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길]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공주 공산성-무령왕릉" 답사기
금강교-공산성-황새바위성지-무령왕릉
굴곡 많던 청춘의 시절은 신기루처럼 날라 가 버리니
이젠 석양나그네가 되어 "자연 속으로 여행"을 위해 길을 나섭니다.
自然이란게 산천초목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 속에서 살며 이룬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도 자연이리라
수없이 살다 사라진 선조들의 자취를 찾아 갑니다.
[구글어스]
[국토지리원 1/25,000 지도]
"공주 금강교 북단"에서 "금강교"를 건너 "공산성"을 둘러 보고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를 경유하여 "송산리고분군-무열왕릉"을 갑니다.
['금강교' 남단 '금강홍수통제소']
2017년 2월 11일 (토) 맑음
[삼남길] 충남 세번째구간 도보코스를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까지 진행하고
"광정"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약20분이 걸려 "공주시 금강교 북단"에 도착했습니다.
"공주 금강교 북단"에는 "금강홍수통제소"가 있으며, 주변을 조망할수 있는 전망대도 있습니다.
['공주시 금강 북단']
"공주시"는 금강을 중심으로 강북이 '신시가지'라고 하고, 강남이 '구시가지'라고 하더군요.
강북지역은 현재도 계속 개발 중에 있더군요.
서울의 한강변을 보는듯 합니다.
['금강교']
"금강교 錦江橋"는 2차선인데 한차선은 일방통행으로 자동차가 다니고
또 한차선은 사람과 자전거가 다니도록 되있습니다.
이나저나 다리를 건너면서 조망되는 광경은 오늘 탐방할 지역들을 모두 알려 주고 있습니다.
[공산성-황새바위성지-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을 탐방 할 예정입니다.
['흥미진진 공주']
'금강' 고수부지에는 공원이 조성되 있는데 [공주시 BI]를 고수부지에 만들어 놨습니다.
[BI]는 'Brand Idendity'인듯한데 "흥미진진 공주"를 나타내 준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공주 금강철교'와 '공산성' 조망]
"금강교" 남단으로 가면 "금강철교"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철교는 일반적으로 철도교인데 인도교가 철교인 독특한 철교랍니다.
[공산성]이 "금강철교" 남단에서 그 위용을 뽐내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금강철교' 남서쪽 조망]
"금강철교" 남서쪽으로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이 위치한 "송산 宋山 130m"이 보입니다.
['웅진탑']
"금강교" 남단에는 "웅진탑 熊津塔"과 詩碑가 건립되 있습니다.
"공주 公州"라는 도시는 원래 "곰주"였다죠?
한자로 "熊州"였는데 세월이 지나며 음운변화로 "곰주 → 공주"로 바뀌었다고...
"곰주"의 나룻터가 "웅진 熊津"으로서 우리말로 "곰나루 → 고마나루"로 변하었다고 합니다.
['공산성' 입구]
이어서 "공산성 公山城"의 西門인 "금서루 錦西樓" 입구를 만납니다.
이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공산성" 탐방에 나섭니다.
"공산성"은 입장료를 받는데 어른은 1,200원이고
[비석군]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올라 가면 비석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현감이나 관찰사등 관리들의 송덕비들이 대부분인데 "제민천교 영세비"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공주시내에서 '공산성' 앞으로 흘러 '금강'으로 나가는 개천인 "제민천"이
1817년에 홍수로 범람하여 '제민천교'가 유실되고 둑이 무너졌답니다.
그때에 다리와 제방을 복구하는데 힘을 쏟은 관리와 백성들 십여명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에는 동서남북 네개의 대문이 있는데,
이 문은 西門으로서 "금서루 錦西樓"라고 합니다.
"공산성"에서 가장 많은 탐방객들이 이용하는 문이라고 합니다.
[성곽']
"西門-금서루"에서 좌측 성곽으로 탐방을 시작합니다.
백제군인 모습의 장승이 눈길을 끄는데 성곽으로 올라 갑니다.
