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side 칼럼-나희덕의 예술이야기-자코메티의 모델들 |
입력시간 : 2018. 02.27. 00:00 |
| 알베르토 자코메티 '걸어가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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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展)은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자코메티가 죽기 몇 달 전 그와 절친했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포착한 순간이다. 비 내리는 거리를 우산도 없이 코트깃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 채 걷고 있는 한 남자. 낡은 코트와 구두, 한 손에 들고 있는 담배, 쓸쓸한 표정과 웅크린 자세, 그러나 시선만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오래 전 취리히 쿤스트하우스에서 자코메티 특별전을 본 적이 있다. 시기별로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떠오른 질문은 자코메티는 왜 그토록 인간의 형상을 만드는 작업에만 골몰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정물을 그리는 일엔 관심이 없었고, 사람의 두상이나 흉상, 입상 등을 주로 제작했다. 파리에 체류하며 초현실주의를 비롯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교류했지만 실물로부터 출발한 구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코메티는 전통적 인체 표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자기만의 표현방식을 탐구해나갔다. 육체의 묘사와 재현을 넘어 정신의 본질을 담아내려는 그 탐구는 끊임없는 '지우기'와 '비워내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자코메티가 창조한 인간 형상은 후기로 갈수록 더 작아지고 가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걷어내고 또 걷어내서 더 이상은 아무것도 덜어낼 수 없을 때까지, 그리하여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스스로 드러나고 거기에 어떤 영원성이 깃들 때까지, 그는 40년 동안 7평짜리 작업실에서 잿빛 점토들을 매만지며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그 작업실에서 모델이 되어준 이들은 가까운 가족과 친구, 연인들이었다. 이번 전시의 구성도 모델들을 차례로 다루면서 자코메티의 삶과 작품세계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수많은 화가의 모델이었고 짧지만 가장 강렬한 사랑을 경험하게 해준 뮤즈 이사벨, 평생을 헌신적으로 형의 작업을 도왔던 남동생 디에고, 온갖 애증 속에서도 끝까지 아내의 자리를 지켜낸 아네트, 스무 살도 안 된 매춘부로 37살이나 연상인 자코메티를 만나 연인이 된 캐롤린, 철학을 전공한 일본인 친구 야나이하라, 유명 사진작가였다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엘리 로타르 등이 그의 모델들이었다.
그런데 친숙한 모델들을 앞에 앉혀놓고도 그는 번번이 혼란에 빠지곤 했다. "모델을 오랜 시간 보면 볼수록 모델과 나 사이엔 많은 단계가 생긴다. 내가 과연 누구를 봤는지 또는 누구를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낯선 인물이 되어 있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거나 만든다는 것은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걸 의미하며, 조각가와 모델은 그 은밀한 모험에 함께 하는 동지인 셈이다. 모델과 재료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틈을 계속 파고들면서 자코메티는 자신이 '아는 대로'가 아니라 '보는 그대로' 그리려고 노력했다.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방에 따로 전시된 대작 <걸어가는 사람Ⅱ>(1960)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음을 향해 고독하게 걸어가는 한 사람.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가늘고 긴 형상은 자코메티 특유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을 지녔다. 그걸 만지면 삶의 온갖 고통과 슬픔이 손끝에 묻어날 것만 같다. 더 이상 한 줌의 흙도 덜어낼 수 없는 그 직립의 형상은 '사람인(人)' 자의 간결한 선으로 수렴된다. 자코메티에 대한 가장 뛰어난 예술론인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서 장 주네가 "당신 작품을 들여놓으면 방안이 사원처럼 돼 버릴 것 같다"고 말한 이유를 알겠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그 조각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탑돌이하듯 몇 바퀴 도는 것이 곧 명상이고 기도라는 생각이 든다.
방 앞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어떤 경우든 죽은 사람보다도, 의식이 없는 사람보다도 가볍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것, 그 가벼움이다." 걷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중력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의 운명. 처음에 본 자코메티의 사진과 <걸어가는 사람Ⅱ>의 형상이 마음 속에서 자꾸 겹친다. 수많은 모델들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조선대 인문대학장