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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나라 최고의 목판화가 / 오윤 (1)~

한적한길 2018. 9. 29. 16:11

우리 나라 최고 목판화가로 '우뚝'

 '천렵': 오윤, 종이에 고무판 채색, 25.5×31 cm, 1984년.

 

'향교 마을': 오윤, 목판에 채색, 22.7×17 cm, 1984년.


평범한 우리 이웃을 주로 그렸던, 민중들을 사랑한 판화가이자 화가인 오윤의 작품과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향교가 세워진 곳은 그 일대의 중심이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작품을 볼까요? 멀리 병풍으로 두른 듯 완만한 산이 길게 뻗어 있고, 아담한 작은 산이 향교를 감싸고 있습니다.
앞산과 멀리 보이는 산 사이는 여백을 남겨 그 사이 넓은 공간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너른 평야와
여러 마을이 그 사이에 있었겠지요.

산속에 포근히 안긴 향교는 여러 채의 건물을 갖추고 있어 제법 큰 규모입니다.
 향교 밖으로는 민가 한 채가 섰고 은행나무인듯한 커다란 나무가 마을 들머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계절은 언제 일까요? 나무에 잎은 없지만 향교를 감싸고 있는 작은 동산이 푸른빛이고 햇살이 따뜻한 걸 보면
아마 봄이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하지요. 만약  여러분이 이 향교 마을을 방문해 그림 속의 풍경을 그대로 보려면,
어디서 봐야 할까요? 아마도 손오공처럼 구름 위에서 보든지, 아니면 새처럼 하늘에 올라 내려다 봐야하겠지요.
우리 전통 그림들은 이 작품처럼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듯 '부감법'으로 그려진 것이 적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여러분은 손오공이나 새가 되어 '향교 마을'을 구석구석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색 목판으로 제작된 '향교 마을'은 사람을 즐겨 그린 오윤의 작품으로는 아주 드물게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 풍경화입니다.

다색이란 여러 색, 목판화란 나무판을 재료로 한 판화라는 뜻입니다. 다색 목판은 본래 색의 수만큼 판을
다 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한 두 개의 판만을 제작해 찍은 다음 나머지는 색을 칠하기도 합니다.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불교 경전이나 책 출판을 위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초등학교 1학년 때 몽당연필을 의인화한 '나는 연필이다'로 교내 백일장에서 1위를 하기도 했던 오윤은,
미술 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공부 보다는 혼자 우리 나라 전국의 산야와 사찰을 여행하며
한국적인 미와 문화를 찾아 다녔습니다. 또 경주 불상이나 민화같은 그림과 전통 예술인 판소리, 탈춤, 농악, 도깨비 설화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습니다.

특히 오윤은 전통적인 우리 목판을 연구하는 데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그 틈틈이 주변의 사람,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꾸준히 관찰하고 사람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우리 나라 최고의 목판화가로 우뚝 섰지요.

김장, 천렵, 범놀이, 아이들의 노래 등이 바로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 사람과 가족을 표현한 그의 대표 작품들입니다.

◇오윤(1946~1986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농부가 되고자 했으나 학교 선생님이자 소설가인 아버지 오영수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습니다. 특히 판화를 꾸준히 연구해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판화가가 되었습니다. 40 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6년 한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지난 2006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 주기 추모전 '오윤, 낮도깨비 신명마당'을 가졌습니다.


1946. 4. 13 부산~1986. 7. 5 서울.
1980년대 민족·민중 미술운동을 대표하는 미술가.
전통 미술양식에 대한 해박한 이해에 기초하여 민중의 삶의 체취가 깊게 담긴 전형적인 민중상을 각인해낸 목판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판화가 오윤(吳潤)의 작품

 

 

 

    

 

 

 

 

 

 

 

 

 

 

 

 

 

 

 

 

 

 

 

 

 

 

 

 

 

 

 

 

 

 

 

 

 

 

 

 

 

 

 

  

 

 

 

 

치열한 예술 정신으로 살았던 판화가 오윤

 

곱슬머리에 깡마른 체구로 술과 친구들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던 오윤.

40년이라는 짧은 생 동안 치열했던 그의 삶의 이야기와 작품들은 현재 많은 이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오윤(1946-1986년)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그들을 위해 농부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부조리한 우리 현실과 힘겹게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그는 민중 미술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사회 운동가로서가 아닌 화가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힘겨운 하루 일상과 보통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서 현실을 이야기하였고,

그들이 어우러져 추는 춤사위를 목판에 새겨 그들의 슬픔과 한을 위로하였습니다.

오윤은 탈춤, 민속놀이, 판소리 현장을 찾아 다녔습니다. 굿판에서는 꽹과리도 잘 쳤고, 이애주 선생(현 서울대 교수)으로

부터 민속춤을 사사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특히 1985년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시회를 준비하며 <칼 노래> <남녘 땅 뱃노래> <도깨비> 등 그의 대표작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들을 쏟아냅니다. 한 칼 한 칼 목판에 선을 긋고 각을 떠낸 그의 작품에는 힘찬 기운이 생동합니다.

 

  1986년, 예술 혼을 불태웠던 그의 개인전은 1986년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여러 곳에서도 그의 전시회를 요청했고 고향인 부산에서도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몸을 돌보지 않고 그림을

그려 왔던 오윤은 부산 전시회를 마친 뒤 몸져 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간경화가 악화가 되어 마흔 한 살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습니다.


판화는 회화만큼 쉽게 접하는 매체는 아니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다루는 분야입니다.

오윤은 실제 판화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목판과 조각 도구들을 직접 고르고 만들어서 사용하였습니다.

나무라는 판재는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칼 맛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한 재료입니다.

오윤의 단색 판화에는 담백한 흑과 백의 여백이 주는 형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출처 : 넓은 여울
글쓴이 : 희망의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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