['금서루' 조망]
성곽에 올라 "西門-금서루"를 조망하고
['금서루' 앞 광경 조망]
"서문-금서루" 앞 주차장과 공주시가지도 살펴봅니다.
[성곽 오름길]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잠시 올라 전망대로 가서 조망합니다.
['쌍수정' 조망]
전망대에서 먼저 남쪽의 "쌍수정 雙樹亭"을 조망합니다.
저곳이 "공산성"의 중심부로서 왕궁이 있었던 자리라고 합니다.
잠시후 좌측 성곽을 따라 "쌍수정 雙樹亭"으로 갈 예정입니다.
['금서루' 조망]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금서루"를 조망하고
['금갈철교' 조망]
조금 전에 지나온 "금강철교"를 조망하고
저 멀리 오전에 지나온 "차령고개"를 조망해 봅니다.
"금강철교" 조금 아래엔 4대강 사업으로 건설한 "공주보"가 있답니다.
그래서 이곳 '금강'에 수량이 풍부해 보이지만 물이 흐르지 않아 강이 아니라 호수라고 할 정도랍니다.
['공산정' 조망]
"공산성"에선 '금강'을 조망하기가 가장 좋다는 "공산정"으로 갑니다.
[남쪽 조망]
"공산정 公山亭"에 올라 사위를 조망합니다.
먼저 남쪽방향을 조망하면 '공주시'의 '구 공주시가지'가 조망됩니다.
그러니까 '공주시'의 本鄕이 되는 곳으로 "봉황산"이 감싸고 있답니다.
[서쪽 조망]
서쪽으로는 '공주시'의 진산이라는 "연미산 燕尾山 237.7m"이 조망되고...
"연미산"은 제비 꼬리 모양이라고
[북쪽 조망]
북쪽으로는 '공주시'의 '신시가지'가 펼쳐집니다.
요즘은 "지역감정"이라는 말이 숙어러 들었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만해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선거철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단어였었지요?
정치집단들이, 특히 군사독재정권들이 "지역감정"을 교묘히 이용해 정권유지 연장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다시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여기서 하고 있는지 궁금하십니까? ㅎㅎ
물론 상당한 이유가 있어 "지역감정"이라는 말을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역감정"이라는 말을 최초로 탄생시키는 "지역"의 경계선이
오전에 넘은 [금북정맥]의 "삼남대로 상의 차령고개"와 이곳 "공주 금강"이라는 說때문입니다.
"훈요십조"라는 말은 많이 들었을 겁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내린 "訓要十條"의 제8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 生亂,
且其僧屬官寺奴婢, 津驛雜 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奸巧言語, 弄權亂政,
以致 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제가 이해하기 쉽게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車峴以南, 公州江外"라는 지역은 山모양과 地勢가 배역한 모양이니 인심도 그러하기에
이 지역 사람들은 관료로 등용시키지 말고 왕족들은 결혼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車峴"이 오전에 [삼남길]을 걸으며 넘은 북쪽에 보이는 "차령고개"이고,
"公州江外"는 이곳 "공주 금강 아랫쪽 지방을 의미하기에
"지역감정"이라는 말이 어디에서부터 공식적으로 처음 기원하고 있는지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역감정"의 발단은 "고려의 태조"인 "왕건"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왕건"이 '고려'라는 나라를 탄생시키는데 제일 큰 걸림돌이 "견훤의 후백제"였기 때문에
'고려'라는 나라의 정치권력을 보존 강화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호남지방을 견제했던게죠.
이러한 역사는 현대까지 이어져 주로 군사쿠데타 정치권력들이 집권연장의 수단으로 교묘하게
지역감정을 이용하면서 우리나라 1970년대~1990년대까지 정치판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이후 지역감정은 점차 숙어러 들었는데, 그 이후엔 정권을 되찾을려고 하는 정치세력들이
빨갱이니 종북이니 하며 '색깔론'으로 선거판을 뒤흔들어 정권을 장악하고
좌파니 우파니 하며 이념으로 편가르기로 정치권력을 유지하다가....요즘은 탄핵정국으로 접어 들었죠?
