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국불교 최초 법난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법난(法難)
고구려 보장왕, 사찰 도교사원으로 전환
고려시대 몽고군 침략으로 인해 사찰이 소실되는 법난을 당한 황룡사 터
기나긴 역사 속에서 불교를 핍박하거나 나아가 불교 자체에 대한 말살을 시도한 사건들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사찰을 훼손하거나 철폐시키는 것은 물론 사찰재산의 몰수, 탑과 불상 및 경전의 파손, 불법을 펴는 법회의 금지, 승려의 환속, 출가금지에서 학살까지 법난(法難)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러한 사건들은 불교를 태동시킨 인도에서부터 우리나라까지 불교가 전래된 많은 나라에서 발생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에 버금가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불교를 태동시킨 인도에서는 6세기 초 북인도를 침입한 훈족이 자행한 법난과 8세기 이후 이슬람교도들의 침입으로 비롯된 법난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호전적 기질을 갖춘 회교도들의 침략과 박해가 지속되면서 탑과 불상이 파괴되고 경전이 불태워졌다. 또한 불법을 전하는 승려들까지 학살되면서 사실상 명맥이 단절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개소문 주청에 왕이 도교 숭배
그리고 세계적인 종교지도자 달라이라마를 배출한 티베트에서도 란다르마왕에 의해 심각한 파불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왕이었던 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면서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등의 박해를 가함으로써 승려들이 법난을 피해 이웃나라로 피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이쇼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불교는 다시 부흥의 시기를 맞았다.
인도나 티베트에 이어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 탄압 사건은 중국의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당의 무종, 후주의 세종 때 불교가 겪었던 탄압 사건을 이르는 말로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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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탑 복원도. |
북위 태무제는 도교를 신봉하면서 446년 불교를 배척하는 명령을 내려 6년 동안이나 사찰과 불상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파불을 자행했다. 그리고 북주 무제는 유교를 신봉하면서 574년에 불교를 폐지하고 승려들을 강제 환속시켰다. 이어 당 무종은 841년부터 5년간 4600개의 사찰을 철폐하고 26만여명의 승려를 환속시킴으로써 불교계 각 종파의 교세를 크게 약화시켰다. 이 무종의 법난은 그의 연호를 딴 ‘회창(會昌)의 폐불’로 더 유명하다. 후주 세종은 앞의 세 법난과 달리 각기 다른 종교와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재정난과 승단의 타락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세종은 불교교단을 숙청하는 한편 불상을 녹여 주화를 제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로 다른 종교와 갈등을 빚지 않았다. 스스로 시련을 겪으면서도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해왔고, 그처럼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한 종교이기에 정권차원의 조직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국가에서 오랜 기간 그 존재를 이어올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법난의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는 불교 수용에 있어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컸었고, 이 때문에 결국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 상황을 거치면서 불교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차돈의 순교를 한국불교 역사상 최초의 법난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기존에 그 존재가 확실했던 불교를 탄압하거나 배격했던 일반적 법난의 역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기존에 그 민족이 믿고 따르는 종교가 있을 경우 새롭게 종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를 법난으로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법난이라 부를 만한 첫 번째 사건은 무엇일까.
불교탄압의 첫 번째 사례는 『삼국유사』‘보장봉노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조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 연개소문은 보장왕에게 “솥에는 발 세 개가 있고 나라에는 삼교(三敎)가 있는 법인데, 신이 보기에 우리 나라에는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라고 진언하는 대목이 나온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진언에 따라 고구려는 당나라에 도교의 전파를 요구했고, 당 태종은 숙달(叔達) 등 도사 8명을 고구려에 보냈다.
