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고승인 한암(漢巖)의 본관은 온양 방씨(方氏)이다.
1876년 3월 27일에 강원도 화천에서 아버지 기순(箕淳)과 어머니 선산 길씨(吉氏) 사이에 3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호가 한암이고 법명이 중원(重遠)이다.
한암은 천성이 영특하고 총기가 빼어났으며, 한번 의심이 생기면 풀릴 때까지 해답을 구하기를 그만두지 않는 성격을 지녔다고 전한다.
9세에 서당에서 사략(史略)을 읽다가 '태고에 천황씨(天皇氏)가 있었다'는 첫 대목에 문득 의심을 일으켜, 선생에게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했다.
이후 그의 가슴 속에는 잠시도 놓아버릴 수 없는 의심이 일었으며, 마침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을 찾는 내적인 문제로 화하게 되었다.
1897년 22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던중 인간의 능력과 욕망의 허망함을 사색하다 마침내 입산수도를 결심하였다.
처음에 그는 금강산 장안사의 행름(行凜)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수행했는데, 그때 진정한 나를 찾고 부모의 은혜를 갚으며 극락에 가겠다는 세 가지 원력을 세웠다.
어느 날 금강산 신계사의 보운강회(普雲講會)에서 우연히 보조(普照)국사의 '수심결'(修心訣)을 읽다가 제1차 깨달음을 얻었다.
1899년 24세되던 해 한암은 전국의 고승들을 찾아 구도의 길에 나섰다.
그해 가을 김천 청암사에서 경허(鏡虛) 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청하였다.
경허가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일러주는데, 갑자기 안광(眼光)이 홀연히 열리면서 깨달았다.
이때 한암은 발 아래 하늘 있고, 머리 위에 땅 있네
(脚下靑天頭上巒)
본래 안팎이나 중간은 없는 것
(本無內外亦中間)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봄이여
(跛者 行盲者見)
북산은 말 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구나
(北山無語對南山)
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1905년 봄 통도사 내원선원(內院禪院)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5년간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한암은 1910년 봄단신으로 만행길에 올랐다.
그는 집안의 고향인 평안남도 맹산군 애전면 우두암(牛頭庵)에 들어가 혼자서 보임공부를 계속하였다.
그해 겨울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 홀연히 마음의 자재를 얻고,
부엌에서 불 지피다가 홀연히 눈 밝으니
(着火廚中眼忽明)
이를 좇아 옛 길이 인연따라 분명하네
(從玆古路隨緣淸)
누가 내게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若人問我西來意)
바위 아래 울려대는 물소리는 젖지 않았다 하리라.
(岩下泉鳴不濕聲)"
라는 계오송(契悟頌)을 읊었다.
이처럼 '다시 깨친' 이후 한암은 세상사의 넘나듦에 자유자재한 대자유인이 되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선풍(禪風)을 떨치며 후학을 교화하였다.
그는 1921년 9월에 건봉사 만일암 선원의 조실로 추대받고, 선방납자들을 지도하였다.
이때 '선원규례'(禪院規例)라는 선원 규칙을 제정하여, 참가 대중의 화합과 수행정진에 전념하도록 가르쳤다.
50세가 되던 1925년 한암은 서울 봉은사에서 조실로 있다가,
'내 차라리 천년동안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寧爲千年藏踪鶴)
백년동안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不學百年巧言鶯)
라는 게송을 남기고, 이듬해 강원도 오대산에 이르렀다.
한암은 상원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27년동안 주석하며 이곳에서 선풍을 진작했다.
그는 1926년에는 '승가 5칙'을 제정했다.
그리고 1928년 경봉선사와 서간문답이 시작된 후 총 24편의 서신을 교환했는데,
이 서간문은 '화중연화소식'(火中蓮華消息)에 실려 있다.
1929년 1월 5일 한암은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원로기관인 7인의 교정(敎正)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1930년 '불교' 제 70호에 '해동초조(海東初祖)에 대하야' 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암은 보조법통설(普照法統說)에다가 초조를 도의(道義)로 설정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에까지
소급하여 조계종의 시초를 앞당기고 있다.
즉 그는 조계종이 육조(六祖), 마조(馬祖) 계통의 본원적 선이지, 임제선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후 1931년 3월 '선사(先師) 경허화상 행장'을 저술1935년 3월에 선학원에서 개최한 조선불교 수좌대회에서 한암은 혜월, 만공과 함께 조선불교 선종의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36년 봄 강원도 3대 본사 승려수련소를 상원사에 설치하고, 매년 각 절에서 수련생을 모집하여 불경을 강설했다.
이처럼 한암은 평생 교(敎)를 버린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좌선의 여가에 강의하고 독송하라'고 가르쳤다.
1937년 한암은 '보조법어'(普照法語) '고려국보조선사어록찬집중간서' '금강경오가해' 등을 편집해 현토를 붙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그 해 상원사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비구계와 보살계를 설하니 수계대중이 80여 명이었다.
그리고 1941년 6월 조선불교 조계종(曹溪宗)이 출범되었을 때 한암은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4년동안 종단을 이끌었다.
1947년 정월 해제 직후 상원사에 화재가 발생해 법당과 요사채가 전부 타버렸는데 이때 한암의 문집인 '일발록'(一鉢錄)도 함께 소실되었다.
1948년 해방 후 조선불교 초대 교정이었던 한영(漢永)스님이 입적하자, 6월 30일 한암이 제 2대 교정으로 추대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절에 있던 대중들이 피난을 떠났지만 한암은 상원사에 남았다.
야밤에 대원들을 이끌고 와서 공비를 토벌하기위해 절을 불태워야 한다고 알리는 장교에게, 한암은 잠깐 기다리라고 이르고 가사와 장삼을 갈아입은 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앞에 좌정한 후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다.
장교가 나올 것을 강요하자 한암은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나는 부처님의 제자다. 그대가 장군의 명령을 따르듯이 나도 부처님의 명령을 따를 뿐이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라고 하였다.
결국 장교는 그의 인격에 압도되어 돌아갔다고 한다.
1951년 3월 초 한암은 미질(微疾)을 보였다.
그리고 7일째 되던 날 아침인 22일,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신 후 장삼을 갖춰 입고 선상에 단정히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 열반하니, 세수 76세 법랍 54세였다.
제자로는 탄허(呑虛) 보문(普門) 난암(煖庵) 등이 있으며, 1959년 3월 문도들이 상원사에 그의 부도(浮屠)와 비를 세웠다.
한암은 20여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종정직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고지도자로서 한국의 전통 선을 진작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보조법어'(普照法語)를 현토 간행하고 선교겸수를 가르쳤다는 점에서 '보조 선의 근대적 계승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참선중에도 반드시 납자에게 <금강경>을 송독하게 하여 선교일치를 실천했으며,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항상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참선에만 몰두했다고 전한다.
만공과 한암은 함께 경허의 법을 이어 조선 선가(禪家) 중흥의 전성시대를 풍미한 인물로서, 각기 독자적인 가풍을
이루어 당대에 '남만공(南滿空), 북한암(北漢岩)'으로 불렸다.
한암은 영원한 구도자로서의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선사였으며, 앵무새이기를 거부한 선과 교를 아우른 진정한 스님이었다.
아울러 몇 차례의 깨달음 후에도 닦음을 멈추지 않은 당대의 뛰어난 선객이었다.
#김탁(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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