[북동쪽 조망]
북동쪽으로는 "비단 강"이라는 "錦江"이 휘돌아 나가고 있는데....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는 그 역사의 전개과정을 수도 변천을 중심으로 보면
한성도읍기(漢城都邑期: 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도읍기(熊津都邑期: 475∼538),
사비도읍기(泗沘都邑期: 538∼660)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 역사는 흘러가는 '금강'의 강물처럼 느껴집니다.
['공북루'로 가는 성곽길]
"공산정"에서 조망을 마치고 성곽을 따라 내려 가면...
['공북루'에서 '공산정' 조망]
"공산성"의 네개의 대문 중에 北門이라는 "공북루 拱北樓"로 내려와
조금전 "공산정"을 바라봅니다.
['공북루' 통로]
"공북루" 아래엔 금강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습니다.
"공 拱"이라는 말의 뜻이 "두손 맞 잡을 拱"이라하니 강북과 강남을 잇는 통로라는 뜻인듯
['성안마을'과 '서문고개']
"공북루" 앞에는 옛날에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복원 중에 있다고...
[공산성 석빙고]
"공북루"를 지나면 옛 얼음창고였던 "석빙고"가 있습니다.
"석빙고" 위로 올라 가면...
[석빙고에서 '공산정' 조망]
지나온 "공산정"과 "공북루"가 조망됩니다.
['쌍수정' 조망]
"석빙고"에서 "공산성"의 중앙을 가로 질러 바로 "진남루"와 "쌍수정"으로 갑니다.
['만하루' 조망]
좌측 아래엔 "만하루 挽河樓"가 보이고
['영은사' 조망]
이어서 "영은사"라는 절도 보입니다.
[다리]
산성 정상부로 올라 가면 다리를 만나고
['진남루' 조망]
다리를 통과하면 "공산성"의 南門인 "진남루 鎭南樓"가 바로 보입니다.
['진남루']
"진남루 鎭南樓"는 공주시내로 통하는 문이라고 하는데
"공산성"의 네개의 대문 중에 "南門"이라고
['구 공주시가지' 조망]
"진남루"에서 바라보는 '공주 시가지'입니다.
'공주시청'을 비롯해 '공주교대' 박찬호가 다녔다는 '공주고'등이 운집해 있는
옛부터 '공주시'를 이루고 있는 핵심 "공주시"가 펼쳐집니다.
['진남루'에서 성곽 조망]
"진남루"에서 "공산성"의 성곽을 구경하고 바로 "공산성"의 중심지라는 "쌍수정"으로 올라 갑니다.
['쌍수정'과 왕궁터]
왕궁터가 있었다는 정상부에 오르면 "쌍수정"과 우물등이 있는데
"웅진 백제시대"의 화려한 역사의 발자취는 찾아 보기 어렵고
"공산성"에는 '조선왕조 제16대 왕'인 "인조"에 대한 史跡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조선왕조의 왕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왕인 "인조 仁祖"
조선 왕 중에서 "종묘 사직"을 버리고 도망을 가장 많이가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왕이 "인조"이죠.
왕이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 가는걸 '몽진'이라고 하죠?
몽진을 세번이나 한 왕이 "인조"로서 '36계의 도사'라고 할수 있습니다.
첫번째 몽진은 자신을 왕위에 앉혀준 일등공신 중에 한명인 "이괄"로 부터 반란을 받아 도망친 것인데
"인조"가 도망친 곳이 바로 이곳 "공주 공산성"이었답니다.
그때가 1624년(인조 2년) 1월...
두번째는 "이괄의 반란"이 일어난지 불과 3년후인 1627년(인조 5년)에 이번엔 "후금"의 침략을 받아
다시 "강화도"로 도망갔는데 이 전란을 "정묘호란"이라고 하죠.
세번째는 우리가 너무나 치욕스럽게 여기는 "병자호란" 때입니다.
국내 정치, 외교정책등 국내외적으로 수렁에 빠져 "청태종"의 침략을 받아 "남한산성"으로 도망가고
결국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예식을 한 "인조"
'인조'는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죠.