이때 고구려 보장왕은 사찰을 도관(道館)으로 만들고 도사를 그곳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유교의 유사 위에 도사를 앉혀 도교가 불교와 유교보다 우위를 차지하도록 했다. 이처럼 보장왕이 국가차원에서 도교를 숭배함에 따라 불교계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위치가 된 것이다. 비록 『삼국유사』에서 법난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 기술이 없기는 하지만 사찰을 빼앗아 도관으로 사용하도록 했으니, 불상을 치우고 승려들을 그곳에서 쫓아내는 것은 물론 경전까지 없애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보장왕이 사찰을 도관으로 바꾼 사실은 고구려 최초의 불교탄압 사건이자, 곧 한국불교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법난이 되는 셈이다.
고려 땐 황룡사탑-대장경 소실도
당시 고구려 고승 보덕화상은 보장왕에게 불교탄압을 수차에 걸쳐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구려가 곧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며 신통력으로 방장(암자)를 날려 천리길이나 떨어진 전주 고달산으로 옮겼다. 보덕화상이 고구려 반룡산에서 전주 고달산으로 방장을 날려서 옮긴 기록은 훗날 고려 문필가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서도 의천 스님이 이곳을 방문해 시를 남긴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일연 스님 역시 “불교는 넓고 한이 없는 바다다. 냇물 같은 유교 도교 다 받아들인다. 가소롭다 여왕(麗王)은 웅덩이에 한계를 치고 와룡이 바다로 옮아감을 알지 못했네”라는 시를 통해 보덕화상을 기리고, 고구려 보장왕의 어리석음을 조롱했다.
어쨌든 보덕이 백제로 떠난 이후 고구려의 고승들 역시 백제와 신라 그리고 일본으로 떠남에 따라 보장왕과 연개소문에 의한 법난이 더욱 심각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결국 고구려는 이때부터 멸망의 길을 걸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단 한차례 고구려에서 발생했던 법난 이외에는 특별히 법난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고려시대에 와서는 숭불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에 걸쳐 큰 법난이 발생한다.
먼저 몽고군이 1232년 12월 2차 침공을 강행했을 때 고려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몽고군은 온 백성의 정신적인 표상이자 신앙이며 호국정신의 결정체인 대장경판을 불태워서 민심을 동요시키고 이 땅을 유린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은 초조대장경 소실 4년 만인 1236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재조에 착수, 15년 만인 1251년에 이를 완성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귀중한 불교문화재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몽고 군은 경주까지 내려가 신라시대 이래 호국의 상징으로 남아 있던 황룡사와 9층탑을 불태웠다. 이처럼 초조대장경과 황룡사 소실이 외세의 침략에 의해 겪어야 했던 법난이었다면, 문신과 무신 그리고 무신과 무신들 간의 정권찬탈 과정에 휩쓸려 일어난 법난은 내부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는 국가에 변란이 많았던 시대상황이 원인이기도 했다. 당시 각 사찰에서는 전란에 대비해 승군을 조직하면서 독자적인 무력기반을 갖추게 됐다. 때문에 권력찬탈을 도모하는 무리들은 승군을 이용했고, 이 과정에서 때론 반대파의 보복을 받아 무참하게 사찰이 짓밟히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사』에 나타난다. 그 연유를 알 수는 없으나 명종 4년 귀법사 승려 수백 명이 북문을 침범해 행정을 맡아보던 승록 언선(彦宣)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이의방에게 보복을 당해 승려 수십 명이 죽었다.
고려 무신 권력다툼 관여 법난 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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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들의 권력다툼에 끼어들어 법난을 자초했던 불교계의 자성과 나아갈 바를 제시했던 보조국사 지눌 진영. |
이의방은 이후에도 사찰을 파괴하는 보복전을 통해 불교를 탄압했다. 이후 경대승은 정중부가 정권을 수립할 때 지원한 사원세력, 즉 승병을 제거하기 위해 10여명의 승려들을 해도로 귀양보냈고, 명종 26년에는 최충헌이 권력을 잡으면서 승려와 사원의 정치적 관여를 차단하고 사찰의 경제력 증가를 막기 위해 비보사찰(裨補寺刹, 도참설과 불교 신앙에 따라 전국의 명처 명산에 세운 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원을 통제했다. 이에 따라 무신정권이 집권한 기간 동안에는 사찰파괴, 승려학살 등 가장 극심한 형태의 법란이 자행됐던 것이다.
