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시
-마리아 에스떼르 바스께스에게
크레테섬의 유명한 미궁(Labyrinth)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Borges /1983년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낮은 무한한 장서를 헛되이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한 원고들같이
까다로운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 샘물과 정원 사이에서
어느 한 왕이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갔네.
높고도 깊은 눈먼 도서관 구석구석을
나도 정처 없이 헤매이네.
백과사전, 아틀라스, 동방
서구, 세기, 왕조,
상징, 우주, 우주론을
벽들이 하릴없이 선사하네.
도서관에서 으레
낙원을 연상했던 내가,
천천히 나의 그림자에 싸여, 더듬거리는 지팡이로
텅 빈 어스름을 탐문하네.
우연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필시 이를 지배하리니.
어떤 이가 또다른 희뿌연 오후에
이미 수많은 책과 어둠을 얻었지.
느릿한 복도를 헤매일 때
막연하고 성스러운 공포로 나는,
똑같은 나날, 똑같은 걸음걸음을 옮겼을
이미 죽고없는 그라고 느낀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저주가 같을지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 중요하랴?
그루삭 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가는 것을 바라본다.
주1) 축복의 시
1958년에 씌어진 이 시는 보르헤스 자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애착
을 느끼는 작품이다. 그는 1955년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다. 세
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이었던 당시로서는 생애 최고의 영예였다.
아무 때나 장서로 가득 찬 서고에 들어가 이 책 저 책을 뒤적일 수 있
다는 사실도 그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보르헤스는 거의 시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이 시를 통해 최고의 영예의 순간에 불행의 나락에
굴러 떨어진 삶의 아이러니를 토로하고 있다. <축복> 운운 하는 제목부
터가 아이러니이다.
주2) 마리아 에스떼르 바스께스
아르헨티나 여류 문학평론가로 1957년 보르헤스를 알게 된 후 그가
한때 결혼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시력을 상실한
보르헤스를 위해 강연 여행도 여러 차례 수행했으며, "영국 문학 입문(19
65)" "중세 게르만 문학(1965) "등을 공동 저술했다. 보르헤스 전기와 대담
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주3)폴 그루삭 (1848-1928)
18세에 프랑스에서 이민 와 정착한 아르헨티나의 문인이자 문학평론가.
죽을 때까지 45년간이나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했다.
재임 중에 보르헤스처럼 시력을 상실하였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스페인어의 삶>이라는 잡지의 기자인 리타 기버트(Rita Guibert)는 하버드 대학 교환 교수로 와 있던 보르헤스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청했다.
그는 보르헤스에 대한 회상에서 그를 아르헨티나의 전통적인 군인이자 지식인 집안의 후예로서 그가 그 시대, 그 계층의 사람들에게 있어 전통적이고 특징적인 그런 예절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옷 입는 방식도 매우 보수적이었고, 연약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생기가 있었고 열정적이었으며, 목소리는 묵직하고, 쩌렁쩌렁했다고 한다.
그는 거의 장님에 가까웠지만 매우 뛰어난 기억력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찾고 싶은 책이 책장의 어느 곳에 꽂혀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전화가 걸려오거나 누가 문을 두드리면 비호같이 방을 내닫곤 했다. 보스턴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인터뷰가 있었던 어느 날 오후, 택시 운전사가 그를 찾으러 왔다가 문가에 있는 그를 보고 물었다.
"소경 한 사람을 모시러 왔는데요." 전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보르헤스가 대꾸했다.
"내가 바로 그 소경이오.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소." 보르헤스에 대해 말한다는 것, 그것은 어찌보면 시대와 관련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와 그의 작품들은 동시대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으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는 별개의 시공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보르헤스의 책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상상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미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보르헤스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시력에 대해 그리고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가계 쪽에서 시력을 잃은 사람들 중 저는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세대일 겁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할머니가 장님이 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나는 시력이 좋았던 때가 전혀 없었지만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나는 1년 이상 장님의 생활을 하면서 나의 아버지가 보여준 그 온화함과 아이러니한 태도에 감탄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부드러움은 마치 귀먹은 사람들이 쉽게 화를 내는 것처럼 장님들에게 있어서 아주 전형적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장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평온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귀가 먹은 사람들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은 많지만 장님들에 대해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는 데서 증명됩니다. 장님에 대한 농담은 하나의 잔인한 죄악입니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수술을 했는지 횟수조차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1955년 페론 정권을 붕괴시킨 자유혁명이 나를 국립도서관장에 임명했을 때 나는 이미 책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비에 관한 시(국내에서는 축복의 시로 번역되었다)라는 시 한 편을 썼지요.
나는 그 시에서 신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형용할 길 없는 아이러니와 함께/신은 내게 책들과 밤을 동시에 주었다……. 8만여 권에 달하는 국립도서관의 책들, 그 당시 나를 덮쳐오고 있던 밤. 그러나 황혼이 아주 느리게 왔기 때문에 (천천히 시력을 잃어갔기 때문에-역주) 결코 애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큰 글자로만 된 책을 잃을 수 있었던 때가 있었지요. 그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읽을 수 없게 된 때가 왔지요. 나는 지금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당신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약간 볼 수 있는 것과 완전히 보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거의 절대에 가까운 차이가 있지요.
볼 수가 없는 사람은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와도 같아요. 반대로 나는 어떤 자유의 착각과 함께 여기 케임브리지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돌아다니기에는 충분한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길을 건널 수가 없지요.
기버트는 마지막으로 보르헤스에게 묻는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보르헤스는 "아니요. 그리고 저는 여타의 사람들에게 그 어떤 충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의 인생조차도 겨우 간신히 꾸려왔으니까요……. 나는 약간 표류하며 나의 삶을 살았지요."라고 답했다.
(하략)
( 인터뷰 전문은 "보르헤스가 보르헤스에 대해 말하다" 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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