한양 종로에서 "이괄'에게 반란 당해 도망쳐 '공주 공산성' 앞 "금강"에서 눈 흘긴 왕이 "인조"
[쌍수정 사적비각]
"쌍수정 사적비"
앞에 보이는 비각 안에 碑가 있는데,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한양을 버리고 도망와서 이곳에 머물면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碑랍니다.
그러니까 이 碑는 史跡碑가 아니고 事跡碑인거죠.
['쌍수정']
"쌍수정 雙樹亭"
"이괄의 난"으로 도망와 이곳에 머물며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이괄의 난"이 진압되기를 기도하며
기다렸다는 곳이랍니다. 그러니까 당시엔 이런 "쌍수정"이라는 정자는 없었고 '두 그루의 나무'만
있었는데, "이괄의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두 그루 나무' 덕이라고
이 '두 그루의 나무', 즉 한자로 '雙樹'에게 '정3품'의 작위를 내리고 한양으로 돌아 갔다고 합니다.
후에 "영조" 때에 관찰사로 부임한 '이수항'이라는 사람이 늙어 죽어버린 두 그루의 나무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세웠는데 그 정자가 바로 앞에 보이는 "쌍수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고 한양으로 돌아 가는 길에 '평택'에 있는 "옥관자정"이라는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물맛이 좋다고 우물에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한 우물을 [경기옛길-삼남길]에서 보았었죠?
이렇게 "인조"는 사람이 아닌 무생물에게도 벼슬을 주어 환심을 살려고 했습니다.
나무에게도 벼슬을 주고 우물에게도 벼슬을 주고...
권력을 쥐기 위해 부모형제를 배반하고 죽인 왕들은 여럿 있습니다만
특히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수없이 많은 정적들을 죽이며 왕위에 올랐는데
자기 생각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장남인 "소현세자"를 죽이고 "소현세자"의 와이프인 며느리도 죽이고
그뿐만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아들, 즉 세명의 손자까지도 제주도로 귀양보내 죽인 천인 공노할 패륜아이죠
[인절미의 고향]
"36계의 도사" "자식 며느리 손자까지 죽인 패륜아"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그런 "인조"가 맛은 알아 이곳에서 얻어 먹은 떡의 맛을 보고 극찬했다는 "인절미"가
이곳에 피난와 머물 때에 "임씨댁에서 만던 떡"을 먹고 "맛이 너무 좋다"고 "絶味로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임절미"로 불리워지게 되었는데 후에 음운변화로 "인절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햐~~ "인절미"가 '공주'에서 "인조"의 피난시절에 배고픈 "인조"에 의해 탄생된 것이군요.
[서쪽 조망]
"쌍수정"에서 "금서루"로 가며 조망하는 "백제무령왕릉연문"입니다.
잠시 후 저 문을 통과해 "황새바위성지-무령왕릉"으로 갈 예정입니다.
['금서루' 회귀]
"공산성"을 답사하고 "금서루"를 통과해 나갑니다.
['백제무령왕릉연문']
"금서루"를 통과해 "공산성"을 빠저 나가면 "백제무령왕릉연문"이라고 하는 독특한 문을 지나 갑니다.
['백제무령왕릉연문']
"백제무령왕릉연문"을 지나와 뒤돌아 봅니다.
벽돌을 쌓아 만든 門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무령왕릉"에 가서야 알수가 있었습니다.
미리 밝혀드리면 "무령왕릉"이 저 문에 사용된 벽돌과 같은 모양의 벽돌로 만들어져 있더군요.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부채 모양의 문양은 "무령왕 관식(왕관)"이더군요.
['왕릉교']
"백제무령왕릉연문"을 지나면 "제민천"이라는 개천에 설치된 "왕릉교"를 지나고
['천주교 황새바위 순교성지']
이어서 "황새바위 성지"를 만나는데 "공주 천주교 순교 성지"라고 합니다.
걸어서 갈때엔 "황새바위 성지"를 통과해서 "무령왕릉"으로 가는게 좋더군요.
['황새바위 무덤 경당']
"황새바위 성지"는 조그만 동산에 있습니다.