고려시대에서는 이처럼 외침과 내부 자정능력 상실로 인한 법난이 있었고, 무신정권 이후에야 비로소 자성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몇몇 결사(結社) 형태로 나타났다. 선종에서 지눌의 정혜결사와 천태종 요세의 백련결사, 교종 요일의 반룡사 결사 및 대고의 화엄결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때 결사운동의 선봉에 섰던 보조국사 지눌은 「정혜결사문」에서 “우리들의 소행을 아침저녁으로 돌이켜보면 어떠한가. 불법에 핑계하여 나와 남을 구별하여 이양(利養)의 길에서 허덕이고 풍진 가운데에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 한들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며 권력과 밀착해 현실적 이익만 추구하는 승도들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법난에 직면하게 된다. 삼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법난은 폐불에 가까운 법난의 전주곡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선 성종-연산군-중종 70년간 불교 말살
86년 해인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 참가자들이 10·27 법난 해명과 불교악법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89년 10월 27일 정토구현 전국승가회 등 7개 단체 500여 명이 동국대에서 10·27 법난 진상규명을 위한 실천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민족사 간 한국불교 100년
사찰-불상-경전 불태우고 승려 강제 환속
도승법 폐지로 불교존립 법적 근거 폐기도
삼국시대 고구려와 이후 고려에서 벌어진 법난은 조선시대에서 벌어질 최악의 법난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을 뿐이다. 조선 500년은 법난과 박해로 점철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과 세종 시대에 자행된 교단 통폐합을 시작으로 성종, 연산군, 중종 시기의 불교 말살 정책까지 가히 폐불 시대라 부를만한 사건이 쉼 없이 일어났다.
조선시대 법난은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의정부에서 상서를 올림에 따라 사찰에 소속된 노비의 수가 대폭 감축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태종 6년(1406) 3월에 다시 의정부의 주청에 따라 지역별로 사찰을 구분해서 전국에 11종 242사만을 남기고 나머지 사찰은 모두 폐사 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태종 7년에는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등 7개 종단만 존속시켰다.
이같은 사실은 『태종실록』에 그대로 실려 있다. 실록에 따르면 태종 6년 3월 의정부에서 선종과 교종의 각 종파를 합해 남겨둘 사찰을 정하도록 했던 것. 이에 따라 의정부가 조계종과 총지종을 합쳐 43사, 천태소자종과 법사종을 합해 43사, 화엄종과 도문종을 합쳐 43사, 자은종 36사, 중도종과 신인종을 합해 30사, 남산종과 시흥종은 각각 10사를 남길 것을 건의하면서 당시 11종이던 종단이 7종으로 통폐합 된 것이다.
