

 

 

 

출처 : 인정이 묻어나는 곳
글쓴이 : 그린여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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