잠시 올라 가면 넓은 공터에 "황새바위 무덤 경당"이 있는데
이곳에서 사형 당한 천주교도들은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승정원일기'등 문헌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처형자만 337명이고 밝혀지지 않은 무명 순교자들도
무척 많다고 합니다.
[순례길]
동산 정상으로 순례길이 이어지는데....
당시에는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감영이 공주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잡혀온 천주교 신도들의 집합소여서 이곳에서 처형된 숫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뒤돌아 본 '경당']
동산 정상으로 오르며 뒤돌아 본 "경당"이 있는 공터입니다.
당시 조정은 천주교를 못 믿게 하려고 처형한 신도들을 나무가지에 메달아 많은 백성들이 보고
경각심을 갖도록 전시 했다는군요. 어휴~~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사형을 시키는 나라....그때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시대였습니다.
이런 역사도 우리는 파헤쳐 알고 털고 가야하는건 아닐지....
[십자가]
"황새바위 성지 동산" 정상에는 십자가가 많이 나열되 있는데, 다양한 재질과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십자가는 2000여년전 이스라엘의 사형장 형틀이었죠.
형틀을 聖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뭘까? 궁금한것도 많아유~~ㅎ
['공산성' 조망]
"황새바위 성지"에서 조금전에 올랐던 "공산성"을 바라봅니다.
"공산성"과 "황새바위 동산" 사이에 흐르는 개천이 "제민천"이라고 한답니다.
당시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잡혀와 사형을 집행당한 곳이 앞에 보이는 "제민천" 개천가 주택이 있는
곳이라 하는데, 사형 당한 천주교도들의 피가 "제민천"으로 흘러 "금강"으로 강물을 이루며 갔답니다.
"금강"을 붉게 물들이며....
"무령왕릉"을 답사하고 돌아와 앞에 보이는 [공주산성시외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 할 예정입니다.
[성지 정상부]
성지 정상부를 둘러보고...
['무령왕릉' 조망]
오늘 탐방의 하일라이트가 될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을 조망하고
['황새바위 성지' 후문]
"황새바위 성지" 후문을 통해 나가면
[.무령왕릉' 가는 길]
바로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을 만납니다.
좌측에 있는 고분군 정문으로 갑니다.
['공주문예회관']
"송산리고분군" 정문 건너편에는 "공주문예회관"이 있고...
['송산리고분군-웅진백제역사관']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 공주 - 송산리고분군"의 입구를 만납니다.
먼저 "웅진백제역사관"으로 들어 갑니다. 입장료는 무료.
['무령왕' 흉상]
['무령왕' 안내문]
"웅진백제역사관"에는 "웅진 백제시대"를 화려하게 부흥시킨 "무령왕"에 대한 안내가 많았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안내문을 참고 하시고...
[일본의 섬에서 태어난 '무령왕']
"무령왕"에 대해선 우리나라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술과 [일본서기][속일본기]의 기술이 다르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백제 제25대왕인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 있으나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는 백제 제25대왕인 "동성왕"의 이복 동생으로 기록되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무령왕릉"에 가서 알아 보겠습니다.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입구]
"웅진백제역사관"을 나와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으로 갑니다.
입장료는 어른 1,500원
['무령왕릉'과 '송산리고분군']
"송산리고분군"에는 7기의 무덤이 있는데 '7호분'이 "무령왕릉"이랍니다.
이 무덤들은 현재 홰손의 염려가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완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대신에 일반인들의 관람을 위해서 모형전시관을 별도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는데...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으로 들어 갑니다.
이 모형전시관은 "송산리고분군"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합니다.
['웅진백제'의 시작과 '송산리고분군' 안내문]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는 그 역사의 전개과정을 수도 변천을 중심으로 보면
한성도읍기(漢城都邑期: 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도읍기(熊津都邑期: 475∼538),
사비도읍기(泗沘都邑期: 538∼660)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한성백제시대"인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은 "백제 22대 문주왕"이
'한성'에서 이곳 "웅진(공주)"로 천도를 하여,
"28대 성왕"이 사비(부여)로 다시 천도 할때까지 64년간 도읍지였답니다.