태종에 이어 세종이 왕위에 등극한 이후에는 일부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이 빌미가 돼서 유생들이 극단적인 불교폐지론까지 주장하고 나섰다. 유생들의 척불론이 강해지자 급기야 1424년 4월 예조에서 불교계 비리를 지적하며 대폭 정비할 것을 주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세종은 당시 7개 교단을 다시 통폐합해서 선종과 교종으로 양분하고 사찰도 36개 사찰만을 남겨 선종과 교종에 각각 18개씩 배정했다. 그야말로 불교를 싹부터 잘라내는 법난이 일어난 것이다. 세종은 이어 선종에 전 4250결, 교종에 전 3700결을 나눠주고 대부분의 사찰재산을 나라에 귀속시켰다. 뿐만아니라 승려의 수도 선종 1970명, 교종 1630명으로 제한함에 따라 불교교단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세종은 선교양종 36 사찰만 남겨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정책적으로 탄압 받으면서 불교문화재의 손실도 이어졌다. 태종 6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제주 법화사의 미타삼존상을 본국으로 가져갔고, 이듬해인 태종 7년에는 명나라가 다시 사신을 보내 사리를 요구하자 태상왕이 보관했던 사리 303과를 보내기도 했다. 또 태종 11년에 다시 사리를 요구해 전국에서 모은 558과의 사리를 헌상하는 등 조선왕실은 명나라가 요구하는 대부분의 불교유산을 유출함으로써 성보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조선 초기 법난에 이어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성종과 연산군· 중종으로 이어지는 70년 동안 불교계는 참기 어려운 법난의 회오리 속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성종은 재위 2년(1471) 도성 안에 있던 염불당과 경전을 언문으로 번역해 간행하던 간경도감을 폐지시켰다. 그리고 4년에는 사대부의 부녀자가 출가하는 것을 금지했고, 6년에는 도성내외의 비구니 사찰 23곳을 헐어냈다. 또 8년에는 국왕의 생일 때마다 사찰에서 행해지던 축수재(祝壽齋)를 폐지했고, 이어 23년(1492)에 경국대전의 도승법을 정지시킴으로써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강제 환속시키고 군역에 충당하도록 했다. 그로 인해 전국 사찰은 텅 비게 되었고, 끝내 폐사가 되고 말았다.
당시 유생들은 인수대비가 정업원에 안치했던 불상을 불태워버리는 등 척불 행각을 계속했고, 이어 백성들이 불교제례를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불교 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다.
성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그나마 남아 있던 조선불교 양대 종단의 본산인 선종도회소 흥천사와 교종도회소 흥덕사, 그리고 세조가 세운 원각사를 폐지해 관아로 삼았다. 그리고는 이도 모자라 겨우 남았던 사찰의 승려들마저 내쫓고 환속시켜 노비로 삼는 등 횡포를 그치지 않았다. 연산군은 한발 더 나아가 승려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마저 폐지함으로써 불교의 존재성을 말살했다.
성종과 연산군이 대를 이어 불교말살 정책으로 일관한데 이어 왕이 된 중종은 불교말살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때문에 정권차원의 불교말살정책에 힘입은 배불론자들과 유생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탄압하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중종 4년(1509)에는 유생들이 청계사에 난입해 경첩을 훔쳐가는 일이 있었고, 5년에는 흥천사의 5층 사리각을 불태우기도 했다. 중종은 각 도의 사찰을 허물어뜨리는 한편 토지를 향교에 나눠주었고, 원각사를 헐어냈으며 흥천사와 흥덕사의 대종을 녹여 총통을 만들었다. 심지어 경주 동불상을 녹여 무기를 만들기까지 하는 등 불교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온갖 불교박해를 일삼아온 중종은 결국 11년(1516)에 이르러 경국대전에 있는 도승법을 아예 폐지함으로써 이름뿐이었던 선종과 교종의 종단은 물론 승과에 이르기까지 불교존립에 필요한 법적 근거마저 없애버렸다. 이처럼 성종에서 연산군과 중종에 이르기까지 3대 70여 년간 행해진 위정자들의 폐불 행위는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이후 1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거치며 이룩해 놓은 불교의 우수한 사상과 문화를 송두리째 짓밟는 결과를 초래했다.
보우(普雨) 스님은 「선종판사 계명록」을 통해 당시 불교계가 겪은 법난을 이렇게 설명했다. “본조(조선)의 연산군 때에 이르러 한번 거센 산바람이 불어닥침을 만났고 중종 때에는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풍(禪風)은 부채를 숨기고 불일(佛日)도 빛남을 감췄다. 모든 나라 안의 사찰들은 나날이 없어지고 다달이 훼손되어 산에는 절이 없고 절에는 스님이 없어 요행히 총림 아래서 머리 깎고 물든 옷 입은 사람도 관리가 침범하고 속인들이 재앙을 일으켜 눈에는 눈물이 있었고 그 눈물에는 피가 있었다. 장차 외로이 명맥을 남길 곳도 없어지고 형세는 궁극하여 길짐승으로 전락했다.” 불교계에 불어닥친 법난으로 인해 폐불 위기에 처한 당시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 땐 사찰령으로 자율권 억압
조선시대에는 또 하류계층의 스님들을 중심으로 부역에 시달려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성종 14년에는 창경궁 창건공사에 4천명이 8개월 동안 동원됐고, 중종 30년에는 한강 상류 견항(犬項) 공사에 3천명의 승려가 1년간 동원되기도 했다. 또 태안과 서산의 중간 지점을 남북으로 뚫는 대규모 운하공사인 의항(蟻項) 공사에도 5천명의 승려가 동원되는 등 스님들은 그야말로 학대받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조선불교는 이렇게 황폐화되었던 것이다.