['송산리고분군' 발굴과정]
"무령왕릉"은 1971년에 '5호분'과 '6호분'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도굴도 면한 완벽한 상태로 발굴되게되어 '백제역사'를 다시 쓸수 있게 되었답니다.
['무령왕' 흉상]
'백제 제25대왕'인 "무령왕 武寧王 462년~523년 6월 5일(음력 5월 7일), 재위: 501년~523년"
모형관에 들어 가면 "송산리고분군 1호분~6호분"의 모형이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무령왕릉"을 관람해야 하겠지요. "무령왕릉"만 관람하면 모두를 관람하는 것과 같으니
['무령왕 무덤']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릉"으로 들어 가 봅니다.
똑 같은 크기로 재현한 모형이라 들어 갈때 머리 박치기 조심을 해야 하고..ㅎ
['무령왕 무덤' 내부]
내부에 들어 가니 무덤은 화려한 벽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엄청 넓어 놀랐습니다.
묘실 규모는 남북 길이 4.2m, 동서 너비 2.72m, 높이 2.93m로 무덤 속이라고는 믿기지 않고
우리가 생활하는 아파트 침실같았습니다.
벽돌을 가까이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섬세한 문양까지 새긴 고도로 발달된 벽돌이더군요.
이런 벽돌무덤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덤 벽면에는 등잔불을 밝히는 등잔대가 있고...
이곳에 있었던 수많은 부장품들은 밖에 별도로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무령왕릉 부장품 전시실']
이 릉이 "무령왕릉"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묘지석"이 발견되어 "무령왕"의 일생을 확실히 알수 있었고
왕비의 묘지석도 있어 "무령왕"이 죽은후 3년 뒤에 왕비도 죽었다는 것을 알수 있답니다.
"묘지석"에는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로 기재되 있다고
"무령왕"에 대해선 우리나라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술과 [일본서기][속일본기]의 기술이 다르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백제 제25대왕인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 있으나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는 백제 제25대왕인 "동성왕"의 이복 동생으로 기록되 있다고 합니다.
이런한 내용의 종지부를 찍은 것이 "무령왕릉"에서 1971년에 발견된 앞에 보이는 "묘지석"이었답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이 대부분 맞고, 일본의 '가카라시마'라는 섬에서 탄생되었다는 것도 맞답니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삼국유사]가 틀린 것이죠.
"묘지석"에 쓰여 있으니 확실한 "무령왕"의 일생을 알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 묘지석도 [국보163호]로 지정되었다는군요.
['무령왕릉' 발굴 당시 무덤 내부 모습]
"무령왕릉"에서는 108종 4600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대부분 [국보][보물]등으로 지정되었답니다.
['무령왕릉 출토품'-무령왕]
[국보]로 지정된 "무령왕"의 관식(왕관)등 금제 유물이 모형으로 전시되 있고...
특히 "무령왕 관식"은 공주 곳곳의 장식물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통과했던
"백제무령왕릉연문"에서도 보았던 문양이 이 "무령왕 관식"이었던 것이군요.
['무령왕릉 출토품'-왕비]
"무령왕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제 장식물들이 그 옛날을 짐작케 합니다.
모두 [국보]로 지정되 있는데 이 여인의 모습까지 보이는듯 하군요.
예나 지금이나 여인들은 이쁘 보일려고 무진 노력하는 것은 같군요.
하긴 DNA는 바뀌지 않으니...
[공주산성정류소]
"무령왕릉"을 관람하고 다시 걸어서 [공주산성버스정류소]로 돌아가
고속버스를 타고 수원으로 가서 분당선으로 갈아타고 귀가 했습니다.
自然이란게 산천초목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리라 ~
그 속에서 살며 이룬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도 자연이리라 ~
"웅진 백제시대"의 유적을 처음으로 둘러 보는 뜻깊은 하루였습니다.
[삼남길]이라는 옛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삶을 알아 보는 것도 무한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공주 지도]
"나는 내가 가는 길이 후에 오는 사람들의 길이 될까봐 언제나 조심스럽다"
파란문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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