불교계는 조선시대 말미에 승려의 도성출입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새로운 전기를 맞는 듯 했으나, 일제가 1911년 6월 사찰령을 공포하면서 총독부의 관리감독을 받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총독부는 사찰령에 이어 사찰령시행규칙을 공포해 전국 1300여 사찰을 30본산으로 나누어 지배했고, 사원의 명칭을 변경할 때도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것은 물론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주권을 박탈했다. 여기에 더해 재산권을 박탈했음은 물론이다. 이 시기 불교는 총독부와 친일 주지들에 의해 수탈과 착취를 당하는 법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역대 독재정권 등 정치권력의 간섭과 탄압이 이어져 적지 않은 고초를 감내해야만 했다. 미군정은 미군이 진주한 그해부터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는 등 편파적인 기독교 위주 종교정책을 시행했다. 기독교 위주 정책은 부처님오신날이 이로부터 30년이나 지난 1975년에 법정소송을 거쳐 겨우 공휴일로 지정된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군종장교는 1951년 대통령령으로 가톨릭과 개신교에만 군종제도를 시행하고 불교 군종은 이로부터 17년이 지난 1968년 월남파병을 계기로 허용돼 지금까지도 군종장교 중 군목이 다수를 차지하게 하는 모순을 낳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은 불교 내부 문제에 깊이 개입하면서 소위 불교관련 담화를 4차례나 발표해 비구승과 대처승이 혈투를 벌이는 불교계 내분을 부추겼다. 또 박정희 정권에서는 일제시대 사찰령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불교재산관리법을 제정했으며, 불교재산의 합리적 관리를 명분으로 제정된 이 법은 이후 불교계를 통제하는 악법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1987년에 이르러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체입법됐다.
해방 이후 가장 큰 법난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자행됐다. 12·12 쿠테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자율적 종단 운영을 기치로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불교계를 군화발로 짓밟는 사상 초유의 10·27법난을 일으켰다. 전두환 정권은 사찰 내 용공분자 및 범법자 색출을 명분으로 18개 종단 소속 3000여 사찰에 일제히 계엄군을 난입시켰다. 신군부는 이때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해 승려와 민간인 등 153명을 강제 연행했고, 승려 10명과 일반인 8명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노태우 정권 때 국무총리가 사과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군사정권의 종교탄압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80년 10·27법난 근현대 최악
불교계는 이후로도 크고 작은 탄압에 직면해 그때마다 정권에 대항해야만 했다. 불교관계 악법 철폐와 불교의 자주성을 역설했던 1986년 9·7 해인사 승려대회를 주도한 스님들이 구속되기도 했고, 김영삼 정부 때는 종단개혁을 위한 구종법회에 수백 명의 폭력배와 전경들을 투입해 도량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이명박 장로 정권 출범 후 끊임없이 터져 나온 공공기관에 의한 종교편향 사건은 결국 불교탄압이라는 반발을 불러와 서울시청 앞 광장에 20만 명의 불자들이 모이는 사상초유의 불교도 정치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한국불교의 법난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이처럼 새로운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승가의 화합을 통한 진정한 불교의 자주성 회복이 절실하며, 이것이 바탕이 될 때 1700년 한국불교의 정통성도 굳건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